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76화 (176/220)

176화

‘그날 있었던 일…….’

목격한 사제라면 모두 경악해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젊고 촉망받는 성기사가 강한 마족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 마왕이 나타났다. 그가 공격한 이는 성기사가 아니라 마족이었고, 그런 뒤 보란 듯이 내 입술에 키스하고 사라져 버렸다.

‘황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겠지?’

가슴이 불편하게 뛴다. 아론의 마지막 표정까지 기억나자 가슴이 더할 나위 없이 답답해졌다. 머리까지 어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수그리자 새롭게 입혀진 의복이 보이고, 가슴팍에 새겨진 황성의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뚫고 검을 비춘다. 자신이 그 어둠 속에 빛나는 검 한 줄기가 될 거라고 말하는 형상을 보며 나는 더없이 막막함을 느꼈다.

‘그녀가 조만간 날 부를 거야.’

치료가 끝나는 대로 황성으로 부르겠지. 어쩌면 추궁 후 벌을 받을 수도 있고, 자세한 경위를 물은 뒤 상황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황성에 들어가면 빠져나가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도망갈 수 있을까?’

살며시 고개를 들었을 때 때마침 대사제 뒤로 문이 열리며 아까 보았던 소녀 사제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반짝이는 은쟁반을 내밀자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가 물병을 집기 전에 자신이 하겠다며 대사제가 대신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천천히 드세요. 아직 목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천천히 물을 삼켰다. 시선이 불편했으나 그들은 내가 무사히 먹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안도했다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잘 쉬고 잘 자면 금세 좋아질 겁니다.”

“여기…… 어, 얼마나 머물러야 하죠?”

가볍게 묻는다고 물었으나 대사제의 눈빛이 경계하듯이 변해 있었다. 이내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달며 답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요. 자세한 건 위에서 지시가 올 겁니다.”

“폐, 폐하께서요?”

그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너무 깊은 생각 마세요. 폐하께서도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라 하셨습니다. 엘크리찬께서 그대를 돌보실 겁니다.”

그녀가 어린 사제와 함께 나가자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은 무겁고 차가웠다. 나는 멈춘 듯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석조 테라스는 시원했고 그나마 답답한 가슴을 풀어 주듯이 넓은 시야를 자랑했다. 손을 움직여 테라스 난간을 잡았을 때 나는 손을 따끔하게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이, 이건…….”

나는 난간을 자세히 보았다. 난간은 그냥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희미하게 신성력이 돌고 있었다. 달빛이 돌에 반사되어 빛나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그제야 놀라면서 건물 외벽을 바라보았다. 건물은 신성 제국에 걸맞은 양식으로 멋들어지게 지어져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 찬란한 위용에만 감탄하며 입을 벌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제였고 신성력을 쏟아부은 건물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아볼 눈이 있었다.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신성력의 기류를 보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마기가 절대 침투할 수 없는 장소네…….’

황제가 신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다. 나는 외벽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스름함에 휩싸인 수도가 눈에 들어온다. 수도는 마냥 어둡지 않았다. 선황 때부터 착실하게 이어 온 도로 정비 사업과 도시 경관 사업이 수도 전체를 깔끔하고도 세련되게 바꾸어 놓았다. 도로를 따라서 세워진 횃불들과 상점들이 밤을 몰아내며 저녁에도 활동하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도 했다.

나는 신전 주위로 절도 있게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단을 발견했다. 기사단은 신전 주위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 있었다. 수도 경계가 남다르다는 것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왜 에레나가 수도가 아닌 작은 도시에서부터 사람들을 괴생명체로 바꿔 서로를 공격하게 하려 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후우…….”

침대로 다시 돌아온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제 몸이 회복될까. 그리고 신전에선 어떻게 빠져나갈까. 빠져나가더라도 수도를 벗어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도망자 혹은 탈영병이라는 신분을 뒤집어쓰고 과연 안전하게 제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황제의 추적까지 따라붙는다면 국외에서의 내 삶은 도망과 은신만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게 과연 내가 원한 미래일까.

