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어……?”
암울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상하다 생각할 때 잿빛으로 변한 하늘에서 마기가 벼락처럼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쾅-!
마기는 대지를 찢는 소리를 내며 지상을 강타했다. 공기를 뒤흔드는 열기가 확 번져 나가고 코를 먹먹하게 하는 탄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마기는 소환사와 성기사들을 직격했다.
“아아악-!”
비명과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강력한 마기인지, 정통으로 맞은 자는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쓸려가 버렸다. 이 당혹스러운 공격에 얼이 빠져 나는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어둠 속의 소용돌이에 누군가 공중에 떠 있었다.
‘에, 에레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엄청났다. 분노한 것을 보여 주듯 수십 갈래로 뻗어 나온 사나운 마기가 사제들을 찢어 버렸고, 흰빛을 뭉개 버렸다.
“위험해요!”
그때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굵직한 마기가 있었다. 아론은 정면으로 막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나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쿵-!
“읏…….”
아론의 갑옷에 턱을 부딪친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고 말았다. 주위에서 여전히 공기를 찢는 파괴음이 귀를 멍하게 만들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떴다.
“아…….”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검은 연기가 맵싸하게 올라왔다. 나는 소환사들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 검게 흩날리는 가루만이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거북함이 속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아론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신중해져 있었다. 검으로 땅을 짚은 채 몸을 일으킨 그는 공포와 절망에 굳어 버린 나를 보면서 강한 목소리로 한 차례 속삭였다.
“신성력으로 몸을 방어하며 피해 있어요.”
“하, 하지만…….”
나는 에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닌 검은 공포. 인간계를 없애 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평정심을 좀먹는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아론을 보았다. 저건 성기사 한 명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괜찮을 거예요.”
아론은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방심하면 안 돼.”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마왕 다음으로 강력한 그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꼈을 테지만 불길한 느낌이 그의 팔을 붙들게 한다. 아론은 나를 천천히 보고는 미소 지었다.
“돌아올게요, 꼭.”
아론은 몸을 돌렸다. 에레나를 향해 뒤늦게 공격하는 사제들을 따라서 아론의 거대한 흰 빛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 빛은 마치 절망을 공격하는 별빛처럼 아름다웠고 웅장했다. 거대한 신성력이 강타하자 에레나의 기운이 흔들렸다. 에레나는 충격으로 가득한 몸을 부르르 떨면서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좌우에서 거대한 차원의 문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속속들이 빠져나오는 것은 마물이었다. 마족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마기를 뿜는 마물들은 이미 흥분한 상태로 에레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파괴해 버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흘러나왔을 법한 소리는 마물들의 기폭제가 되었다. 마물들은 쿵쿵, 땅을 울리면서 하나둘 떨어졌고 이윽고 살아 있는 사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후퇴해! 후퇴해-!”
찢어질 듯한 외침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지팡이를 꽉 붙든 채로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느꼈다. 암흑에 휩싸인 하늘, 천지를 울리는 마물들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눈을 깜박였다. 나는 어느새 신성하게 타오르는 빛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가 무사한지, 다치지 않았는지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면서.
아론은 신성력을 빠르게 던졌다. 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흰 빛들이 연달아 에레나를 강타하자 에레나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가 아론을 향해서 마기를 쏟아부으려는 찰나 아론만큼 강한 신성력이 에레나의 등을 공격했다.
나이트 갤더. 그는 에레나를 향해서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에레나는 그의 등장을 보고선 땅으로 내려와 양손에서 두꺼운 무기를 꺼냈다.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는 채찍은 그녀가 휘두를 때마다 뱀의 혓바닥처럼 갤더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갤더는 신성력으로 방어하면서 반격을 가했고, 아론은 그를 도와주면서 에레나의 뒤를 공략했다.
그들의 공격은 강력했고, 에레나는 타격을 입은 듯이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었다.
“어쩔 수 없군. 수하들을 불러야겠어.”
에레나가 중얼거리며 한 손을 번쩍 들자 그 위쪽으로 거대한 회오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마족을 소환하는 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론과 나의 거리는 멀지 않다. 내 힘으로 차원의 문을 없애는 건 불가능했지만 방해는 할 수 있었다. 나는 지팡이를 꽉 쥔 채로, 집중했다.
