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안내하게.”
아론의 칼 같은 대꾸에 부관이 머뭇거리더니 곧 앞장섰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곳곳에 널려 있는 마물의 시체를 발견했다. 마물의 것은 깨끗하게 제거해야 했기 때문에 사제들이 흰빛을 번쩍이며 정화 작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간혹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아직 죽지 못한 마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학-!”
그리고 들려오는 비명. 그 소리는 마물의 것과는 달랐다. 괴생명체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칼에 쓰러진 괴생명체의 시체가 보인다. 한둘이 아니었다. 수북이 쌓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로 스며드는 광경이 놀라울 정도로 서늘하다.
나는 시체로 가득한 대지에서 성긴 눈을 떼었다. 부관은 작은 둔덕을 지나자 가슴이 처참하게 파여 있는 시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주변에는 까마귀들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난 지역. 널찍한 공터에 놓인 시체는 마치 재앙의 조각상처럼 정갈했다.
부관은 손으로 까마귀들을 쫓으면서 설명했다.
“얼굴과 가슴이 심하게 훼손됐지만 사제복을 보건대 헤르간의 정식 사제가 맞습니다.”
아론은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역겨울 만큼 끔찍한 시체였지만 아론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욱하는 구역감이 올라와서 잠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아론은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내가 괜찮다고 소리 없이 입을 움직이자 그제야 다시 부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족은?”
“없었습니다. 모든 장소를 뒤져 보았지만 사제를 공격한 마족도, 잡아 놓았다는 마족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러 신성력을 뿌려 자극하듯이 찾았는데도 말이죠.”
아론은 잠시 내 손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앉아 시체를 면밀하게 본 그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거 같군. 우리 사제들에게 보란 듯이 말이야.”
가슴뼈가 드러날 만큼 파헤쳐진 가슴은 악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이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는 듯이.
“마족이 인간을 죽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굳이 이렇게 죽이는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는 거겠지.”
아론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 인간 모두를 끔찍하게 죽이고 말겠다는.”
“그, 그럼 마족들이 떼로 몰려온다는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조금 당황했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론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경고의 의미니까 추후 공격이 있을 수도 있어. 근데 아까 나를 부른 사람은 갤더 경 같았는데.”
우리가 정사를 나누고 있을 때 부른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말하나 보다.
“아, 예! 나이트 갤더 경께서 도시 내부를 순찰하고 계십니다. 남아 있는 괴생명체를 일망타진하겠다고 하셔서요.”
아론은 알겠다며 나를 돌아보았다.
“갤더 경에게 가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과 헤어져 우리는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전투는 마무리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소환사들이 지팡이를 쥔 채로 대지를 정화하는 작업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나는 아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까 그 사제, 마족을 잡아서 고문하고 있었어.”
“압니다.”
아론은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는 우리가 타고 갈 말의 고삐를 챙기고 있었다. 아론은 말발굽을 바닥에 딱딱거리는 말을 진정시키려는 듯, 등을 쓸어 주면서 말했다.
“연락을 받았습니다. 마족을 고문하여 좋은 정보를 알아내고 있다고요. 그러나 그 뒤 소식이 끊겨서 의아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상부에서 시킨 일이 아니야?”
“상부에서 구체적으로 지시한 적은 없어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요.”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굳건한 금빛 눈동자는 그러나 밝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마족을 상대로 승리하려면 그들을 뼛속까지 아는 것도 필요해서, 고문이나 해부도 묵시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니까요.”
아론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동해서라도요.”
“아론…….”
나는 그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나처럼 그도 수단과 방법에는 기준과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상대를 이기는 방법은 사실 다양하다. 어떤 승리는 희생을 필요로 하고, 어떤 승리는 잔혹함과 야만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때에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제라면, 신을 뜻을 받들어 인간을 보호하는 사제라면 더더욱 인간성에 근접한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가슴이 이상한 감정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멋대로, 나태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내게 경종을 울리는 이 이상한 감정은 내가 사제를 벗어나 살 수 없다는 한 가닥의 계시 같은 깨달음이었다.
“난…….”
아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고문 받던 마족이 떠오른다. 그가 본대의 대장님과 성기사단장을 죽이고 나서 에레나라는 이름을 거론했었다. 결국 인간이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에레나의 큰 뜻을 이룰 거라고 자신 있게 외치면서.
“헤르간의 사제를 죽이고 마족을 데려간 사람이 에레나라고 생각해.”
