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나는 최대한 내가 능력이 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지만, 말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녀가 이상하게 느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얼버무리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없다니? 난 널 마계로 보낸다는 게 아니야. 여기에서 머물면서 마왕을 만났으면 좋겠어. 그의 의도를 읽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서 말이야.”
“여기서요?”
“황성을 말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여긴 마기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해 주는 다양한 장치들이 있거든.”
나는 바닥에 흐르고 있던 신성력을 문득 떠올렸다. 그녀는 황성 전체에 그런 장치를 깔아 두었을 것이다.
“내가 마련해 준 저택에서 사제로 일하는 척하면서 마왕과의 만남을 기다려 줘. 만약 오지 않는다면 그를 소환해도 괜찮고.”
황제는 그게 별거 아닌 일이라는 듯 웃었다. 친구에게 차 한잔을 권유하듯이 말하는 그녀에게는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시키는 재능이 있는 듯싶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혼란스러움과 당황 속에서도 나를 명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지다. 우습게도 마왕에게 곧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이 삶을, 이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대충,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저는 무얼 얻죠?”
“대담하군. 황제에게 그런 걸 묻다니.”
황제는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무조건 내 말을 따르겠다고 하면 믿어지지 않았을 거야. 적어도 넌 어리숙한 바보나 간신은 아닌 거 같으니까 말이야.”
“…….”
“하지만 건방지긴 해. 무례한 건 특별히 봐줄게.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
황제는 서류 작업이 술술 풀렸다고 떠들면서 물었다.
“무얼 원하지? 내가 이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 귀족이 될 수도 있고, 원래 추진했던 대로 일레그레 가문과 내 축복을 받으며 혼약을 올릴 수도 있어. 사제로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적당한 자리에 너를 앉혀 주지.”
“만약.”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녀를 동요시킬 제안이 될 것이었다.
“제가 아론을 원한다고 한다면요?”
“뭐?”
황제는 처음으로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커진 눈으로 잠시 입을 벌린 채로 있다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아론을 원한다고? 진심이야?”
“……그는 훌륭한 사내예요.”
“그래.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를 원한다고 하진 않았겠지. 여태까지 너는 아론과 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네 주제 파악을 하고 있었잖아.”
차갑고 모진 말. 나는 오히려 덤덤하게 반응했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번 일의 대가로 아론만 한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황제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웃었다. 그 탓에 그녀의 짧은 갈색 금발이 귀 아래에서 흔들렸다. 그렇게 웃기를 몇 초, 어느새 그녀는 진한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얕봤군. 그저 반반한 얼굴과 눈치가 전부인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전사로서의 경험 때문일까? 전투에서 늘 선두에 섰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내 앞에서도 시선을 돌리거나 두려움에 떠는 일이 없군. 꽤 인상 깊은 태도야.”
“…….”
“어찌 됐든, 그래. 아론을 원한다는 말이지.”
황제는 손가락을 탁자 위에서 툭툭 튕기기 시작했다. 초조하면서도 고민스러워 보이는 그 행위는 그녀가 아론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거이다. 차기 황제감이라니. 그것은 황제인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가벼울 리 없다. 나는 다시 한번 아론의 위상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순순히 포기할 일은 없겠지. 치료까지 해 줬으니 본인에게 협조할 때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마왕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러다가 불시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녀도 손써 볼 새 없이 당한 것이니까 내 죽음을 아쉬워하다가 결국 나를 이용한 계획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론을 조금 풀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약속을 했으니 말이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이런 약속을 공식화 해 놓는다면 그녀는 황제의 명예가 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론은 황제의 시선과 압박에서 벗어나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무얼 하든 거슬림이 없는 삶을.’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막혔던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쳐오르는 것 같은 희열이었다. 그동안 억눌렀던 욕구를 모두 자연스럽게 돌출시킬 수 있는 삶. 그것이 진정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을까.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바라던 삶.’
내가 살고 싶던 인생. 나는 지금 내가 바라는 삶을 아론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꿈꿨던, 아니 꿈꾸었을 인생을 그가 영유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아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지.’
어쩐지 웃음이 나오고 만다. 아론을 무시하며 오만하게 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기적이니까.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더니 황제의 눈썹이 조금 꿈틀했다.
