191화
내 질문이 불편한지 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곧 어둡게 미소 지었다.
“도덕과 상식을 따져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어요. 전사라면 잘 알 텐데요. 적들은 날이 갈수록 비열하고 교묘해져요. 헤르간 사태만 봐도 우리끼리 내분을 일으켜 자멸하길 바랐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오히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벨은 눈빛을 차갑게 굳혔다.
“적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받아들이고 이용해 먹어야 합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사제인 제가 마왕을 유혹하는 것과 같은 이치네요.”
조금 울컥한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론을 짐짝처럼 대하고 나를 도구처럼 바라보는 그녀에게. 황제의 말에만 복종하여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이용할 그녀에게. 벨은 내 도발에도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사제인 말레드레드가 폐하께서 시키신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마왕을 유혹해 폐하께서 원하실 정보를 캐낸다면, 그대는 누구보다 훌륭한 애국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제 한 목숨 보존하는 데 애쓰고 어설프게 일을 처리한다면, 글쎄요……. 제 일을 못하는 전사가 어떤 대접 받는지는 말레드레드도 모르지 않겠죠.”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한 그녀는 이것들을 모두 2층 내 방에 배치해 놓겠다고 했다.
“물건들이 뿜는 마기는 말레드레드에게 해가 되지 않아요. 모두 만져도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의 마기만 뿜어내거든요. 물론 같이 생활하면 좋을 게 없지만 당분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그녀는 시종들이 들고 올라가는 것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근데 마왕이 언제 이곳을 방문할까요?”
“저보고 그 존재의 출현을 예측하란 건가요?”
“그냥 추정이라도요.”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변덕스러운 존재가 언제 나타날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불러서 오게 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 방법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아론과 함께 있는 지금은 더더욱. 벨은 내가 입술을 다물자 빤히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좋습니다. 어쨌든 마왕이 나타나면 제게도 알려 주세요.”
“마왕이 당신을 가만둘까요?”
내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벨이 움찔하며 나를 다시 돌아봤다. 나는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다고 말했다.
“그가 인간 기사를 가만둘 리 없어서요.”
“물론 그렇겠죠. 저는 마왕이 가고 난 뒤에 불러달라는 겁니다. 마왕에게 맞설 의도는 없어요. 그건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니니까.”
벨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몸을 돌려 자리를 비했다. 나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마왕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키지 않아도 그를 결국 불러내야 한다는 것도.
‘황제가 시간을 많이 줄 리 없어. 무엇보다도 아론 역시 그 상태로 오래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무거운 마음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올라가자 새롭게 자리한 물건들이 보인다. 방은 이상할 정도로 음산했다. 단순 느낌 탓은 아닐 것이다. 마기로 가득한 물건들이 가득 찼으니까. 누가 사제의 방에서 이런 물건을 보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답답해.’
독이 가득한 우물에 빠진 기분이다. 나는 결국 방에 계속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서재로 향했다.
절로 마족 소환이라는 책에 손이 갔다. 사제들이라면 눈을 돌리지도 않았을 이 금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아주 주목받는 책이라 들었다. 항간에선 은밀하게 마족 소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시간에도 어딘가에선 매력적인 마족이 인간에게 잊을 수 없는 거래를 제시하며 계약하자고 할지 모른다. 인간은 매력적인 마족의 외양에 넘어가고, 그의 달콤한 제안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바칠 것이다.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서.
나는 펼쳐진 책장을 읽어 내렸다.
“‘……마족 소환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것만큼은 절대 잊지 마라. 그대가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그것은 재산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도 아니고 원수의 인물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껴안는 일이다. 죽음의 순간 그대가 떠올리게 될 한 사람. 눈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그를 찾아가 껴안는 것이다. 사랑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덮었다. 어쩐지 목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생의 마지막에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낯선 일인 양 부끄러웠다. 왠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껴안는다니.”
나는 그게 누구일까 불현듯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었다.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을 가다듬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남자. 그것을 확인했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대, 좀처럼 오지 않는군.”
마왕. 나는 그를 보자마자 굳어지고 말았다. 마왕은 내 손에서 툭 떨어지는 책을 보았다.
“마족 소환이라. 그대가 나를 부르는데 이런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다는 걸 알 텐데.”
마왕이 책을 주우며 말했다.