“……!”

눈을 질끈 감았다. 미래라고 하자 마왕의 제안이 떠오른다. 그렇다. 내 미래는 사실 정해져 있었다. 나는 마왕에게 종속되어 인간이 아닌 마물, 혹은 마족이 될 것이다. 평생 내가 적으로 삼아 왔던 존재, 증오하고 혐오했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려 해 봐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덮은 천을 꽉 그러쥐었다. 신성력이 빛나는 검을 휘두르며 나를 죽이려는 사제들, 동료들……. 그들은 나를 악이라 외치며 처단하려 들 것이다. 마왕의 품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얼마나 오래 보게 될 것인지 몰라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나는 나이고 싶다. 나다운 인간이고 싶었는데……. 깊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리곤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잠에 들려고 애썼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 무렵에 나는 언뜻 아론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의식은 흐려졌고 아론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론이 밤에 나를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일어나셨어요?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다음날. 소녀 사제는 아침 새가 울자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여분의 옷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밝은 얼굴이었고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제, 제가…… 여기 온 지 며칠이 지났죠?”

“말 놓으셔도 돼요. 전 아직 교육 중이라 정식 사제가 아니거든요!”

소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3일 되셨어요. 이틀 후면 5일째가 되시는데 수도에서 수확 축제가 열리죠.”

“수확 축제……?”

“네, 황제 폐하께서 그동안 마물과 마족들로 온 나라가 공포에 떨었다고, 고생이 많았다는 의미로 수확 축제를 여신다고 했어요. 모처럼 황궁의 창고가 개방된다고 하는 터라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죠.”

“…….”

수확 축제라니. 황제는 무슨 생각인 걸까. 아직 마계와의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나는 불편한 심정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소녀가 제가 해 줄 것이 있는지 물었다.

“괘, 괜찮아.”

“그래요?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부르세요. 소리를 내기 힘드실 테니 탁자 위에 종을 올려놓고 갈게요.”

소녀는 침대 옆쪽에 은빛 종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걸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볼게요.”

“에, 에나…….”

“네?”

“사, 산책을 할 수 있을까? 방에만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서…….”

내 말에 소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대사제님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아직은 방에서만 머무셔야 한다고요. 말씀을 드릴 수는 있으나 아마도…….”

난감해하는 얼굴에 나는 알겠다며 대사제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허리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대사제가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아론보다 키가 컸다. 중후한 느낌이 감도는 사내는 은색 베스트를 입고 허리에는 얇은 검을 차고 있었다. 검 손잡이에는 세공사가 공들여 세공했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수도의 귀족으로 보이는 사내는 나를 보자마자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서둘러 대사제가 소개했다.

“말레드레드. 이분은 황성의 제2 행정관 소속인 보라만 백작이세요.”

나는 예의를 차리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전에 남자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누워서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쪽 입가를 올린 그는 제법 친근하게 말을 걸어 왔다.

“마기에 당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제2 행정관. 과연 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제2 행정관은 외교를 담당하는 곳이다. 나는 쿵쿵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그가 던지는 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어나서 많이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수도로 옮겨져 신전에서 치료받고 있으니까요. 황제께서도 그 점을 고려해 저를 보내셨습니다. 나중에 황성으로 입궁하기 전에 어느 정도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상황 판단이요……?”

“말레드레드도 잘 알 겁니다. 의식을 잃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건 한복판에 있었으니까요. 다름 아닌 그 존재가 나타나 수하의 목을 베었죠. 제일 강력하다고 알려진 수하의 목을 직접 말입니다!”

“…….”

보라만 백작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반짝이고 있었다.

“사제로서 지금 기분이 어떨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제국의 모든 시민들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니까요. 황성 또한 말레드레드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합니다.”

나는 점점 막혀 오는 목을 느꼈다. 헤르간에서의 일이 제국 전체로 번져 나갔다니.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졌다고 생각하며 나는 핏기가 사라진 느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궁에서는 이번 일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찌 됐든 마왕의 이변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닐 테니까요. 그래서 말레드레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 저의 도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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