“뭐지?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이 재밌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옛 기억이 생각나서요.”
“딴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 있다니. 그만큼 내가 무섭지 않다는 거겠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네 놀라운 면모가 더욱 잘 드러나는군.”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했다. 그녀가 헛다리를 짚었으며 나는 그녀가 너무나 무서워 지금도 다리를 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속으로만.
“…결정하기 쉽지 않군. 아주 어려운 제안이야. 왜냐하면 녀석이 차기 황제가 되면, 네가 황후가 된다는 말이니까.”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모른 척, 실은 다 알고 요구한 건 아니고?”
황제는 피식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녀에게 내가 마왕과 이미 거래했으며 다시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해 줄 수 없었다. 황후란 직위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찌 됐든 황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론을 줄 순 없어. 공식적으로 내 위치에선 그런 선언을 감히 제국 전체에 할 수 없지. 황가의 핏줄을 일개 사제에게 선물처럼 하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론이 네 곁에 있는 걸 인정해 줄 순 있어. 너와 공식 연인이 된다고 해도 지지하겠다.”
“연인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론이 무엇을 하든, 어떤 경로를 택하든 강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좋아. 하지만 오로지 너와 관련해서야.”
황제는 책상을 의미심장하게 탕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너와 연애를 하든, 여행을 가든, 길거리에서 정사를 나누든, 아니면 아이를 갖든. 불필요하게 끼어들거나 불공정하게 방해하지 않겠다.”
황제는 의외로 세심했다.
“내 아버지처럼 너를 죽이려고 용병을 보내는 일도 없을 거야. 약속하지.”
“…….”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론의 일이 너랑 연관되어 있을 경우에 한해서야. 나의 관용과 이해는 그 안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만약 네가 아론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너는 너대로, 아론은 아론대로 나의 수하이자 사제가 될 것이다. 의무와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만약 제가 불의의 사고로 죽기라도 한다면요?”
“그렇게 되면.”
황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어쩐지 묘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아론에게 결정하게 해 주마. 너를 잊기 위해 내 충실한 기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쳐서 떠돌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너를 따라가고자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이상하다. 왜 그녀의 말에 내가 겁먹고 만 것일까.
‘아론이 나를 따라서…….’
죽는다니. 그건 상상할 수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내 삶이 끝난다고 아론의 생명까지 갉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런 상황을 일부라도 초래하고 싶지 않다. 내 생명이 끝났으니 아론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그런 극치의 이기적이고 무도한 태도라니.
아론이 죽는다는 건 가장 끔찍한 형태의 결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황제의 말은 사람의 심장을 후벼파는 데가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좋습니다. 문서로 남겨 주세요.”
“그럼 당장 오늘부터 내가 말한 저택에서 살아야 한다.”
황제는 묘하게 웃으며 새 문서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내 마음은 그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며 엉키듯이 흐트러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만약 황제가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되지?’
아론이 더 심한 구속 속에서 황제의 수족으로서만 살게 된다면?
‘아니야. 아론을 차기 황제라 보았다면 마냥 나쁘게 대하지 않을 거야.’
그런 좋고 나쁜 생각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황제는 문서를 다 썼는지, 내게 보여 주었다. 내가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자신의 인장을 찍어 내리누른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이것으로 말레드레드. 너의 인생은 명백히 황가와 엮였구나. 의외라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폐하.”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숨 가쁘게 들어왔다. 아까 나를 안내했던 시종이었다. 시종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론이었다.
“이런 건방진 등장이 이제 네 특기라도 되는 것이냐?”
아론은 나를 보았고, 내 모습을 훑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에는 안도했다는 빛이 어렸다. 황제는 차갑게 아론에게 쏘아붙였다.
“무엄한 녀석! 버릇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론은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사죄했을 뿐이다. 황제는 그런 아론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네 근심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그 근심을 내게 드러내는 건 무척이나 어리석은 거야. 적어도 네가 걱정하는 저 여인처럼, 감정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 황제가 두려워도 덤덤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상대에게 요구할 줄 알아야지.”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역시 내가 겁먹었다는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황제는 유독 소리가 울리도록 아론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엎드려 있는 그의 손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