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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84화 (184/220)

184화

“무,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놀란 것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감정이 격할 대로 격해진 아론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나만 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눈으로 말이다. 나는 그만 감정이 복받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차마 아론을 상처 주는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다.

“저어.”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아무래도 신전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꺼낸 말에 성기사들은 아론의 눈치를 살폈다. 아론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일어나서 그를 무시한 채로 몸을 돌리려고 하자 그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 왔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대로 무너지다시피 그의 쪽으로 넘어졌고, 곧 입술에 와닿는 열띤 피부를 느꼈다.

“……!”

기사들의 소리 없는 경악. 나는 입 안을 파고드는 혀의 거친 움직임을 느끼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그만…….”

손을 휘젓고 가슴을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론의 혀는 울부짖는 것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를 세워 그의 혀를 깨물고 말았다.

“……하아.”

입술을 닦고 보자 입가에 붉은 피로 얼룩진 아론이 보인다.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음조차 없었다. 그저 싸늘하고 냉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다.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걸 느꼈다. 그의 얼음장 같은 눈초리가 가슴을 파고들어 괴로움과 슬픔을 끌어올렸다.

그를 상처 주지 않고서 떠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자책하기엔 이미 늦었다. 나는 그를 화나게 할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를 실망하게 만들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론이 나를 떠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나는 억지웃음을 입에 물었다.

“여기서 나랑 하고 싶어?”

일부러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를 도발하듯이.

“네가 바라는 게 그런 거야?”

그럼 상냥하게 나를 벗겨. 내 담담한 어조에 아론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가 곧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인파를 헤치며 사납게 걸어가는 그는 온몸으로 괴로움을 내지르는 것만 같았다.

‘……바보.’

이곳에서 엉망으로 나를 범할 만큼 악하지도 않고 나를 순순히 놓아줄 만큼 마음이 냉랭하지도 않다. 오히려 미련스러울 만큼 나를 좋아한다. 지독하게 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내 마음을 마주할 수 없어서. 그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잘 수 있다는 나를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씁쓸히 중얼거리고 말았다.

“정말 바보라니까…….”

“네?”

“아뇨. 이만 가죠.”

기사는 잠깐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이 사라져 버렸지만 어차피 신전까지는 익히 알고 있는 길이었고 조용히 다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나의 짧은 외출은 끝나 버렸다. 내가 돌아와서 망토를 벗자 에나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일찍 오셨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내 말에 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의 자리를 봐 주고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빛이 가라앉고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잘 잤나요.”

이른 아침 날 찾아온 건 에나가 아닌 대사제였다. 그녀는 언제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었냐는 듯이 상냥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반응하지 않고 눈을 껌벅였다.

“오늘은 황성으로 가게 될 거예요. 중요한 분을 뵙는 자리니 모처럼 몸가짐과 장식을 신경 쓰겠습니다.”

“황성?”

뜻밖에 단어에 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 놀람을 역시나 인자한 웃음으로 받아치면서 말했다.

“네, 폐하께서 부르셨어요. 오늘 오전, 10시까지 입궁하라고요.”

그녀는 노래하듯이 대답하며 서둘러 들어온 에나에게 지시를 했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이 옷을 입도록 도와드려. 황성에서 보낸 것이니 주름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에나가 분주하게 뜨거운 물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몸에 긴장을 실었다. 대사제는 침대에 굳어 있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당신을 안내할 황성 기사단이 벌써 파견되어 기다리고 있어요. 서른 명의 기사들을 바깥에 오래 서 있게 하면 좋지 않으니 준비를 서둘러 주세요.”

서른 명? 사제 하나를 데려가는데 황실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왔단 말인가? 나는 마음이 부산해지는 걸 느꼈다.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부른 것인가. 아니, 예견했던 일이었지만 부르는 시기는 좀 더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보라만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에 내 얼굴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에나가 뜨거운 물에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대사제는 빠져나가고 에나가 욕탕으로 나를 안내하기 위하여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침대에서 힘겹게 발을 움직였다.

