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75화 (175/220)

175화

질문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가 분리됐다. 분리된 두 질문은 각각의 파동을 만들며 나를 자극했다. 두 번 다시 합쳐질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론을 보았다. 마기에 얽혀서 괴로워하는 그. 그를 보고 있자 가슴이 먹먹해졌고 손에 땀이 쥐어졌으며 숨이 가빠졌다. 저 황금빛 눈동자에 선망이 아닌 고통만이 가득한 것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다. 나는 망설임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그요.”

“확실한가?”

마왕은 묘하다는 듯이 입술 한쪽을 올렸다. 어쩐지 만족스럽다기보다 기분 나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마왕은 몸을 돌렸다. 마기를 순식간에 거두어들인 그는 온몸에 그 기운을 흡수하더니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레나가 확신에 차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이시여! 성가신 성기사를 잡았습니다! 목을 잘라 마왕의 성에 보기 좋게 걸어 놓을까요? 장식으로 달아 놓으면 볼 때마다 흡족하실 겁니다!”

그러곤 간드러지게 웃었다. 마왕은 그녀를 보면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나, 그대의 노고는 훌륭했다. 당분간 휴식을 내리지.”

“네?”

“쉬도록 해.”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마왕의 손이 움직였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을 남겼다. 어떤 동작도 보지 못한 나는 그의 옷자락이 조금 팔락거린 것을 보고서야 그가 무언가를 했구나, 를 깨달았을 뿐이다.

툭. 둔탁한 물체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에레나의 머리라는 것을 나는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크읏!”

폭발하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공중에 붙들려 있던 아론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살아 있었다. 마왕은 신음을 내뱉는 그를 무정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섰다.

“자, 그를 살렸다.”

“…….”

마왕은 은근하게 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며 볼에 와 닿자 나도 모르게 흠칫 떨고 말았다. 마왕은 그런 내 반응을 보면서 한 자 한 자 속삭이듯 말했다.

“몸이 회복되면 내게로 와.”

마왕은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내가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입가를 올린다.

“너무 늦지 말도록.”

“…….”

“오래 기다리는 건 질색이니까.”

마왕은 웃는 표정으로 입술을 가까이 했다.

“읏…….”

입술을 뜯듯이 깊이 키스하며 파고드는 그 때문에 난감한 신음을 흘려야 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 키스는 약속의 증표일까? 아니면 네 현실을 자각하라는 충고의 또 다른 표현일까. 무엇이 됐든 비린 맛이 느껴지자 머리가 더욱 어지럽다. 비린 맛은 피 맛이었다.

“우읏…….”

내 입 안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겹치며 숨을 빼앗아 가는 그 때문에 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의식이 흐려진다. 다시 깨어났을 때,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느새 입술을 뗀 마왕의 눈동자가 보였다.

“…….”

붉은 눈. 나는 저 붉은 눈을 거부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럼.”

그리고 아론을 위해 그 붉은 눈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 보지.”

나는 마왕이 사라지고 난 뒤 시야에 들어오는 이를 보았다. 아론이었다. 아론은 정확히 내 쪽으로 고개를 쳐든 상태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아론의 표정에는 다급함과 절망, 의문과 당혹, 분노와 질투가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마, 말레드레드…….”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은 쓰러지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나 잠을 잤던 걸까. 중간에 깼을 때, 하얀 신복을 입은 사제가 보였다. 그녀의 옷에는 금실로 수놓은 황제의 인장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높은 신분의 사제 같았다. 그녀는 인자한 눈빛으로 몸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목이 아팠고 정신이 몽롱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제는 대답 없는 나를 대신하여 한동안 어지러울 거라고 말했다.

“마기가 깊게 침투했기 때문에 한동안 병상에 누워서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조금만 늦었어도 위대한 엘크리찬의 품으로 갔을 겁니다.”

고개를 돌리자 넓은 창이 보인다. 깨끗한 커튼이 살짝 열린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이 어쩐지 낯설었다. 높은 건물과 깨끗한 주택가. 성처럼 보이는 형상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설명이 따라왔다.