마음속의 신념, 이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은 거창한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한 소녀가 보였던 미소를 지키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 사제로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몸에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힘을 느낀 순간 심장이 뻐근해졌고 혈관을 타고 번지는 더운 피를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에레나가 만드는 회오리가 헝클어지는 모양이 보였다.
“아니…….”
에레나는 그 현상에 당황한 것처럼 머뭇거리더니 곧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한 아론과 갤더로 인해 땅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처박혀야 했다. 아론은 그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의 검이 에레나의 목 뒤를 정확하게 찌르며 들어가려는 순간, 에레나가 사라졌다.
“큭!”
“넌 줄 알았지.”
갑자기 공간에서 하얀 손이 팍 튀어나와 내 목을 비틀자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팡이를 쥔 채로 에레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버둥거렸다. 에레나는 흙이 묻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눈동자에 가득한 증오가 그녀라는 존재를 증명한다. 너를 해치기 위해 내가 살아 있다는 듯이. 에레나는 비틀린 목소리로 손톱을 세우며 말했다.
“이런 순간에 꼭 나를 방해한단 말이야. 정말 눈엣가시처럼 성가셔.”
“끄읏, 읏…….”
“이런 연약한 목 따윈 한번에 비틀어 버리면 살과 근육이 그대로 찢어져 붉은 피를 뿜어낼 텐데. 왜 널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어째서?”
에레나는 원한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흡사 달콤하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 톤은 그러나 짙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귀까지 따가운 느낌을 받으며 눈을 흐릿하게 떴다.
“네, 네 계획은 실패야…….”
“그래?”
“우, 우리는 자멸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인간다움을 저버리지 않는다. 설사 어느 순간 그걸 잊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늘 후회와 반성을 하며 실수를 만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에레나를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너, 넌…… 너희 세계로 꺼져.”
“뭐?”
내 말이 의외였는지 에레나가 눈을 쫑긋하게 떴다. 곧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진 인간 여자 같으니라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에레나의 손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물의 손처럼 삐죽하게 자라난 갈퀴가 목의 피부를 찢는 순간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벌리며 빠져나가는 숨을 느꼈다.
“아…….”
“죽어.”
에레나는 속삭였다. 응집된 질투와 분노, 살기와 저주가 그 안에 있었다.
“그냥 죽어 버려.”
에레나는 미친 것처럼 말을 반복했다.
“죽어, 죽어, 죽어 버리라고!”
이제는 왕의 명령이고 뭐고 없다. 나는 죽어 가는 찰나에도 손에 힘을 모았다. 아마도 이게 내가 낼 수 있는 마지막 힘이 될 것이다. 온기를 담은 이 아름다운 빛이 그녀의 몸에 작은 부담이라도 주길 바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사제로서 죽고 싶었다.
흐릿해진 시야,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눈이 부신 흰 빛이 보인다. 아름답고 웅장한 힘. 거대한 신성력을 품은 힘은 곧장 에레나의 뒤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피잉.
힘의 파장은 귀를 울리며 시야부터 멀게 했다. 분명 아론의 힘이 에레나에게 충돌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튕겨 나가는 것일까. 나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힘이 없었고 몸이 늘어졌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죽은 걸까. 그 생각을 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에레나.”
마왕. 그의 낮고 건조한 톤은 멀어진 의식 속에서도 분명하게 들릴 만큼 존재감이 있었다.
“와, 왕이시여-!”
에레나의 억울하면서도 애처로운 외침이 이어졌다. 마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왠지 내게 닿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목을 옥죄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여전히 그녀를 미워하는군.”
“그녀 때문이에요! 제 계획이 틀어진 건 그 사제 때문이라고요!”
에레나는 커다랗게 외쳤다. 그녀가 외칠 때마다 마기의 바람이 몸을 찔러 댔다. 고통스러웠으나 어느 순간 몸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슬며시 눈이 떠지자 나는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마기를 느꼈다. 마왕의 마기. 마왕은 나를 잠깐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녀는 참으로 곤란한 사제야. 나도 잘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