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내 말에 에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이 이야긴 신전에는 비밀이에요. 신전에선 생존자에 대해서 철저하게 함구하라고 했거든요. 그들은 현재 신전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따로 머물며 조사를 받고 있어요. 마족과 마왕이 모두 출몰한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철저하게 조사가 들어가는 것 같아요.”
에나는 혹여라도 목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긴장하며 말했다. 나는 괴생명체들도 신전 숙소에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 소식이 궁금했거든. 기절한 채로 이곳에서 눈을 뜬 터라. 어쨌든 숙소에서 지낸다니 정말 다행이다.”
“더 일찍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워낙 주변 상황이 그렇다 보니…….”
에나는 다시 멋쩍게 말하고는 내 망토의 매듭을 리본으로 예쁘게 마무리해 주었다.
“다 되셨어요.”
나는 거울을 한 번 보고는 에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
“곧 호위를 맡은 기사단이 올 거예요.”
“……저번에 말이야. 이 외출을 위해 고생한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게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똑똑.
기막힌 타이밍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나는 얼른 달려가 방문을 살짝 열어 보고는 내게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오셨는데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투구를 옆구리에 낀 사내가 보였다. 신전의 갑옷을 정식으로 차려입은 그는 아론이었다. 하얀 이마를 덮은 금발을 보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반듯한 차림새로, 그러나 누구보다도 강하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사내를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 몰랐다. 나는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한없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왠지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올 줄…….”
겨우 말을 끝맺었다.
“몰랐어.”
“자원했어요.”
아론은 짧게 대답하고는 나를 훑었다.
“준비는 모두 된 것 같네요.”
“아, 응…….”
“그럼 가죠.”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투구를 다시 머리 위로 눌러썼다. 투구에 가려지자 화사한 외모가 사라지고 건장하면서도 위엄에 찬 기사의 늠름한 모습만이 남았다. 나는 조금 얼이 빠져서 그를 바라만 있었다.
“잘 다녀오세요.”
에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그녀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가자 아론과 같은 차림의 성기사들이 일렬로 서 있다. 인원은 모두 4명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사제를 따라다니는 5명의 성기사라. 어쩐지 이상해서 더 눈길을 끌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걷기 시작하자 성기사들은 둘씩 짝지어 거리를 벌려 따라왔다. 아론은 내 옆에서 걸었고, 다른 기사들은 두 팔 너비만큼씩 멀어진 것이다. 아론은 내가 뒤를 힐끔 보자 반응했다.
“너무 붙으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행진하듯이 걸을까 합니다.”
아론의 말은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어차피 축제를 위해 많은 기사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도시 치안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도 그렇게 보일 테니까.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복도를 지나 문을 나가자 거대한 홀이 나타난다.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인파를 보고 새삼스럽게 입을 벌린 채 감탄했다. 홀을 가득 메운 다양한 옷차림과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 그들은 홀 가운데 서 있는 조각상을 둘러싼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수확 축제 때문에 한동안 방문객이 많을 겁니다.”
아론은 짧게 설명하고 먼저 앞장섰다. 나는 그를 뒤따르며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어떤 내용이 됐든 간절하게 무언가를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자 왠지 마음이 묘해진다. 신의 힘을 쓰는 사제로서, 나는 저렇게 신께 기도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신의 힘을 끌어내 어떻게 마족을 물리칠 것인지만 고민했다.
저들에게 있어 삶이 주어진 것과 바라는 것의 조합이라면, 내게 있어 삶이란 적응하는 것과 생존하는 것의 조합이었다. 그래서 늘 상황에 순응하려 했고, 도망칠 수 없다면 받아들이려 했다. 그래서 수녀원에 얌전히 끌려간 것이고, 아론을 받아들인 것이며, 마왕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가문에서 천대받고 자란 아가씨가 모두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자라 온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내게 어떤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다. 문제는 나는 이런 내가 싫지 않다는 것이다. 내 모자람이나 식견의 짧음을 반성한 적은 있어도 내 성향이나 가치관이 이렇다는 것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간에.’
