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89화 (189/220)

189화

지극히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다. 나는 무언가 치밀 듯이 마음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론을 내 옆에 있게 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황제도 황당했고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눈앞의 벨도 기가 막혔다.

벨은 진정하라는 듯이 말했다.

“이대로 둔다는 건 아니에요. 여기 침대를 옮겨 놓겠습니다. 사지는 여전히 침대 기둥에 묶이겠지만 그의 신체는 더 편안하게 있을 거예요.”

“어, 언제까지?”

“그거야 말레드레드에게 달렸죠.”

“!”

나는 그제야 황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야 말았다.

“제가 마왕을 불러서 일을 해결해야 아론이 자유로워진다는 건가요?”

“그는 지금도 자유로워요. 적어도 말레드레드 곁에 있으니까. 말레드레드가 원한 건 그가 자신과 연관해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거였잖아요? 폐하의 곁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말레드레드 곁에 있는 게 그의 입장에선 더 편할 겁니다.”

“제 말은…….”

“맞아요. 말레드레드가 묻는 것이 그가 언제 이런 모습에서 자유로워지냐는 것이라면. 말레드레드가 폐하께서 시킨 일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할수록 그는 더 자유롭게 말레드레드의 곁에 있겠죠.”

차가울 정도로 담담하게 말한 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들을 불러오죠.”

벨이 나가고 나자 3층 다락방은 조용해졌다. 아론은 어느새 답답하다는 듯이 몸을 꿈틀거리는 것을 멈춘 상태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누워 있는 그를 보니 알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이 밀려온다. 황제가 이럴 것이라고 정말 예측할 수 없었을까? 황제가 나에게 순순히 아론을 양보할 거라고? 약속을 순진하게 지킬 거라고? 나의 안일함과 태평함이 속상하기만 하다. 나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론, 미안해.”

“…….”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침울하게 들렸던 걸까. 아론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그는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 꿈틀거렸지만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론이 힘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살갗을 아프게 파고들며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 나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조금만 기다려. 침대로 옮겨 줄 테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덩치 큰 시종들이 들어왔다. 남자는 둘이었고 여자는 하나였다. 세 사람은 벨과 함께 침대를 옮겨 왔는데 나무 침대는 얇은 이불이 깔린 거 외에는 딱히 편안하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딱딱해 보였다.

“좋아요. 이제 양다리를 잡아 주세요.”

시종 둘이 다리를 잡고 있는 동안 벨과 남자 시종은 아론의 팔을 침대 기둥에 묶었다. 아론은 팔이 자유로워지자 얼른 그 팔로 남자와 벨을 밀어 버렸다. 허나 벨이 좀 더 빨랐다.

“아론나이드 경.”

아론은 눈이 가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벨이 검을 빼 들었다는 것과 그 검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벨은 내 목에 검을 겨눈 상태로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명하신 겁니다. 거부하거나 반항하면 당장에 말레드레드에게 피해가 갈 거예요.”

“…….”

아론은 잠시 후 딱딱한 움직임으로 자신이 직접 침대에 누웠다. 벨이 고갯짓을 하자 시종들이 아론의 팔을 나무 기둥에 단단히 고정한다. 그 뒤 특수 밧줄로 한 번 더 묶었고, 몸통과 다리도 침대에 통째로 고정해 버렸다. 그 뒤에서야 벨은 내 목에서 검을 치웠다. 그런 뒤 그녀는 웃었다.

“이제 됐군요.”

“…….”

“이제 곧 식사 시간인데, 주요리로 닭고기도 괜찮으신가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종들은 빠르게 내려갔다. 벨은 나도 같이 내려갔으면 하는 눈초리였으나 내가 완강히 이곳에 있겠다고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눈가를 가린 것은 풀어 주어도 괜찮아요. 보는 것은 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해라는 건 내 일에 방해될까 봐 걱정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분명 나나 아론의 신체를 걱정해서 하는 말은 아닐 테지. 나는 그녀가 가고 나자 서둘러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

아론의 눈빛은 깊었다.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일렁이는 빛이 깊어진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본 나는 아론에게 괜히 우스갯소리를 하고 말았다.

“나랑 함께 붙어 있으면 이런 일 당하는 거 몰랐지?”

“…….”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몰랐어. 참 어리석지. 난 네가 그냥 내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을 뿐인데.”

