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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80화 (180/220)

180화

나는 좋아, 라고 중얼거리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과감하게 테라스 난간 위를 잡고 올라섰다.

5층 높이의 내 방에서 아론이 있는 정원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아래를 보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나는 얼른 벽의 문양이 솟아올라온 곳을 밟았다.

“앞만 보자.”

암시하듯 중얼거리며 나는 한 발 한 발 발을 옮겼다. 기분 좋게 느껴졌던 바람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볼록한 문양을 꽉 쥐어 발을 옮겼지만 몇 발 가지 않아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조금만 더…….’

나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정원에는 잔디와 관목이 수북하게 깔려 있어서 설사 떨어지더라도 치명상은 면할 것 같았다.

“아니! 뭐 하는 겁니까! 거기 올라가면 안 돼요! 위험해요! 떨어지면 죽는다고요!”

누가 나를 발견하고 외치기 전까지는. 나는 그 소리에 여태까지의 용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발이 떨렸고 손에 힘이 빠졌다. 아래는 벌써 큰일 났다며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난 상태였다.

‘침착하자. 일단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해.’

발 디딜 곳을 확보하고 나자 손으로 잡을 곳을 찾는다. 암벽 오르는 훈련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른 아침, 쇠약해진 육체로 갑자기 무리를 한 탓일까. 바람이 강하게 불자 나는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아……!”

미끄러진다고 생각해 눈을 감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내 허리를 꽉 잡았다.

“……제게 기대세요.”

“아, 아론.”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그만 긴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아론은 그런 나를 감싸 가슴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딱딱한 그의 갑옷이 느껴지면서 그의 향기가 난다.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그의 냄새에 나는 왠지 가슴이 울렁이고 말았다.

아론은 말없이 창문 턱을 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날 끌어안고도 그는 가뿐히 창문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내가 바닥을 디딜 수 있도록 내려 주었다.

“…….”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이 목에서 막히는 걸 느꼈다.

“너를…….”

아론은 기다렸다. 내가 마저 말을 끝내기를.

“만나고 싶었어.”

“왜요?”

아론의 눈빛은 흐렸다. 기분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왜냐하면……”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저편에서 성기사들이 요란하게 몰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두 분 다 무사하신 건가요? 아론나이드 경! 괜찮으십니까?”

성기사들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성기사들에게 말했다.

“우린 괜찮아.”

“네에?”

우리, 라는 단어가 성기사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다. 그들은 나와 아론을 커다란 눈으로 한 번씩 보더니 이내 당황하며 말했다.

“다, 다행이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그들은 눈치껏 사라지는 방향을 택했다. 문제는 우리 소란을 보고서 온 자가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론이 나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 복도를 따라 허겁지겁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인물들이 있었다. 대사제였다. 그녀의 뒤에는 에나와 성기사가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눈으로 잽싸게 나를 훑었다.

“별일 없어 보이는군요.”

“대사제님.”

나는 그녀에게 입술을 떼었다. 대사제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이 소동의 원인이 된 게 나라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말하기 전 사제가 먼저 말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세요.”

“대사제님.”

이번엔 아론이 입을 열었으나 사제가 한 발 더 빨랐다.

“아론나이드 경께서도 입궁하셔야 할 텐데요? 지금 신전을 떠나지 않으면 폐하의 부름에 늦을 겁니다.”

“…….”

“어서요.”

누구를 재촉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나에게도 하는 것 같았고, 아론에게도 하는 것 같았다. 강한 어조였기에 결국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억울하고 당황해서 아론을 보았으나 아론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가 가고 나자 덩그러니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대사제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시기예요.”

“…….”