나는 나일 것이다. 나는 그 깨달음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좀만 더 걸어가면 정문이 나올 겁니다.”
아론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서 나를 끌어냈다. 나는 아론을 한 번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의 정문을 나오자 거짓말처럼 가슴이 탁 트이는 걸 느꼈다. 신전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는 깊은 내실에서만 생활했던 나였다. 상쾌한 공기, 자유로운 바람, 넓은 시야를 느끼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었다. 아론은 다행히 독촉하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대로를 이용해, 광장과 호수 근처를 돌까 합니다.”
어디로 갈지 이미 경로를 계획해 둔 모양이다.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는 자체가 몹시 좋았기 때문에 아무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를 잘 모르기도 했고, 그렇다고 도망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히려 순종적이 되어 버린 나였다.
“수도는 참 번잡하구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바깥이 잘 보이도록 망토를 고쳐 썼다. 늘 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시야에는 건물들만 크게 들어왔다. 잘 구획된 도시를 보는 것 같았는데, 직접 아래에서 보자 넓은 도로 사이로 수없이 이어지는 소로와 마차의 행렬, 그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눈을 어지럽히며 기분 좋은 현기증을 선사한다. 아론은 내 말을 듣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축제 기간이라서요. 평소엔 이렇게 많지 않아요.”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거 같아.”
내 말에 아론은 의외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오늘은 말이야.”
“…….”
“그럼 가자.”
시간이 흘러가는 게 왠지 아까웠다. 신전은 두 시간의 외출만 허락했기 때문에 일분일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일부러 걸음을 바삐 재촉했다. 아론은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 옆쪽 강가의 길을 선택했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서 걷는 것은 뜻밖의 한적함과 나른함을 동시에 선사해 주었다. 이렇게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잔잔히 흘러가는 물소리까지 들리자 더욱 기분이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좋다.”
꾸밈없이 나온 말이었다. 아론은 잠시 내 말을 듣고서 멈칫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나를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그냥 오늘 기분이 유독 좋아 보여서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어…….”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그냥 하지 그랬어.”
“그건…….”
아론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의 눈이 깊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마왕하고 연관이 있을까 봐?”
“…….”
나는 대답 없는 그를 보면 씁쓸히 웃었다. 아론의 표정은 이미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을 경계하는 것처럼 뻣뻣하게 긴장시킨 그를 보면서 나는 다시 강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갇혀 있었으니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우울했었거든. 이렇게 다시 나올 수 없는 줄 알고.”
나는 아론을 보았다. 그의 눈이 빛나는 게 좋았다. 마치 강물이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다웠으니까.
“오늘 외출할 수 있었던 거.”
저 눈을 사랑했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늘.
“네 덕이라고 들었어. 고마워.”
“…….”
“정말.”
아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고 싶다.
“날 위해 어떤 고생을 한 거야?”
“별거 아닙니다.”
아론은 말을 아꼈다.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물어도 자세히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짐짓 고개를 까닥거렸다.
“얼마 후 황성으로 가게 되겠지?”
“……아마도.”
아론은 그게 편치 않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황제와 내가 만난다는 사실이 석연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였고, 그녀의 명을 어길 수 있는 자는 이 제국에 아무도 없었다. 아론 역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괜찮아. 그분이 날 죽이려 했다면 벌써 죽였을 테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아론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어두워져 말했다.
“그분은 무서운 분입니다.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잔인한 면모가 있으시죠.”
“그래. 느껴져. 그분께서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치료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 협조하길 바라고 치료해 주신 거겠지. 마왕을 잡는 데 유용한 역할이 되라고 말이야.”
“말레드레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론이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을지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한 터였다. 나는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니고.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킬 가능성이 커.”
“그래서 보라만 백작에게 아직 답을 하지 않은 거였군요.”
나는 머쓱하게 미소 짓고 말았다. 사실 그 때문에 답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론은 내가 말이 없자 자신도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멈추신 겁니까.”
뒤따라오던 성기사가 놀라서 물었다. 그는 우리 둘을 살펴보고는 아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론은 그를 보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