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모욕감? 그렇게 간단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의 위상을 떠올려 보세요. 그는 어떤 때보다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평가를 받고 있어요. 불결한 관심들과 소문들에 휩싸여서요. 앞길이 창창한 유망한 청년이 하루아침에 싸구려 소설 주인공이 된 것처럼 더럽고 음탕한 질문들을 받고 있죠!”
“그게 제 탓이라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내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게 거슬렸는지 대사제의 표정이 더욱 찡그려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건가요?”
“제가 무엇을 했고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어요. 다만 그도.”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론나이드 경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아는, 제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라는 겁니다.”
“……기막히군요. 이 사태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반성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당당한 태도라니!”
대사제는 기가 막힌 것처럼 보였다.
“사제로서 말레드레드의 처신은 솔직히 실망스러워요. 같은 사제라는 것이 창피할 정도로요. 보라만 백작에게 협조를 서둘러 하지 않는 이유도 이제야 알겠어요! 처음엔 당황하고 무서워서 그러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이 일에 대해서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해서 그런다는 것을요!”
대사제는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일에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느낀다. 부끄러움은 마왕과 정사를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순간의 욕망만을 좇아 앞날을 깊게 내다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좀 더 현명했으면 마왕과의 정사가 훗날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예상했을 텐데. 나는 그 당시 그게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목숨을 살리는 것과 유혹적인 그의 매력에 빠져서 일부러 깊게 생각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지금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그런 얄팍한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말레드레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무슨 죄인가요. 아론나이드 경은 이번 일로 나이트가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대사제는 그 사실이 몹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론을 무척이나 좋게 보고 있는지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아론을 동정하고 있었다. 나는 아론이 대사제에게도 호감을 샀구나, 가볍게 생각하며 죄책감이란 감정을 떠올렸다.
아론,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리며 시큰거린다. 비록 가벼운 관계를 유지할 거라고 선언하고 만난 것이지만 그가 보여 주는 태도는 늘 한결같았고, 또 지고지순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론과 관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론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걸 무작정 받아 줄 수 없는 나의 이기심에 있었다.
대사제는 내가 말이 없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항간에서 말레드레드의 예전 생활에 대해서 좋고 나쁜 말이 돌던데, 어쩐지 전자가 과장되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대사제의 싸늘한 눈빛을 보자 그녀의 감정이 더욱 잘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더 말을 해 봤자 상황이 악화될 뿐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외출할 수 있다는 말을 무르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로.
대사제는 곧 감정을 갈무리한 듯 등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더 이야기해 봤자 의미 없을 거 같네요. 어쨌든 아직 신께 봉사할 기회가 있으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대사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하얀색의 서간이었다. 흔히 귀족 가에서 쓰이는 서간을 보자 나는 멈칫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서간을 내려놓은 뒤 다시 나를 보았다.
“과거가 나를 만듭니다. 행실을 곧고 바르게 해야 뛰어난 사제가 될 수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굳은 듯이 서 있던 에나는 대사제가 움직이자 그제야 자리를 비키면서 그녀가 나갈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에나는 잠시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곧 대사제를 뒤따라서 서둘러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서간으로 팔을 뻗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누구한테서 온 것일까. 지금 내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수많은 상념들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편지를 열어 보는 순간, 그 상념들이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로 선명하게 대체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친애하는 말레드레드]
제법 공들여 쓴 글씨체. 그러나 특유의 경망함을 지울 수 없다. 봉투를 열자마자 희미하게 올라오는 박하 냄새에 나는 이 편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메리옹 백작의 집무실에서 늘 맡았던 냄새. 백작이 좋아했던 향이다. 나는 어렴풋이 누가 쓴 것인지 짐작하며 본문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신의 축복을 받은 그 외모는 여전하겠지?]
백작은 내 외모를 부담스러워했다. 수녀원에 보내기도 첩으로 보내기도 석연치 않은 화사한 외모라고. 그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에게 있어 저주처럼 뚜렷한 각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자식이라는 명백한 증거.
[이곳 노르타까지 네 이야기가 들려. 정확히 네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은빛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 혈색 넘치는 살결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소환사는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까. 너무 노골적인가? 하지만 내가 다음으로 묻는 건 더 노골적일 거야.]
