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87화 (187/220)

187화

“……!”

“아프냐. 네 무례와 건방짐을 어떻게 벌줄까. 내 마음은 네 고통보다 더욱 심란하기 그지없구나.”

아론은 뾰족한 구두에 밟혀서도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서 뒤로 물러난 건 나였다. 황제는 구두 앞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미 네게 귀찮은 일거리를 맡겼고, 아이와 여자들의 피를 손에 묻히게 했다. 그보다도 널 괴롭게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이 성가신 녀석아.”

“…….”

황제는 입가를 올렸다. 차가운 미소였다. 황제는 무릎을 굽혀서 이마를 바닥에 숙이고 있는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말을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네게, 역시 벌은 이것밖에 없겠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 버리는 것 말이야.”

“!”

아론이 그제야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의 눈에는 격한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아무리 부여잡고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폭포처럼 선명하고 붉은 그것. 그것은 나에 대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걸 본 순간 왜인지 가슴이 한없이 잘게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부서지는 가슴은 서러움과 아쉬움의 파편들로 변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내면의 강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로 변했다.

아마도 지금 순간, 내가 우는 여자였으면 그 물줄기가 눈물인 양 흐르지 않았을까. 그의 깊은 감정과 애정에 목이 메어서.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여자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황제에게 말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폐하.”

“왜, 너도 이 건방진 녀석처럼 밟혀 볼 테냐?”

황제는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보려 했다. 그러나 짓눌린 아론의 손을 보자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꾹 참고 손을 쥔 채로 말했다.

“아론은 이제 제 것입니다.”

“……!”

“……!”

이번엔 둘 다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황제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발을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황제는 우스움을 못 참겠다는 듯이 얼마 동안 그러다가 아론에게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보호하려던 여자에게 보호를 받는 기분이 어떠냐. 아마도 네가 아무것도 할 줄 못하는 응석받이란 생각에 비참함이 치밀 텐데. 그렇지 않느냐?”

“…….”

입술을 꾹 다문 아론을 보면서 황제는 한 손을 그의 뺨에 올렸다.

“이런, 내 사랑스러운 조카야.”

그녀는 정다우면서도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이 집무실로 뛰어왔을 테지. 내가 그녀를 마왕에게 제물로 바치는 줄 알고. 그런데 말이야.”

황제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그녀는 스스로 그러겠다고 했다.”

아론의 어깨가 떨렸고 몸이 굳어졌다. 그의 커다랗게 떠진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그 적나라한 감정들은 분노와 질투, 살기로 변했고, 이내 그것들이 나를 덮쳐서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로 변해 갔다.

“……아론.”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황제는 그런 아론의 표정 변화를 만족스러우면서도 마땅찮지 않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이 찌푸린 얼굴로 황제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너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 하나에 너무 몰두하고 있다는 거야.”

황제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게 얼마나 허망한지 모르고.”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산뜻하게 걸음을 옮겼다. 곧 시종이 들어와서 그녀의 어깨에 두꺼운 모피 외투를 얹어 주었다. 황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걸치고는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제왕다웠다.

“나는 이제 곧 수확 축제를 축복한다고 모여든 이들에게 말하러 가야 한다. 내가 돌아왔을 때, 둘 다 이 자리에 없었으면 좋겠다. 말레드레드는 내가 말한 저택으로 가고, 아론 넌 기사들을 따라가라.”

아론은 그 말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가면 알게 될 거야. 말레드레드 말대로 넌 이제 당분간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단 말레드레드의 일을 방해하면 안 돼. 그에 따른 조치가 필요하겠지.”

조치……? 무슨 말일까. 나도 의아해졌을 때 황제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아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손을 줘 봐.”

“괜찮습니다.”

아론은 빨갛게 변한 손등을 치웠다.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까 폐하께 한 말씀 못 들었어? 넌 내 것이라는.”

아론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깊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진심이냐고 하는 것도 같았다.

“계약을 했어.”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의 엉망이 된 손에 신성력을 뿜어내면서.

“보라만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네가 나와 관련된 일에서 어떤 간섭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아론은 흠칫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후자 때문이 아니었다. 아론은 전자의 이야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아론은 치료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 입은 손으로 나를 꽉 붙들며 말했다. 손의 상처 때문인지 그의 손바닥의 온도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마치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심정을 보여 주듯이.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폐하께선 날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거예요.”

아론은 목소리를 죽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의식한 것 같았다.

“말레드레드가 살아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치료한 것이고 제안을 한 것이에요. 말레드레드가 가치가 있는 한 계속 이용하기 위해 살려 둘 거고요.”

아론의 눈은 짙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말은 이제 의사 따위완 상관없이 황제의 종으로서 부려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녀는.”

나는 왠지 아론이 겪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과거가, 생존과 고난으로 가득했던 그의 삶이 무척이나 처절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서 아론에게 다정하고 싶었다. 그에게 앞으로 일들이 별거 아닐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 폐하는 폐하의 위치에서 판단하신 것뿐이야.”

“말레드레드.”

“그게 나를 도구로써 본 것이라고 해도 난 괜찮아. 어쨌든 나를 살려 두시는 거잖아? 너의 짐이나 애물단지로 봐 없애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말에 아론은 눈썹을 더 강하게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미 황제가 그리해서, 결혼을 추진했다는 것을 그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멀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실망할 것도 없고, 더 우울해할 것도 없어. 이 정도면 나는 만족해.”

나는 아론의 상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너도 치료를 제대로 받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매우 안 좋으니까.”

나는 그의 손등에 상처가 남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론은 말이 없었다. 붉은 상처를 보고 있던 그가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아까 계약했다는 말. 나와 관련된 일이라는 건, 제가 앞으로 말레드레드 삶에 소속된다는 걸 말합니까?”

“아니.”

나는 짧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선 승낙의 대가로 뭘 가지고 싶은지 물으셨어. 나는 이 황성에서 별로 갖고 싶은 게 없거든. 그나마 잘 알고 있는 너 외에는 말이야.”

“절 원하지도 않으면서 갖겠다고 말한 겁니까?”

아론의 눈빛이 아프게 부서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네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동정심이라고 해도 좋고 옛정이라고 해도 좋아. 이왕이면 네가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불가능할 겁니다.”

아론은 작게 중얼거렸다.

“말레드레드 없이는 절대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

단정하듯이 말하는 그는 나를 할 말 없게 만든다. 분노와 질투, 슬픔으로 깊어진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저런 남자가 어디 있나,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체온을 느끼고만 싶다. 그렇게 나도 위로받을 데가 있다고 안도하고 싶다.

“폐하께 말씀 들었습니다. 그럼 저택까지 안내하도록 하죠.”

시종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으며 다른 복도로 나를 안내했다. 아론은 멈칫해서 나를 따라오려고 했으나 그를 막아서는 기사들이 있었다.

“뭐지?”

“경은 따로 가셔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갑옷을 입은 황제의 기사들이었다. 아론은 돌아보는 나를 애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곧 기사들에 의해 방해받고 말았다.

“저희를 따라오시죠.”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결국 아론은 나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도대체 아론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황제가 말했던 말레드레드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되는 조치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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