“아니면 나 말고 다른 마족이라도 부를 심산이었나? 그대의 유희 상대로?”
얄팍하게 가늘어지는 붉은 눈. 숨 쉴 때마다 빠져나오는 기운이 마기인지 매혹인지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숨이 막혔다.
“어떻게…….”
여길 왔냐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그에게 이런 등장은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이곳이 마기로 가득하다면 말이다. 마왕은 주변을 둘러보며 묘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한 곳에 있군. 사제인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소. 우연이 아니겠지? 그대가 이런 곳에 있는 건.”
“헤르간에서의 일 때문이에요.”
내 말에 마왕의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재밌다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걸 본 인간들은 그대에게 달라붙어 나와 어떤 관계인지, 날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물었겠지.”
“알면서 일부러 했단 말인가요?”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다. 마왕은 부드러운 톤으로 진정하라는 듯이 말했다.
“설마. 그 순간에는 그런 의도는 없었다. 그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 기사가 보는 앞에서 말이지.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으니까.”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손마디가 꽉 쥐어졌다.
“잔인해요.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잔인하다면 내가 내 수하의 목을 친 게 더 잔인하지. 물론 그녀가 죽었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에레나.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입술로 나는 마왕에게 묻고 말았다.
“모, 목이 잘렸는데 죽지 않았어요?”
“일반 마족이라면 죽었겠지만 그녀는 고위 마족에 차기 마왕 후보야. 신체의 상해로 당장 죽진 않아. 목 아래는 서서히 재생되고 있어.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재생이라니. 맙소사. 나는 손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허망함을 느꼈다. 동시에 절망감이 올라왔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떻게 나올 것인지. 나와 아론에게 어떤 분노를 퍼부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명백한 것이었다. 마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덧붙였다.
“그녀가 몸을 완전히 재생하려면 수백 년은 걸릴 거야. 그대가 이 생에서의 삶을 모두 누리고 죽더라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의 긴 시간이지.”
“……일어났을 때 벌어질 재앙에 대해서는요?”
“그건 그대의 몫이 아니야.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건 후대의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야. 지금 그대가 선조들이 우리 마족에게 대항했던 결과를 맞닥뜨리고 있는 것처럼. 인계와 마계. 두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늘 시간차가 있기 마련이지.”
마왕은 내가 떨어뜨린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포옥. 책이 꽂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나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마왕은 내 얼굴, 내 눈을 들여다보며 조금 입가를 올렸다.
“왜 그리 우울한 표정이지? 나와 함께 마계로 가는 것이 두렵나?”
“당신에게 종속되어 인간이 아닐 거라는 점이 싫어요. 제가, 더는.”
나는 주먹을 쥐었다.
“이런 말레드레드일 수 없다는 것이요.”
“너무 종족에 얽매이지 마. 중요한 건 살아 있는 것이며 내 욕망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니까.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 점을 크게 보고 기뻐해야 할 거야.”
마왕의 손이 뻗어왔다. 차갑고 이질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뜨거움이 느껴진다. 손은 볼을 넝쿨처럼 얽혀서 귀와 목 뒤까지 파고들어 왔다.
“읏…….”
나는 목을 뒤로 젖히며 반응하고 말았다. 마왕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월한 체격으로, 나를 밀어젖히는 그의 동작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도 할 수 없다. 나는 바짝 붙어 오는 건장한 하체에 숨을 헐떡이며 눈빛을 흐리고 말았다. 마왕은 그런 내 표정에 못 견디겠다는 듯이 오묘하게 인상을 바꿨다.
“그대가 그리워. 그대의 속살과 나를 반겨 주는 내부가. 순순히 벌어지는 흰 피부와 굴욕적인 표정이. 그래서 안을 쑤시면 좋다고 등을 휘는 순수한 그대가 말이야.”
“그, 그만…….”
마왕의 한 손은 어느새 내 허벅지를 쓸어올리고 있다. 그 손길은 선정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곧장 흰 드레스 아래를 파고들어, 민감한 부위를 간질이는 그의 손에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말았다.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그럼 어디서 하지? 그대는 좀처럼 오지 않고 나는 달아오르는 몸을 주체할 수 없는데.”
마왕은 짓궂게 말하면서 더욱더 손가락을 깊게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