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오르크는 키가 큰 성인 남성이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빨랐고,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사제복을 입은 나는 덕분에 종종걸음으로 힘겹게 그를 뒤쫓아야 했다. 평소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숨이 금방 차오르는 걸 느꼈다.
‘뭐지?’
그저 입구를 빠르게 지나는 것일 뿐인데. 의아해하는데 오르크가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올 수 있습니까?”
“아, 네.”
내 대답에 오르크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내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았지만 걸음을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 때, 가슴뼈 같은 기이한 형태의 입구가 끝나 있었다.
‘와.’
이제는 검은 문이 시야를 채운다. 문을 두 개 합친 것처럼 커다란 문은 금박으로 위엄 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오르크는 들어가기 전에 옆에 서 있는 기사에게 자신의 무기를 풀어 건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망토와 소지품을 그에게 주십시오.”
나는 군말 없이 망토를 벗었다. 소지품이라고 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망토를 주고 오르크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두드렸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안쪽의 분위기는 예상했던 대로 무겁고 어두웠다. 빛이 있는데도 분위기에 억눌린 기분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는 한 발을 내디뎠다. 특이한 것은 바닥에 깔린 카펫을 받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든다는 것이다.
‘느낌 탓?’
고개를 갸웃한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지만, 바닥에 흰빛이 흐르고 있다. 나는 그것이 신성력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막 바닥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온화한 표정의 시종이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오르크는 그를 따라가는 나를 쳐다만 봤을 뿐 쫓아오지 않았다. 시종은 어두운 장밋빛 장막이 드리워진 복도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넓으면서도 환한 집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레드레드 님이 오셨습니다.”
“수고했어.”
황제는 공간 한가운데 널찍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는 깃털 펜과 잉크, 서류 다발과 책들이 놓여 있었다. 부산하게 무언가를 처리하고 있는 중 같았다. 그녀가 서류 하나에 황제의 인장을 찍어 내리는 걸 보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걸었다.
“그래,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
“괜찮았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황제는 씩 웃으며 나를 보았다. 여전히 털털한 말씨. 시원스러운 어조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몇몇 귀족들이 있지. 본인들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가슴을 쥐고 입성하는 자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니까. 마족의 힘을 지닌 자들은 입구에서부터 그렇게 걸러져.”
“그럼 걷느라 힘들었던 게…….”
멈칫해서 중얼거린 말을 듣고서 황제가 빙긋 웃었다.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지. 돌 입구는 마기를 걸러내는 기능이 있어. 고대 시절에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던 무기인데, 운 좋게 찾아내 입구 형태로 가공했지. 외국 사절들은 특색 있다고 좋아하지만 사실 그건 황성을 출입하는데 굉장한 신원보증의 물건인 셈이야. 출입 자체가 가능한 신분인지 증명하거든?”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해쓱해졌군. 상처는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살짝 무릎을 숙였다가 폈다. 황제가 건강을 걱정해 주다니. 그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내 반응에 황제는 왠지 웃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제 일 때문인가? 안색이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것은.”
“……!”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야 말았다. 황제의 태도는 서글서글했지만 내게로 향한 눈은 또렷할 정도로 냉정함과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
“아론과 밖에서 대담하게 키스를 했다며? 아니, 목격한 자 말에 따르면 아론이 억지로 키스를 했다고 말이야. 물론 너는 그걸 거부하려고 그만 그의 혀를 깨물고 말았지만.”
“경솔한 행동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를 깨문 건 저도 모르게 …….”
내 변명을 막듯이 황제는 한 손을 올렸다.
“괜찮아. 잘못했다고 혼내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아론을 대해 줘서.”
“…….”
“그 녀석 좀처럼 내 말을 들어 먹질 않아서 골치 아팠단 말이야. 적당히 네게서 손을 떼라고 해도, 결국 네 외출 한 번을 허락받고자 내가 시킨 까다로운 일도 기꺼이 하고. 그것 때문에 한동안 괴로워서 고통스러워했을 텐데 말이야.”
황제는 피식 웃었다. 반면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몰랐냐며 태연하게 말했다.
“널 외출시키고 싶다고 말이야. 너무 가둬만 둔다나? 그래서 그건 내 맘이다 했더니, 맘을 바꾸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더군. 그래서 시켰지. 귀찮고 짜증 나고 성가신 문제를 녀석에게 해결하도록 명했어.”
나는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왠지 손도 꽉 쥐어졌다. 황제는 그런 내 반응을 읽었는지 놀리듯이 물었다.
“왜? 화가 나나?”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요. 제 일인데…….”
