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88화 (188/220)

188화

황성에서 걸어서는 하루, 말로는 두 시간이 걸릴 길을 쉼 없이 달렸다. 잘 닦인 도로를 따라서 펼쳐진 초록빛 가로수와 황금빛 들판의 물결이 나른함과 태평함을 안겨 주었다. 내 손에 들린 황제의 인장이 박힌 문서만 아니라면 내가 지금 휴양을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믿어질 것이다.

마차의 덧창으로 보이는 목가적인 풍경들에 심란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무렵, 마부가 말을 멈췄다.

도착한 저택은 요란하지 않은 단정한 형태의 3층 벽돌집이었다. 특이한 것은 정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택이 높은 정원수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미로를 빠져나가듯 빽빽한 정원수의 숲을 지나야 드디어 회색 돌벽이 나오고, 이 울타리 돌벽을 지나야 정문이 나온다. 정문에는 맹렬한 새가 날아다니는 형상의 인장이 있었다.

정문 위로 보이는 넓은 창과 깨끗한 실내. 잘 정돈된 커튼이 보인다. 한눈에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고.’

누군가의 취향을 반영한 것일까? 비밀리에 무슨 일을 하기 좋다는 생각이 드는 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저택에서 마중 나오는 여자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검은색 비단으로 지은 옷을 차려입은 그녀는 나이도 40대 중후반쯤 될까. 차분하게 흐르는 기도가 단순히 시종 일을 업으로 하는 여자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기사?’

어렴풋이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 여자가 말했다.

“폐하께 말씀 들었습니다. 저는 이 저택을 관리하는 티시아 벨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벨이라고 불러 주세요.”

티시아. 설마 수도의 저명한 학자 가문으로 이름이 나 있는 그 티시아를 말하는 건가. 나는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정말 티시아 가문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신분이 나보다 높다. 마냥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위치였다. 내 고민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했다.

“전 오래전에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티시아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는 가문에서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죠. 이례적인 일이지만 감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좋은 일이라고 하셨고요.”

“혹시 기사이신가요?”

그녀는 조금 웃었다.

“네. 기사입니다. 수도 방위군 소속이지요.”

성기사와는 다른, 수도를 보호하는 기사란 의미다. 나는 그래서 더더욱 긴장하고 말았다. 그들은 제국 내정을 돌보는 기사다. 즉 성기사처럼 마족이나 마물을 상대하는 특수 기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들을 다루는 기사란 뜻이다. 나는 황제가 일부러 이 저택에 성기사가 아닌 그녀를 배치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마왕을 만나려면, 신성력이 없지만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자로 해야 했겠지.

‘여자라면 무엇보다 같은 집에 살아도 편하게 느껴질 테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을 마쳤을 때 벨이 말했다.

“이 저택에는 저를 포함해 모두 4명의 시종이 일합니다. 그들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시킬 게 있다면 저를 불러 주시고, 평소에는 저희를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전념하시면 됩니다.”

“일이란 게…….”

나는 조금 착잡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건지 들었나요?”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말씀은 모두 들었습니다. 혹시나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하셨으니까요.”

“이건 마왕을 소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점을 묻는 것은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미리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왕. 일반 사람들은 감히 그 마기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녀는 모든 것을 각오했다는 듯이 침착하기만 했다.

“폐하의 명입니다. 죽을 각오는 언제든지 되어 있지요.”

그녀는 아주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방을 안내해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방은 깨끗하고 넓었다. 하얀 침대는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컸고, 그 옆 탁자에는 물과 간식이 준비되어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보았던 창으로 눈을 돌렸다. 확실히 창이 넓다. 초록빛이 빼곡하게 시야를 채우는 게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다른 색상이 있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단조로운 광경에서 고개를 돌려 옷을 벗었다. 갑갑했던 사제복을 벗자 어깨와 가슴이 시원해진다.

‘아론은 어떻게 됐을까.’

기사들에게 끌려가듯이 사라진 그가 걱정된다. 마음이 다시 착잡해질 때 벨이 문을 두드렸다.

“오늘 하루는 푹 쉬세요. 복도를 나가면 서재가 있으니 책을 읽으셔도 좋고요. 이 저택을 벗어나지만 않으신다면 어디든 가도 좋습니다.”

