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오랜만의 외출이라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잠깐 멈췄다.”
“그렇군요. 그럼 저쪽 의자에 앉아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오히려 이목을 끌어서요.”
아론은 그가 가리킨 자리를 바라보았다. 강변에 설치된 석조 의자였다. 사람들이 걷다가 힘들면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긴 의자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곳이 좋겠군.”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이끌었다. 얼떨결에 그를 뒤쫓게 된 나는 그가 커다란 피팔라 나무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피팔라 나무는 잎사귀가 큼직해서 지금 계절에는 좋은 은신처를 만들어 주곤 했다.
“저희는 뒤쪽에 서 있겠습니다.”
기사들은 둘씩 짝지어 나무 뒤로 물러났다. 피팔라 나무 앞으로 걸어가자 그들은 커다랗고 풍성한 잎사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론은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앉으셔도 됩니다.”
산들바람이 강물을 쓸어 온 뒤 우리에게도 부드럽게도 닿는다. 나는 땀으로 살짝 젖은 아론의 이마를 쳐다보면서 나무를 등지며 앉았다. 아론도 내 옆으로 앉았다. 그는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고 나 또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수면을 보았다.
“어렸을 때.”
아론이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절 강에 데려간 적이 있어요. 제가 울고 있을 때요.”
“아, 강물에 돌 던져 보라고 한 거? 네가 나중엔 팔이 아프다고 울상을 지었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추억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반나절 동안 던졌으니까요.”
“일부러 널 괴롭히려고 그런 건 아니야. 그렇게 던지다 보면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 내가 왜 슬펐나 잊게 되어서.”
내 말에 아론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그렇더라고요.”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진했다.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물론 울음을 그친 건 단순히 돌을 던져서가 아니라, 시범을 보이며 앞에서 웃고 있는 말레드레드가 예뻐서였지만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근사하게 들렸다. 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좋게 본 거야.”
“…….”
“네 기억 속에서 난 항상 미화되어 있으니까.”
“말레드레드는 어떤데요? 말레드레드 기억 속에서 전 어떤 모습이죠?”
아론은 얼굴을 더욱 가까이하며 말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의 매력과 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애써 진정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울보 아론.”
아름답고 근사한 성기사. 눈을 뗄 수 없이 금욕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면모가 있는 남자.
“그것뿐이에요?”
그러면서도 순정적이고, 애달픈 감성이 더욱 상대를 자극하는, 특출난 사내다. 나는 긴 답을 알고 있었지만 간략하게 말했다.
“그거면 충분하잖아.”
“이제는 충분치 않아요.”
아론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눈으로 날 보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도 잘 느껴진다. 그의 뜨거워진 숨결만큼 나도 그를 원하고 있었다. 저 진하고 감정이 일렁이는 눈을 보라. 그의 삶이 기도하는 다른 이들처럼, 주어진 것과 바라는 것의 조합일 거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바라는 것이 훨씬 큰 자였고, 그걸 위해 노력하고 달려가는 자였다.
“보고 싶고, 껴안고 싶고, 느끼고 싶어요. 매일 매 순간.”
아론은 입술을 겹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말레드레드에게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난.”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을 만지고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충동에 빠져서 그를 위로하며 껴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널 아끼지만 너랑 같진 않아.”
“거짓말이라는 거 알아요.”
아론은 작게 속삭였다. 그의 몸은 어느새 바짝 내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말레드레드의 떨림을 진정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말레드레드가 뭘 바라는지 모를 거라고?”
아론은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 원하고 있잖아요.”
“……나는.”
부정(不淨)한 사제다. 문제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또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는 웃었다. 미소는 조금 흐렸고 조금 슬펐다.
“마왕과 관계했어.”
“알고 있어요, 잊지 않았어요, 늘 그걸 생각하며 검을 부여잡으니까.”
아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침착하려 애쓰지만 마왕이란 이름을 듣자 참을 수가 없나 보다. 더구나 헤르간에서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면 아론의 분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굉장할 터였다. 나는 더 큰 충격의 고백을 했다.
“사실은 말이야. 그와 관계할 때 네가 상처 받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았어.”
아론이 멈칫했다.
“그러면서도 했어.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커져 있었다. 이게 우리 둘 사이의 마지막 대화가 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이걸로 그가 나를 완전히 포기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마계로 갔을 때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나는 이미 끝난 삶이었지만 아론은 계속 이어 갈 삶이 있었다. 나는 아론이 앞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이자 동지이자, 그리고 마음과 몸을 나눴던 연인으로서. 괜히 마왕에게 복수한다고 무모한 짓을 하지 말고, 제 바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란다.