“황성이에요. 여기서 멀지 않죠.”

황성……? 내가 언제 수도까지 왔단 말인가? 나는 국경 근처인 헤르간에 있었다. 헤르간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을 했었는데……. 당황스러움에 눈동자를 굴리자 사제가 인자하게 웃었다.

“치료는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나는 가슴이 섬찟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기절하기 전 상황을 떠올려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방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기사나 사제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호, 혹시…….”

목소리가 갈라진다. 메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며 나는 그의 이름을 말했다.

“아, 아론나이드 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휘관께서 다행히 어제 기운을 차리셔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셨거든요. 엊저녁에 가셨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하실 말씀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그녀는 잔잔한 어조로 대답하며 내 목 위로 손을 올렸다.

“읏…….”

“아프세요?”

“아니, 눈이 부셔…….”

환한 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밝다. 그녀는 분명히 치료 사제였다. 황성 근처에서 폐하의 명을 받는 사제라니, 얼마나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일까? 40대로 보이는 그녀는, 강한 신성력을 내뿜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는 듯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말에 힘의 세기를 조금 줄인 그녀는 이내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7일간은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성대가 망가질 수도 있거든요.”

“……헤, 헤르간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 에레나의 목이 마왕의 손에 날아가고 아론이 바닥에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나를 도와주었던 고아 소녀와 남은 기사들, 그리고 괴생명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질문에 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조금 놀란 것처럼도 보였고 안쓰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으며,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차가운 빛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대답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설명은 몸이 좀 더 회복되신 후에 듣는 게 좋겠어요.”

“하, 하지만…….”

“지금은 괜히 더 심란하기만 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내 이마에 손을 댄 순간 뜨거움이 확 퍼져 나가며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다시 자는 거예요. 지금은 쉬는 게 좋으니까요.”

“아…….”

세상이 까매진다. 나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목이 마른 것을 느꼈다. 팔을 뻗자 탁자가 느껴지고 그 위에 올려진 쟁반이 잡힌다. 물병은 은제 식기로 된 것이었다. 흔한 치료소에서 볼 수 없는 물건. 나는 간신히 허리에 힘을 주고 팔로 몸을 일으켰다.

“욱…….”

목이 욱신거려 온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팔을 움직였다. 간신히 물병을 잡았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만 물병을 놓치고야 말았다.

쨍그랑.

고요한 가운데 그 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곧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아직 소녀에 가까운 사제였다. 그녀는 깨어난 나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다시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대사제님-!”

대사제……? 황성 근처 신전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릴 사람은 5명도 안 될 것이다. 지난번 나를 상대했던 여인이 얼마나 고위 간부인지 알 만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커튼은 저번과 달리 굳게 닫혀 있었다. 방 안은 벽에 걸린 등잔불로 은은하게 밝았고 은근하게 풍겨 오는 냄새에는 수면에 좋은 약초 냄새가 가득해, 나는 지금이 늦은 시간대라고 추리했다.

“일어나셨군요.”

곧 저번에 봤던 40대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반듯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꾸민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녀는 탁자 위의 등잔불을 조금 더 환하게 밝히면서 내 상태를 살폈다.

“목은 어떠세요?”

“물이…….”

나는 최대한 또렷하게 말하려 애썼다.

“마시고 싶어요.”

“곧 가져오도록 하죠.”

그녀가 문을 바라보자 대기하고 있던 소녀 사제가 눈을 반짝 뜨며 다시 달려 나갔다. 요란하게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교육 중이라,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을 회복하는 동안 충실한 성실한 조력자가 될 거예요.”

“…….”

몸을 회복하는 동안이라니. 얼마나 더 이곳에 있어야 할까. 일반 사제라면 대사제가 치료하는 치료소에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불편하고 불길한 생각들이 번져 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밖에 없었다. 그 냉철하고 냉담한 황제가 나를 이곳으로 부른 연유는 아론 때문이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 그녀에게 있어 나는 특이한 사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어쩌면 조금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호의를 베풀 만큼 흥미로운 존재는 아니다. 그런 그녀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를 살려야 하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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