아름다운 외양은 내게 실보다 득이었다. 소환사로 일하면서 뛰어난 외모 덕에 선두에 섰고, 좋은 평가도 받았다. 사람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환사가 부리는 신성력을, 신의 존재 증거라는 듯이 열광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나도 더욱 내 외모에 맞게 행동하려고 했다. 웃기게도 이런 점 때문에 내 안의 갈증은 더욱 커졌고, 내 안의 욕구도 더욱 비대해졌다.
[지금 제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헤르간의 사태가 너 때문이라며?]
헤르간을 파괴한 장본인은 에레나였다. 나는 그 점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차기 마왕인 그녀가 인간들을 철저하게 고통받게 할 의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뿐이었다. 헤르간의 사태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아론과 나, 그리고 마왕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싶어. 사랑하는 나의 이복동생이자 아름다운 말레드레드. 네가 진정 빛과 어둠의 싸움을 일으킨 장본인인지 다음 편지에서 답을 주렴. 기다리고 있을게.]
진실. 그 단어는 무겁다. 진실이란 때때로 원치 않은 수렁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혹자는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알고 싶어서 진실을 추구했으니 만족한다고 하지만, 가면을 벗은 진실의 민낯을 보고서 정말 미소 지을 수 있을 자가 누가 있을까.
무엇보다 진실을 품고 있는 자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그 혹은 그녀에겐 괴롭힘이자 고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라 느껴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눈을 감았다.
나라는 존재가 편지를 통해서 재구성되는 느낌이다. 그렇다. 이런 사실들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한다. 나라는 인간을 만든다. 나는 절절하게 실감하며 눈을 떴다.
“……조슈아.”
편지를 쓴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 딱히 애정 없고 친분 없는 배다른 오라버니가 친한 척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호기심에서. 항간에서 떠드는 사태가 진짜인지 궁금해서이겠지. 그에 반면 메리옹 백작은 신전으로 어떤 기별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신중하게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터였다. 향후 이 일이 자신의 가문에 어떤 영향을 미쳐 올지 고민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걸 느꼈다. 그저 지금 어떤 얼굴인지 궁금할 뿐이다. 늘 나를 낮게 보고 무시했던 이들이기 때문에 지금 나를 보면 기괴하다는 듯이 표정이 틀어져 있을 테니까.
“……어둠과 빛의 싸움.”
헤르간의 사태보다 이쪽이 좀 더 이해하기 쉬웠다. 어둠과 빛이라니. 그것은 마왕과 아론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이 표현이 마치 나에 대한 말인 양 친근하게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늘 맘대로 이기적으로 하고 싶었던 욕망 가득한 말레드레드가 어둠이라면, 선한 척, 의로운 척, 마계와 싸웠던 사제 말레드레드가 빛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 생각이 재미있어 조금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둠의 말레드레드에게 패한 꼴이 아닐까. 적어도 이 순간 신전에 있는 내가 빛의 말레드레드라고 한다면 말이다.
“저어, 외출 준비를 도와드릴게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까, 정오가 되자 에나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간단한 점심을 차려 주고선 내 머리와 의복을 만져 주었다. 옷은 일반 사제복으로 조촐했다. 망토까지 쓰고 나면 그저 순례를 다니는 사제처럼 평범해 보일 것이다.
나는 신전에서 내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지시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불만은 없었다. 나도 조용히 다니고 싶었으니까.
내내 말이 없던 에나는 나갈 준비가 끝날 무렵에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다들 제가 수도 출신이라고 알고 있지만 전 사실 어린 시절을 헤르간에서 보냈어요.”
내가 쳐다보자 에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주 가난했고, 배고픔이 일상인 생활이었어요. 비슷한 처지끼리 모여 살기도 했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누굴 떠올리고 말았다. 괴생명체가 되었던 소녀, 그녀는 무사할까? 오히려 헤어지면서 내게 웃어 주던 그 아이가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오래전에 떠나왔지만 그래도 그곳이 제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힘들었던 시기지만 그 시기가 있기에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다고.”
에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도 헤르간이 지금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알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소수였고 대지는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했으니까.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거기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절 돌봐 준 아저씨가 있으시거든요. 그분께서 그러셨어요. 은발의 사제분이, 여자분이 자신들을 살렸다고. 동굴에서 죽을 뻔했는데 자신들을 위해 편을 드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고.”
“동굴? 설마, 괴생명체들과 함께 숨어 있던 생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