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왕이시여, 아직 제 계획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이 도시에 있는 사제들만 제거하면 제 계획은 여전히 실행 가능합니다.”
“마물을 이용해, 인간들을 변화시켜 저들끼리 자멸하게 만든다는 계획 말인가?”
에레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인간계는 손쉽게 우리 손에 들어올 겁니다! 피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인간들, 파괴되고 무너진 신성 제국을 발아래 둘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지지 않습니까?”
에레나는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황홀한 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사제 따윈 생각도 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는 늘 목표가 분명했지.”
마왕은 그녀를 보며 운을 떼었다.
“나와는 분명 다른 마왕이 될 거야. 자네는 인간들에게 삶이란 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마계에서 태어난 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억울하다는 듯이 에레나가 외쳤다. 자신의 맘을 알아 주지 않는 임을 향해 외치듯 에레나는 절규를 이어 나갔다.
“우리는 저들을 증오해야 합니다. 저들을 파괴하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당할 테니까요!”
에레나는 인간들이 동족을 상대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는 듯이 외쳤다.
“그들은 우리를 고문하고 해부하고 심지어 그 시체로 다른 동족들을 불러내 불태웠습니다! 신성력이 거룩하다는 주장 아래, 우리의 마기를 도구 취급해 저들의 동력원으로도 쓰려고 했고요! 우리가 약해지면 저들은 바로 저렇게 틈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오로지 더한 죽음만이 그에 합당한 대가일 겁니다! 선제적 공격을 통해 저들의 야망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마왕은 조용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그대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대가 가진 성향이나 계획도 그렇기에 지켜본 것이다. 이것은 차기 마왕으로 선택된 그대의 숙명일 테니. 하지만.”
마왕의 눈빛이 진해졌다.
“단 하나의 경고는 했을 텐데. 이 연약하면서도 성가신 사제에 대해서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쾅 하며 주위가 울렸다. 힘이 없어서 소리 난 곳을 돌아볼 수도 없다. 눈동자만 돌리자 창백하게 굳어진 아론이 보인다. 아론은 대검에서 솟아오른 신성력을 이용해 마왕이 만든 마기의 파동을 깨려 애쓰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둘러 내리칠 때마다 마기가 요란하게 진동했고, 사방으로 열기가 뻗쳐 나왔지만 아론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짙은 황금빛 눈동자 속에 마왕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마왕은 그런 그를 빤히 보고는 다시 에레나에게 말했다.
“그녀에겐 손댈 수 없어.”
“왕이시여!”
“나를 수없이 부르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마왕은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마기가 내 목에서 흐르는 피를 감싼다. 치료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에레나의 마기가 더 깊이 침투하는 걸 막아 주었다. 내가 느슨해진 숨을 내쉬자, 에레나가 분하다는 듯이 잇소리를 냈다. 당장이라도 마왕을 향해 달려들 것 같지만 왕이라는 계급은 절대적인지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쾅-.
그때 강한 공격이 마기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번 공격은 충격이 심했는지 마왕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찌푸려졌다. 마왕은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는 아론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굉장한 증오군.”
“죽이겠습니다.”
에레나가 다른 곳으로 분노를 토해 내겠다는 듯이 씹어 뱉었다. 마왕은 건조하게 말했다.
“좋을 대로.”
“……!”
놀란 것은 나였다. 흠칫하며 눈빛을 굳혔을 때 에레나는 마왕의 마기를 빠져나가 아론에게 달려들었다. 신성력과 마기의 충돌. 나이트 갤더가 차마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그 충돌은 격렬해 보였다. 나는 아론이 몇 번이고 마기에 긁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마왕이 그런 내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아직은 그가 에레나를 이길 정도는 아니야.”
“다, 당신…….”
“오랜만에 나를 불러 주는군.”
마왕이 손을 뻗었다. 그의 길고 차가운 손가락은 땀과 피로 얼룩진 내 볼을 쓸며 한기를 안겨주었다. 몸을 부르르 떨자 마왕의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무섭나? 그대 떨고 있군.”
마왕은 아론을 잠깐 보았다.
“그가 죽을까 봐 두려운가?”
“왜, 왜…….”
나는 그에게 물어야 했다.
“당신이 여, 여기 있죠……?”
“그대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마왕은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파르르 목숨이 바스러지는 경계에 선 내가.