“몸가짐을 좀 더 조심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고를 한 그녀는 뒤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성기사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팔을 뻗었다. 에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론이 사라진 복도를 돌아보고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제 깨달아야 하는 시기가 왔는지 모른다. 나는 이제 철저히 혼자이며, 누구에게도 더 마음을 줄 기회나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했던 그가 떠나 버리자 나는 정말로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이 기분에 익숙해져야겠지. 인간으로서 느끼는 마지막 외로움일 테니까. 나는 다리를 끌어모았다. 그렇게 침대에 무릎을 모으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나는 생기를 잃어버린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에나는 내 상태가 무척이나 걱정되는지 자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괜찮은지 몇 번이나 물었다. 나중에는 내가 반응하기도 힘들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망설이며 내 방을 나갔다. 아마도 내가 이곳에서 활력을 잃어 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도 신전의 처사가 가혹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위쪽에 말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했다. 잠깐이지만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나를 본 사제들의 눈빛이 기억난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도 있었지만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눈빛도 있었다. 나에 대한 말들이 어떻게 퍼졌는지 몰라도 같은 사제들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이 허탈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보라만 백작은 그날 오후에도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내 안색을 보자 혀를 차면서 일단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몸이 건강해야 무엇이든 도모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나 어차피 마계로 가서 마왕에게 종속될 몸, 건강해 봐야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 신음하고 잘 느끼게 될까? 그저 단순한 마족으로서 욕망만을 느끼는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욕망을 느끼던 나와 어떻게 달라지는 걸까.

인간이 아닌 나. 마족인 나. 그녀는 더 이상 말레드레드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더 생각하기 싫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내가 생각을 돌릴 곳이라곤 테라스가 전부이다.

나는 걸어서 그곳에 섰다. 저번 날의 괴행 때문인지 테라스에는 높은 철망이 붙어 있었다. 대사제의 철저함에 쓴 웃음을 지으며 바깥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수도는 활기에 차 있었다. 우울하고 침침한 나와는 정반대였다.

수확 축제가 코앞이라 벌써 수도 곳곳에 꽃장식이 보인다, 풍년과 풍요를 알리는 곡식 장식들이 들어섰다. 알록달록한 연들은 하늘을 심심치 않게 날아다녔고, 가끔은 줄을 끊고 바람을 탄 채로 꼬리에 매달린 리본들을 뽐내기도 했다.

저토록 아름다운데 어째서 즐길 수가 없을까. 나는 우울해진 채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에나가 조심스럽게 문으로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깐이라면.”

그녀는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외출이 가능할 거 같아요.”

“정말……?”

나는 놀라서 묻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래는 안 되지만요. 신전 주변을 돌아다니는 건 가능할 거 같아요. 다만 성기사단과 함께 돌아다니셔야 해요. 원래는 안 되는 거니까 철저하게 그분들 주위에서만 움직이셔야 하고요.”

“정말 고마워, 에나.”

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에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저었다.

“아, 아뇨! 제가 한 건 아니에요! 전 다만……. 그분께 말씀드렸고, 그분이 고생하셔서 이런 기회를 얻으신 거죠! 제가 한 일은 단지 사제님께서 아프시다는 것밖에 전달한 게 없는데.”

“그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에나가 이름을 말하려고 할 때 대사제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에나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타박하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없이 그녀를 쏘아본 뒤, 대사제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많이 답답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안색도 좋지 않고. 그래서 내일 수확 축제 날에 특별하게 외출할 기회를 주겠어요.”

“……감사합니다.”

이유가 뭐냐고,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건대 그녀의 자의로는 이 일을 결정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바꿀까 싶어 나는 순순히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반쯤 몸을 돌려 나가려던 그녀는 다시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난감해 보였다.

“밖에서 돌아다니는 추문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예요. 잘은 모르더라도 눈치가 없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단호한 어조였다.

“세간의 관심이 모여드는 걸 즐기는 부류가 있어요. 사제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지만 절대 마왕과의 추문으로써 그러면 안 되죠. 그건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

“같은 추문에 올려진 성기사도 무척 고역스러울 거예요. 다름 아닌 여자를 두고 싸워야 하는 대상이 그 마왕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설사 그녀가 나를 면박 줄 의도로 말을 꺼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는, 그녀의 말에 상처를 입을 만큼 여유도 기운도 없었으니까. 대사제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성실한 성기사까지 모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저 때문에 아론나이드 경이 지금 모욕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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