“에레나. 그 강력한 여자 마족이요?”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나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가 차기 마왕이 된다는 생각이 내 몸과 마음에 돌덩이처럼 부담감을 안긴다. 아마도 내가 마왕과 관계를 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내게 뚜렷한 분노를 쏟아내는 것만큼 내가 그녀에게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느껴서일까.
나는 강조했다.
“그녀가 자신의 수하를 찾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사제를 그렇게 해한 사람도 에레나일 거야. 자신이 하지 않았더라도 부하를 시켜서라도 했겠지.”
“그녀가 두렵습니까?”
아론은 뜻밖에 그런 질문을 했다. 내 얼굴과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 그녀는 그저 싸우려는 게 아니야. 인간을 파멸시키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어. 결국 우리가 자멸하고 말 거라고 외치면서.”
“틀린 말은 아니군요.”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아론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서. 아론은 잠시 나를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르간 도시는 죽음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는 아론의 눈동자는 무겁고 어두웠다.
“사제들 사이에서도 늘 불화와 분란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본성에는 투쟁과 분노가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
“그래서 미움과 질투가 늘 따라오고요, 못된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지요.”
아론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잠깐이지만 그가 나를 쳐다봤을 때 어딘가 후회와 미안함을 담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이내 더 짙고 강렬한 감정이 빗발쳤다.
“누군가를 얻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되고요.”
이상한 느낌이다. 아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아론이 더욱 순수해 보일까. 늘 원하는 게 명확했던 그라서,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난 이제 정말 잘 모르겠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싫다고 해도, 도망쳐도 늘 이 상태로 돌아오니까……. 아론의 화만 돋우는 것 같고…….”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론은 말이 없었다. 나는 허탈하게 말했다.
“사제로서도, 여자로서도, 이젠 헷갈려.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답을 모르는 거예요?”
아론은 작게 물었다. 눈빛은 뜨거웠다.
“그 답은…….”
아론은 얼굴을 살짝 숙여 대답했다.
“제가 줄 수 없어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길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지만.”
아론은 살짝 눈꺼풀을 늘어뜨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처절할 정도로 일렁거렸다. 슬퍼 보일 정도로.
“그 대답은 말레드레드가 찾아야 해요. 그게 중요해요.”
“하, 하지만 아론은…….”
여태 나를 구속하며 독점하려 하지 않았나, 항의하고 싶었다. 아론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 말레드레드를 쫓을 거예요. 어딜 가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너무나 담백한 어조여서 그 말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이.
“그러니 그동안 절 떨칠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아론이 말을 마치고 입술을 다물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론은 내게 답을 찾을 정신적 여유를 주되, 물리적으로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건가?
“아론, 지금 내 상태는 너만 생각할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난 마왕과…….”
아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질 찰나, 부관이 급하게 들어왔다.
“지휘관님! 기사들이 도시 외곽 산 중턱에서 괴생명체의 은신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아론은 바로 말에 올라탔다. 나를 뒤로 올려 태운 그가 부관에게 서둘러 말했다.
“앞장서게.”
말은 빠르게 도시를 달렸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도시의 지형은 말이 시원하게 달리기 좋지 않아 아론은 고삐를 잡아 장애물이나 계단을 뛰어넘어야 했다. 부관이 말한 은신처에 도착하자 커다란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 뒤에는 회색 돌이 있었고 얼핏 보면 지나칠 만한 동굴의 입구도 보였다. 수색하고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아론의 등장을 반겼다.
“오셨습니까?”
“그래. 안쪽에 몇 명이나 있지?”
“대략 2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수색 기사들이 대답했을 때 부관이 맞은 편을 보며 외쳤다.
“저쪽에 갤더 경께서도 오시는군요!”
갤더 경. 그는 듬직하고 우람한 덩치의 소유자였다. 말이 힘들어 보일 정도로 무거운 갑옷을 챙겨 입은 사내는 나이트답게 화려한 망토를 등에 걸고 있었다. 그는 아론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올렸다.
“나보다 빠르다니. 몸이 가벼워서 그런가? 젊어서 그런가?”
특유의 유쾌함과 털털함,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잔인함이 느껴진다.
“아니면 뒤의 여자 때문?”
그는 뒤에 탄 나를 보더니 실실 웃었다. 왠지 몸이 오싹거리는 미소였다. 내가 몸을 움츠렸을 때 그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찾고 있던 소환사를 찾았나 보군. 그렇게 그 여자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더니만, 딱 옆에 데리고 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