“말했다시피 나는 아직 그대와의 유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대가 살아 있어야만 하지.”
마왕은 차가워졌을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주위에서 귀가 멍해질 만큼 소음이 진동했지만 마왕은 그런 것과는 다른 세계에 있다는 듯이 태연해 보였다.
“나, 나는…….”
마왕을 보았다. 지하 세계의 매력적인 왕. 어둠과 파괴를 녹여 낸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을.
“이, 이제 당신과…….”
아름다운 그. 여전히 단단한 몸과 커다란 성기가 기억난다. 얼마나 황홀하고 기분 좋은 절륜함과 음탕함이 공존했던가. 아직도 그와의 배덕한 정사를 생각하면 배 속이 뜨거워지며 아래가 자극받는 기분이다.
“하, 함께하지…… 않을 거예요.”
나의 숨겨진 욕망을 채워 주었던 그. 하지만 이제 그것은 끝이다. 나는 죽기 전에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어째서?”
마왕은 조용히 물었다. 건조한 어조만으로는 그는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나와 계약하면 그대는 영원히 살 수 있다. 내게 종속되기만 하면 이런 고통 따윈 순식간에 사라지지. 인간이라는 것만 포기하면 돼.”
마왕은 한층 더 깊은 어조로 말했다.
“인간임을 포기하더라도 그대의 외모나 성격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그대는 그대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대에게 그런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일 텐데?”
나를 달래며 어르는 그. 그가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니, 이 순간이라면 오히려 괜찮은, 최고의 제안일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몸에서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의식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어릿거리는 정신 속에서 나는 옛날을 떠올렸다. 커다란 황금빛 눈을 한 소년이 지나가고, 매서웠던 백작 부인의 얼굴이 사라지면 젖은 몸으로 욕실에 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내가 뼛속까지 나다운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에서 나라는 인간이, 나라는 존재가 완성되었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모순과 모호함, 욕망이었지만 그런 부분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다운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가장 기본 바탕이 아니었던가. 누군가는 별거 아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나에게는 이것이 살아가는 힘이자 생존하는 이유였다. 내가 나다울 것.
나는 눈을 떴다.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할 수 없는 상대, 마왕이 그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난…….”
“그래.”
“인간이에요. 어리석고 제멋대로인 인간…….”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몸이 정상이라면 입가를 끌어 웃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상태에선 눈가만 찡그린 채로 말을 잇는 것이 다였다.
“그러니까 이대로 죽겠어요. 끄, 끝까지 인간 사제로 살겠어요.”
“흠…….”
마왕은 입을 다물며 말이 없었다. 그도 내가 이 순간 거짓을 고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죽어 가는 이 순간에 진실만을 외치리라는 것을. 마왕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변화 없는 그의 핏빛 눈동자에는 어쩐지 차가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자신의 의지대로 따라 주지 않아서일까. 어찌 됐든,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걱정되는 게 있다면 저 밖의 누군가 때문일 것이다. 아론……. 그가 에레나에게 당하면 어떡하지?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분노와 증오로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빛을 흐리는데, 밖에서 충격파가 거세게 전해졌다. 마왕은 그쪽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는 죽을 거야.”
“……!”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에레나의 손에 몸이 반으로 갈리겠지.”
마왕은 아론이 에레나의 마기에 칭칭 감겨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그를 도와야 한다. 에레나를 어떻게든 저지해야 한다! 그런 각오로 손발을 움직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왕은 그런 나를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안 하나 할까?”
“……?”
“그대가 내게로 자진해서 온다면 그의 목숨을 살려 주지.”
“무, 무슨…….”
“빨리 결정해야 해.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나는 아론을 쳐다보았다. 에레나가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는지 그녀의 마기를 푸는 게 어려워 보였다. 입술에선 붉은 피가 흐르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는 그럼에도 저항하고 있었다. 에레나를 죽이고, 나를 구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을 빛내면서.
그 생명을 태우는 열정이 너무나 눈부셔서 나는 말을 잃었다. 마왕을 보자 그가 미소 지었다. 차갑고 냉담한 미소는 절망의 계약을 권유하는 지하 세계의 절대자라고 할 만했다.
“어찌할 텐가?”
“아…….”
“그를 택하겠나, 인간임을 택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