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으음.”
“갤더 경의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적을 상대로 방심하면 역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말죠. 굳이 저들을 적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철저하게 조사를 통해서 그들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
갤더는 말없이 아론을 쳐다보았다.
“……좋아.”
그는 고민 끝에 말했다. 울고 있는 성기사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복잡하면서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모두 잡아가는 걸로 하지.”
아론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성기사들은 머뭇거렸으나 곧 검을 내린 채로 괴생명체와 어린애들을 분류해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소녀에게 다가가 신성력을 뿜어 주었다.
“……따, 따뜻, 해요.”
소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입가를 올린 채 날 바라보는 모습이 가슴이 시큰했다. 간단한 온기가 큰 위로가 됐던 걸까. 소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그 기운을 느끼는 듯하더니 이내 힘을 얻은 듯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물러나시죠.”
기사가 다가와 소녀를 다른 괴생명체들 무리로 데려갔다. 나는 소녀가 멀어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런 불안한 나를 위로하듯이 소녀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우리도 나가죠.”
아론이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가득한 입구로 향하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기사들은 사람들과 괴생명체를 데리고 먼저 나간 상태라 아론과 나의 발걸음 소리만이 동굴 안을 울리는 전부였다.
“……아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편을 들어줘서 고마워.”
“…….”
“나이트 앞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아론은 멈칫했다. 고개를 뒤로 돌린 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떨려 나오려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저들을 살릴 수 없었을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때마침 공 마물로 기사가 변화하며 제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 것뿐입니다.”
차가움이 실린 목소리. 아론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실제 살아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상부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좋지 않은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으니까요.”
몰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내 시선은 어느새 어두운 아론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기쁠 뿐이야.”
“…….”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인가, 사실 두려웠거든.”
무서운 건 마족의 등장이 아니다. 마족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혼자만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그게 무서웠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건,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거니까. 나는 아론을 보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혼자가 아니라서 안도했어.”
“왜 그런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전 무조건 말레드레드의 편일 텐데 말이죠.”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아론은 내 반응에 쓰게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그의 뒷머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왠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전 말레드레드의 편입니다. 그 판단에 선악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설 방향만 존재할 뿐.”
“…….”
“얼른 나가죠.”
“어, 어, 응…….”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툭 말하고는 나가는 아론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론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공정한 기사는 어째서 저렇게 담담하게 남의 가슴을 쥐었다가 펴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기분이었다.
나를 선악으로 보지 않는 그. 그의 세계에선 나는 방향일 뿐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어쩐지 눈가가 젖는 기분에 괜히 눈을 꼭 감아 보고는 동굴을 걸어 나왔다.
밖에서는 갤더가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그의 새로운 지시를 듣고 놀란 듯이 되물었다.
“괴생명체 몰살 작전을 취소하라고요? 지, 진심이십니까?”
“내가 말을 두 번 반복할 거 같나?”
“아, 알겠습니다.”
갤더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다. 수하에게 지시하면서도 그는 아론을 의미심장하게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아론은 그 눈길을 모른 척, 기사들에게 생존자와 괴생명체를 분리하여 숙소를 제공할 것을 명했다.
그 뒤 빠르게 헤르간의 도시는 정리되었다. 괴생명체를 죽이지 않자, 도망가다가 잡힌 괴생명체들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그들도 성기사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꼈는지 대체로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공 마물은 몹시 위험하니까 보는 즉시 없애도록.”
아론은 도시를 순찰하는 기사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기사들은 명심하겠다며 말을 타고 남은 마물을 처리하러 다녔다. 도시 전체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꼼꼼한 조사가 이어지고, 발견된 공 마물은 그 즉시 처리되었다. 곳곳에서 번쩍이는 빛과 소환사들의 소환 능력이 발현되는 걸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더 큰 피해는 없어야 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갔지만, 살아남은 자들과 변해 버린 자들, 그리고 다른 도시를 위해서라도 사제들의 역할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아론의 힘은 워낙 강대했기 때문에 나와 짝을 이룰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굳이 내가 가는 길에 따라왔다. 내가 신성력을 작은 구슬 형태로 분산해 사방에 뿌리면 숨어 있던 공 마물이 화들짝 놀라 도망가고, 그것을 본 아론이 신성력 맺힌 검을 휘두른다. 그러면 공 마물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차원의 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몇 번 아론과 함께 공 마물을 처리하고는 절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왜 그렇게 그를 상부에서 예뻐하는지 알겠다. 시원시원하게 마물을 처리하는 솜씨가 일품이라서 그렇겠지.