결국 나는 몰려오는 후회와 자책감에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안일하고 무모해. 늘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한 척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참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 같아. 아론. 내가 정말 무슨 약속을 한 걸까. 폐하하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왠지 아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확인하자 아론이 침대 기둥에 묶인 팔을 풀려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나는 괜히 그러지 말란 듯이 아론의 가슴을 다독였다.

“모쪼록 이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내 숨죽인 중얼거림에 왠지 굳어 버린 아론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그 말의 의미는 뭐냐고. 아론은 깊게 파도치는 황금빛 눈동자로 묻고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손끝에 신성력을 피웠다. 방금 팔을 쓰느라고 살갗이 벌겋게 상한 부분을 치료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성력을 피워 내자 밧줄은 금세 반응하고 만다. 신성력이 소멸하듯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물건이 인간이 만든 것이 맞는 것인가 의아함이 들고 말았다.

‘꼭 마계의 물건 같아.’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까 보았던 건장한 체격의 여자 시종이었다.

“아론나이드 경이 먹을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움푹한 접시에 담긴 것으로 보아 수프 같았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먹이라고 벨 경께서 명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나는 그의 가슴을 짚었다. 맨가슴에서 올라오는 따끈한 체온. 근육의 이완. 혈관의 맥동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나는 그의 가슴을 일부러 야릇하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제 것이에요. 먹는 것도 제가 관여해야 하죠.”

“하, 하지만…….”

시종은 내 대범하고도 이상한 움직임에 당황한 듯 보였다.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조금 눈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도 돼요. 물론 계속 지켜보고 싶다면요.”

“네?”

나는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않고 그녀의 손에 들린 수프 그릇을 빼앗았다. 그녀는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쩔 줄 모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수프 그릇을 침대에 놓고 그의 입을 막고 있는 재갈을 풀었다. 아론은 그제야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면서 답답했던 숨을 터트렸다. 나는 옆에 놓인 손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말레, 드, 레드…….”

음성은 뚜렷하지 않았다. 입술 주위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서 나는 인상을 쓰고 말았다. 얼마나 꽉 묶어 놓은 것인가. 황제는 정말 인정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애써 다정하게 물었다.

“배고팠지?”

“…….”

“내가 먹여 줄게.”

나는 한 수저 떠서 그의 입가로 가져왔다. 아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 그것은 그에게 혹독할 정도로 많은 듯싶었다. 하지만 열 마디의 말을 하나의 눈빛이 모두 담을 수 있듯이, 그는 내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늘 다정하고 상냥했던 눈빛으로, 우수에 젖어, 나를 바라는 눈으로. 나는 그런 그의 눈을 당당하게 외면하기가 참 어려웠다.

“어서 먹어.”

내가 수저를 가까이 가져가자 마지못해 입술이 벌어진다. 그러나 그는 잘 먹지 못했다. 벌겋게 부은 입술은 안쪽이 터졌는지 따뜻한 숟갈이 닫자 흠칫하며 멀어졌다. 나는 그 탓에 수프를 그의 입가에 조금 흘리고 말았다.

“도대체 기사들이 네게 뭔 짓을 한 거지?”

“제, 제가 반항, 했어요……. 갑자기 밧줄로 묶어야 한다기에…….”

더듬거리는 아론의 말속에서 나는 아까 검은 기사들이 끌고 간 이후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강한 기사인 아론이 갑자기 자기를 속박하는 것들에게 순순히 당할 리 없다. 충분히 반항했을 것이고 저항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입술이 터졌겠지. 나는 잘 먹지 못하겠다는 아론의 말을 들으면서 수저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

놀란 것은 뒤에 있던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입으로 머금을 수프를 그대로 아론의 입으로 가져가자 뒤에서 화들짝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론의 입 안에만 집중했다. 그의 촉촉한 속살과 긴 혀에만. 굳어 있던 아론의 혀는 내가 스프를 넘겨주며 혀로 휘젓자, 금세 달라붙었다.

달콤하고 어딘가 씁쓸한 입 안. 그의 피가 느껴지는 입맞춤은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의 혀가 더욱 깊게 달라붙기 전에 서둘러 떨어졌다.

“……이러면 먹을 수 있지?”

내 말에 아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운 새처럼 다소곳했다. 나는 한 번 더 수프를 내 입으로 가져갔고, 그의 입술에 입을 대었다. 시종이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소리가 났다.

서너 번 그런 작업으로 더 아론을 먹이고 있을 무렵, 벨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거죠?”

어이없다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밥 먹이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