“처음엔……. 선택의 여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를 이어 온 건 내가 좋아서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좋아서 마왕과의 관계를 이어 온 거야.”
“그럼, 저는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론의 목소리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절박해져 있었다.
“저하고도 관계를 꾸준히 했잖아요. 저를 좋아하니까…….”
“너도 좋아해. 아니, 좋아했어. 사실 두 남자하고 한다는 걸 모두 좋아했지. 하지만 헤르간의 사태를 겪으면서 깨달았어. 내 생각이 안일했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둘을 모두 감당할 사람이 아니야. 그런…….”
나는 힘들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릇이 못 돼. 그냥…… 그 정도의 사람이니까.”
“…….”
“내 그릇을 이제야 완전히 알았어.”
나는 자조하듯 웃으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의 표정은 어쩐지 겁먹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설사 말레드레드가…….”
아론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요.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든 따라가겠다고 했잖아요! 말레드레드가 어떤 사람이어도!”
“문제는 네가 아니라 나야.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거니까. 너하곤 상관없어.”
“그런…….”
“아론, 저번에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했을 때,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온전히 나여야 한다고 했지?”
아론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순간 내가 이 이야기를 할지 몰랐는지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결정했어. 사실 난…… 마왕이면 돼. 그 한 사람이면 되는 거 같아.”
아론의 표정이 텅 빈 것처럼 변했다. 나는 어쩐지 생애 처음으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론의 얼굴을 본 순간 이상하게도. 이런 말 같은 건 얼마든지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알았는데.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몹시 속이 쓰리고 입 안이 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독이라도 문 것처럼 몸 상태가 변하다니.
“그래서 그날, 그와…… 입 맞춘 거였어요……?”
역시 봤나 보다. 헤르간에서 마왕이 내가 키스했던 것을. 나는 아론을 똑바로 쳐다봤다.
“응.”
“그가 마족을 죽여 절 구해 준 건……?”
“그건 그의 호의였겠지. 내가 그에게 간다고 하자.”
“말레드레드!”
아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벌써 살기에 해당하는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싹한 바람이 그에게서 불자, 피팔라 나무의 잎사귀들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럼 저는요? 여태까지는 저는 뭐죠? 그저 울보 아론일 뿐인 거예요?”
“아론 너는…….”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마음을 단단히 하려 애썼다.
“늘 위대한 성기사일 거야. 내가 아니어도 네 가치나 빛은 달라지지 않아. 그걸 명확하게 알았으면 좋겠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스치듯 가겠지만…….”
“스쳐요?”
아론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강물을 요동치게 했고 풀숲을 뒤흔들었다. 피팔라 나무 잎사귀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들으면서 나는 아론이 무척이나 상처 받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대사제가.”
아론이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오늘 아침에 저를 만나 그러더군요. 말레드레드가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이라고 절 보고 있다고요. 어떤 추문도 진실도, 알아서 견뎌낼 거라 보고 있다고……!”
“맞아. 그렇게 말했어.”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물론 그 말을 한 데에는, 아론이 어리거나 미숙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미에서였다. 나는 온전한 성인끼리 관계했다는 것을 거듭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걸 원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그저 남에게 이끌려서 주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우리는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일이 생겨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감정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다. 설령 그렇게 산 과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아니고 싶다. 이제부터는 인생을 주사위 던지듯 내던지고 살지 않겠다. 적어도 삶의 어떤 방향을 정해야 한다면, 아니 방향이 정해져 있다면 그걸 순응하고 기꺼이 걸어가는 쪽을 택하겠다.
이것은 아론 때문도 아니고, 마왕 때문도 아니다. 내가 아직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설사 인간이 아니더라도…….’
이런 나를, 내 삶의 태도를 바꾸고 싶지 않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부여잡고 말겠다. 나는 이 선명한 깨달음이 온몸으로 체득하듯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었어. 어떤 일이 생기든 아론도 나도 괜찮을 거라는 걸…….”
“괜찮지 않아요!”
아론이 소리치자 주위가 웅- 하며 울렸다. 강물은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진동했고 나무와 풀들은 거칠게 휘몰아쳤으며 강한 빛이 번쩍하고 번져 나갔다.
“전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요!”
아론의 거대한 분노에 세상이 울부짖는다. 나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