“어어, 자네는…….”
돌아다니다가 아까 나를 끌고 소환사 일을 시켰던 자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멈칫했다. 내 뒤에 선 아론의 눈치를 잠깐 살피는가 싶더니 곧 어색하게 웃었다.
“말레드레드군. 그 유명한.”
“……괴생명체를 찾고 계신 거예요?”
“어. 모두 잡아서 다른 곳으로 피난시키란 명이 떨어져서 말이지.”
그는 지팡이를 둥글게 휘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신호를 따라서 다른 소환사들도 지팡이를 휘둘렀고 긴 신성력이 그물처럼 엉킨 채 뻗어 나왔다. 신성력을 응용한 형태로 목표 대상을 잠깐이나마 억류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그물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도망치던 인영에게 던지더니, 인영이 멈춰서 발광하자 얼른 신성력을 쏟아냈다. 이윽고 괴생명체가 신성력의 과도한 기운에 기절하고 말자, 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러났다.
“죽이는 것보다 신성력을 더 쓰게 되지만.”
그는 천천히 말했다.
“피를 흘리지 않는 건 좋은 일이군.”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마음이 조금 놓이는 걸 느꼈다. 적어도 인간이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은 막고 있지 않은가. 아까 동굴 안에서 무모했던 용기가 빛을 발한 것이다. 에레나를 완전히 저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 헤르간에 사악한 의도를 떨치려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소환사는 이윽고 발견한 작은 공 마물을 향해서는 사나운 신성력을 뿜어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놈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짜증 난다는 듯이 공격하는 소환사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작은 만큼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면서 수는 엄청나게 많다. 특히나 작정하게 기사나 소환사에게 달려들면 막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 마물이 점점 늘어나자 소환사와 그의 동료들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어, 이거 너무 많은데……?”
까만 벌레처럼 몰려드는 공 마물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겁에 질리려는 순간, 갑자기 흰 빛이 뒤에서 솟구쳤다.
“물러나세요.”
아론의 말이 끝나자 소환사들이 재빨리 앞을 터 주었다. 아론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검을 대각선으로 교차해서 그었다. 그러자 흰빛이 좌우로 뻗어 나가며 굉장한 파동을 만들었다. 그 파동에 닿은 것들은 모두 소멸 했고, 공 마물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시야는 깨끗해졌다. 소환사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굉장해…….”
다시 말하지만 아론의 실력은 두말할 게 없다. 검을 다시 차분하게 내리는 그를 보면서 나는 감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순수하게 경이롭다는 칭찬의 미소를 활짝 보내자 아론이 멈칫했다가 곤란하다는 듯이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
아론은 곧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 미소는 저를 위한 거지요?”
“어, 어?”
“좋아요. 이 전장에서 계속 보고 싶은 유일한 미소예요.”
“아론…….”
소환사들이 숨을 죽인 채로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게 보인다. 아론이 나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이미 여기 온 사제단이 다 알고 있지만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얼마나 심각하고 내밀한지는 추측만 하고 있을 터였다.
“아론, 좀 떨어져…….”
“왜요, 새삼스러울 게 있나요?”
누가 얘 좀 말려 줘. 절제 있는 동작으로 상황에 안 맞는 도발을 하는 남자는 그 유명한 아론나이드다. 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만 독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아, 아론.”
“세상 사람들 모두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의 희고 긴 손가락에 엉기는 머리카락은 다름 아닌 내 머리칼이었다. 아론은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데도 대범한 동작으로 내 귀 뒤로 천천히 머리를 넘겨 주고는 그제야 내 앞에서 떨어졌다.
“공 마물을 마저 처리하러 갈까요?”
별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툭 던지는 그의 말이 오히려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한다.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어떤 각오인지 이런 순간에 더욱 깨닫고 마는 것이다. 내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고 함께 가자는 그를 보며,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함께한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잘 처리하고 오게.”
소환사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막 발을 뗄 무렵, 나는 문득 시선을 돌리다가 회색으로 변한 하늘을 발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