“와아! 하얀 색상이 너무 잘 어울려요!”

몸을 씻고 나오자 에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건을 내민다.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에나는 들고 온 옷을 펴 보며 내 몸에 어떻게 입힐지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내 몸에 살짝 닿는 천의 감촉에 움찔하고 말았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사제복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금실로 어깨에서부터 팔까지 고급스러운 자수가 들어가 있다. 가슴의 인장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밑단에도 정성스럽게 수가 놓여 있었다. 딱 보기에도 주문 제작으로 만들었을 아주 기품 넘치는 사제복. 나는 그 옷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고위 사제도 아니고, 높은 신분도 아니다. 이런 옷을 입는 자들은 소위 잘 나가는 신분의 간부 사제들이었다. 황제가 그를 모르지 않을 텐데. 황성으로 부르면서 고위급 사제나 입을 옷을 보내 주다니.

‘무슨 의도일까.’

내가 신성 제국의 사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마왕하고 연루된 지금, 내가 사제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대사제가 나를 치료하고 있을 때부터, 보라만 백작이 내게 제안해 왔을 때까지. 이 사안이 내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나를 보자고 한 건, 역시 보라만 백작의 제안 때문에?’

나는 대답을 일부러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한 일이라고 아론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다가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밖에 없다. 황제가 나에 대해서 모든 소식을 받아 본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알고 있겠지.

‘그리고 어제 일도…….’

나는 아론의 눈빛이 떠오르자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론을 이대로 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슬프고 괴로운 느낌이 들고 말다니. 나는 후회하지 말자고 되새기면서 고개를 젓고는 에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 지팡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지팡이요? 그 소환사일 때 쓰셨던 거요?”

고개를 끄덕이자 에나가 잠시 망설이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밖을 살펴볼 요량으로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밖을 보기 위해 막 고개를 길게 빼었을 때였다.

“창문에서 떨어지십시오.”

“……!”

갑자기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돌아보자 황성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보인다. 사내는 굳은 표정이었다.

“위험합니다. 떨어질 수도 있어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걸까. 나는 그가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고 알고 왔음을 느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밖을 보려던 것뿐이에요.”

“그렇습니까.”

내 대꾸에도 냉담한 빛을 지우지 않은 채로 그는 잠깐 나를 응시하더니 곧 허리를 숙였다.

“당신을 황성으로 데리고 갈, 황성 직속 기사단 제3기사단장 오르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유난히도 안절부절못하는 에나가 들어왔다. 에나가 뭐라고 입을 벌리기 전에 오르크가 말했다.

“지팡이를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허나 황성에는 무기를 소지한 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최소한 방에라도 가져다 두고 싶어서…….”

“몸을 회복하는 중이니 그것에만 전념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차갑게 딱 잘라 말한 기사단장은 준비가 다 된 것인지 물었다. 나는 에나가 들고 오는 값비싼 망토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럼 마차에 오르시죠.”

그가 문을 열며 한쪽 팔을 어두운 복도로 뻗었다. 나는 어두운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발을 떼었다.

마차 안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황성 마차는 무척이나 넓고 편했으나 마차 창문으로 밖을 내다볼 수가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답답했다. 진동까지 흡수해 버리는 바퀴의 안전장치로 인해서 가는 길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다 왔습니다.”

한 시간을 탔을까. 도로를 울리는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찾았을 때 마차도 멈췄다. 누군가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이 아닌 기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뒤 앞을 보았다. 수십 개의 도공이 달려들어 만들었을 거대한 석조 입구가 눈앞에 드러났다. 특이한 것은, 입구는 단조로운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짐승의 가슴뼈처럼 긴 골격의 형태로 길을 따라서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황성은 무척이나 컸고,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다양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입구를 통해 왔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으려고 하며 석조 입구에 서 있는 오르크를 바라보았다.

“따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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