“맞아. 나도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내 말은 먹히지 않았어. 녀석은 자신이 할 일이라고 본 거야. 너를 위하는 일이 제 일이라고. 정말로 골치 아픈 녀석이지.”
황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경망스럽게 떠들었다.
“솔직히 난 어린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일이라면 망설일 줄 알았거든? 알다시피 우리 국경에 있는 소수 부족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니까. 그들은 주로 여성과 노인, 아이로 구성되어 젊은 전사들을 죽인 우리를 늘 곤란하게 만든단 말이야. 그 땅에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그 땅은 이미 우리 제국에 편입된 지 오래됐어. 고리타분한 전설만 이야기하며 세금도 안 내고 살려고 하는 괘씸한 부족에겐 본보기가 필요하지. 그 골치 아픈 일을 누굴 시킬까 했는데 다행히 아론이 하겠다고 해서 말이야.”
“…….”
몸이 떨렸다. 도대체 아론에게 무슨 일을 시킨 건가. 성스러운 빛의 기사에게 어린아이와 그 어머니들을 죽이라고 했다고?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티를 낼 수 없었다. 지금도 나를 먹잇감인 양 쳐다보고 있는 여인에게서.
“그런 거 보면 녀석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결단력과 단호함이 있어. 그건 제왕의 자질이지. 제왕에겐 필요한 건 통치력과 전술력만이 아니야. 때때론 잔인할 정도의 판단과 수행 능력이 있어야 하지. 난 그런 면에서 아론을 아주 좋게 보고 있어. 차기 황제가 될 만하다고 말이야.”
황제는 웃듯이 말하며 다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능력이 국가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해서 발휘된다는 거야. 녀석의 문제는 그거지. 목적이 너무나 사소하고 하찮다는 거.”
“…….”
그녀의 눈이 나를 샅샅이 훑는 게 느껴졌다. 감히 네 가치가 무엇이라고, 그를 그렇게 만든 거냐고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몸을 옥죄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지고 곧 있어 나는 숨이 탁 트이는 걸 느꼈다. 황제가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래서 널 녀석의 눈에서 치워 버리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네?”
황제는 탁자에서 서류에 있던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게로 올라온 외국 사절의 문서 중 하나야. 여기엔 이렇게 적혀 있지. ‘최근에 소문 무성한 마왕의 출현에 대해 황제 폐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야. 다른 나라들도, 제국의 고위 대신들도 모두 다음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어. 직접 묻든 간접적으로 묻든. 다 똑같아. 너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알고픈 거야.”
나는 조금씩 숨이 쉬어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하얗게 변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황제가 나를 부른 이유는 명백했다. 그녀는 이런 긴 이야기를 늘어뜨리며 내 가치에 대해서, 내 위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내게 주입할 의도였다. 내가 큰 사건을 터트린 사제라고, 네가 해야 할 일을 명백히 알라고 말할 셈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는…….”
황제는 나를 빤히 보았다.
“제가 마왕을 다시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를 대면하고서 멀쩡히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고요……. 그래서 보라만 백작님이 제안하신 사항에 선뜻 답을 할 수 없었어요…….”
“일단 후자에 대해서. 왜 마왕을 대면하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거야? 그 존재가 네게 호의를 보이는 건 분명한 거 같은데.”
“마왕이란 사악하고 불순한 존재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겁니다.”
한마디로 다른 꿍꿍이로 내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 말의 의도를 읽었는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 상황에 있던 자들은 모두 마왕이 네게 짙은 호감을 느끼는 게 확실하다고 했어. 그저 느낌이 아니라 측근의 머리를 칠 정도로 명백하다고 말이야. 그걸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론조차, 그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면 분노하며 입을 다무는 이유는 그가 널 좋아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지.”
황제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았다. 나를 이용해 마왕을 잡아야 한다고 하면 그녀 입장에서 철두철미하게 조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걸 느꼈다.
“설사 그게 순수한 호감의 감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측근의 머리를 벨 정도로 널 생각한다면, 너의 가치는 네 생각보다 훨씬 큰 거야. 그에게 있어서.”
황제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걸 높게 평가해. 여태까지 한 번도 마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제는 없었으니까. 어쩌면 굉장히 큰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모르지. 너를 이용해서, 마계를 처단할.”
“…….”
“이용한다는 말이 불편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난 여태까지 너를 아론의 성가신 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정도면 너에 대한 가치를 꽤 재고한 거야.”
황제는 그 말을 웃으면서 했다. 섬뜩함을 느꼈지만 그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황제는 여리고 겁먹은 상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향이 애초에 그런 듯싶었다. 젊은 인재라면 출신이나 신분 상관없이 고용했던 그녀를 보면, 능력을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은 더욱 뚜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