그녀는 편하게 입을 옷을 준비해 두고는 물러갔다. 나는 그녀가 갖다 준 옷을 들었다. 순백의 드레스. 하얀 원피스다. 사제라는 티를 내라는 걸까. 나는 부드러운 감촉의 원피스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말대로 복도를 조금 걷자 맞은 편에 반쯤 열린 문이 보인다. 그 사이로 책장이 보였다. 책들은 대부분 새것처럼 깨끗했고, 간혹 손때가 묻은 것들도 있었다. 나는 새 책들이 주로 마계와 관련된 것임을 확인했다. 내가 이곳으로 온다고 하자 부리나케 사서 준비해 둔 것일까. 나는 그 책 중 하나를 꺼내 펼쳐 보았다.

[ ……소위 인간과 계약하는 마족의 심리에 대해서 하찮게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마족은 사악한 존재고 인간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존재하니 그들의 심리 따위는 안 봐도 악하고 불순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중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다.]

특이한 글이다. 나는 작가의 약력을 살폈다. 특이하게도 그는 학자이면서 사제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다. 학자가 주로 과학적인 현상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면, 사제는 초월적인 힘을 이해하고 발휘하는 데 주력해 반대되는 입장 같은데도.

나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약력처럼 흥미로운 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사악한 존재라면 굳이 계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상대와 무언가를 교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상대의 모든 것을 갈취하면 되는 존재가 왜 굳이 계약이라는 단어로 우리와 거래를 하려 들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계약으로써 얻는 대가가 훨씬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계약으로서 더 만족스러운 거래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마족의 심리를 충족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약으로 하여금 인간의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 값을 지불한다. 마족은 인간에게 받은 대가와 그 적극성에 흡족해하며 또 다음 계약을 찾아 인간계를 돌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희한한 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동시에 마계의 군주를 떠올렸다. 그는 나를 강제로 가질 수도 있었고, 마계에 가둬 두고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 기억을 강제로 바꿔서 자신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런 일이 그의 마음을 충족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란 소리다.

‘내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으로 그에게 가야만 만족한다는 건가?’

오만한 그를 떠올려 보자면 그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 거 같았다. 모든 게 쉽게 손에서 사그라지고 만들어지는 초월자의 입장에선 자신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무언가가 그를 따라오는 게 더 흥미로울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왕에게 종속이라니.’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나는 왠지 오한이 드는 기분으로 몸을 감싸고야 말았다. 책을 돌려놓고 서재를 나오려는데, 벨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손님이요?”

올 사람이 누가 있었던가? 나는 의아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정문으로 내려갔다. 곧 기사들이 묵직하게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아까 아론을 데려갔던 기사들과 같은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널찍한 관을 들고 있었다.

“어디다가 둘까요?”

그 말에 벨은 잠시 고민하더니 위층을 가리켰다.

“3층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굳어져 있었다. 저건 설마 내가 죽었을 때를 대비한 관일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는다. 굳어 있는 나를 보고 벨이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 볼까요?”

“아, 아니 전…….”

굳이 내 관을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거절했지만 벨은 강요했다.

“어서요. 확인을 해 봐야죠.”

나는 얼떨결에 그녀에게 팔이 잡혀 3층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관이 꽤 무거운지 계단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앞서 울리는 게 한층 더 괴기스러웠다. 검은 기사들은 그렇게 관을 3층 넓은 다락방에 놓고서 짤막하게 인사하며 돌아갔다. 벨은 관을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어디 보죠.”

“……!”

나는 그녀가 관 뚜껑을 밀어젖히자마자 기겁하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는 아론이 있었다. 아론의 사지는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고,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린 상태였고, 손은 뒤로 포박당해 있다.

상체는 벗겨져 얇은 바지 하나만을 입은 그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차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 폐하의 서신이 있군요.”

그에 비해 벨은 아주 차분하게 아론의 머리 쪽에 돌돌 말려 있는 편지를 잡아 내게 주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쳤다. 내용은 간단했다.

방해되지 않도록 힘을 구속했다. 특수 처리한 밧줄만 풀지 않는다면, 네가 마왕과 무슨 일을 하든 끼어들 수 없을 거라는 문구.

나는 그제야 아론을 구속하고 있는 밧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떤 밧줄인지 몰라도 신성력을 튕기는 게 분명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론이 읍읍, 신음하는 것을 보며 손을 뻗었다. 재갈을 풀어 주려고 하자 벨이 내 손을 막았다.

“음식은 저희가 먹일게요.”

“말도 안 돼요! 이, 이건 짐승도 아니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이러면 씻는 것도 자는 것도 불편하잖아요! 최소한 사람답게 있어야죠!”

“하지만 그를 풀어 두면 말레드레드의 일을 방해할 겁니다. 폐하께선 필요한 조치를 하신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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