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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63화 (163/220)

163화

그러자 소년은 손으로 무언가를 먹는 시늉을 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소년의 목에 난 긴 상처를 확인한 나는 얼른 다시 물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간 거야?”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올까.”

그러자 소년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 모양을 만들었다. ‘곧’이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주위에는 더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니 오늘은 소녀가 음식을 구해 오는 날이라는 것 같았다.

기다리면 오겠지. 그때 출발하자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동이 틀 무렵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 너머 붉은 태양이 무섭게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도 당황한 것 같았고 아이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지체할 수 없어.’

금세라도 소탕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아이들이 여기 있으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오지 않을 곳으로 몸을 숨길 장소가 있을까?”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쪽의 아이들까지 훑어본 뒤 말했다.

“그럼 친구들과 가서 숨어 있어. 하루 동안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거야.”

짐과 먹을 것을 챙기라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가져갈 것을 싸는 동안 소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판잣집과 번갈아 보면서.

“소녀는 내가 찾아볼게.”

안다, 얼마나 소녀가 걱정되는지. 나는 소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소년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이끌어 가면서도 소년의 눈은 판잣집을 몇 번이나 향했다. 걱정과 불안을 쉽게 떨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망토를 깊게 눌러 썼다. 소녀가 먹을 것을 구하러 어디로 갔을까. 가장 좋은 예측은 시장이었다. 그곳에는 늘 먹을 것이 있었고 운이 좋다면 버려졌지만 상태가 괜찮은 음식을 구할 수 있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조용하다 못해 정적이 내린 도시로 들어섰다. 어디를 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개와 고양이만이 나를 놀라게 한 전부였다.

나는 시장으로 달렸다.

‘어딨지?’

그러나 시장은 오늘 아예 열리지 않는 것인지, 모든 가게가 두꺼운 판자로 닫혀 있었다. 창문까지 꼼꼼하게 못질하여 막아 버린 모습에서 나는 다급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낮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소녀가 음식을 구할 만한 곳을 생각하는데, 희미하게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진동은 점차 거세졌다. 담벼락이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그늘에 몸을 낮췄고, 곧 지나가는 기마 부대를 발견했다. 그들은 투구까지 갖춰 쓴 중무장 상태였다.

“……!”

무시무시한 기세. 곧 전차가 뒤따르고 거기에 실린 살상 무기와 그물을 보자 머릿속이 창백해졌다.

‘시간이 없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든 도시를 돌아다녀 소녀를 찾아볼 생각으로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화구 형태로 생긴 계단식 도시는 그러나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올랐고, 나는 얼마 못 가서 높은 돌벽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돌려야 했다.

쾅.

무언가 터진 것처럼 큰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아래로 돌리자 기사들이 허름한 창고를 부수는 게 보였다. 그들은 투석기를 이용해 커다란 돌을 안 쓰는 창고에 던져 넣었고, 벽이 완전히 날아가자 그곳에 창을 던져 넣었다.

괴생명체들이 튀어나왔다. 숨어 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랐는지 사방으로 도망 다녔다.

“한 놈도 빠짐없이!”

기사단장의 살벌한 외침이 이어졌다.

“처단하라!”

기사단장의 창이 괴생명체 하나의 목을 꿰뚫는다. 울컥, 병든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절대 살려 두지 마라!”

가시 그물이 도망가던 작은 괴생명체에게 던져졌다. 가시는 피부를 찢었고, 괴생명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비명도 없어졌다. 기사의 검 하나가 그 등을 찌른 것이다.

“죽여-!”

생의 종말을 알리는 외침. 칼과 창이 번쩍거리자 수십 명의 괴생명체들이 죽어 나갔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던 괴생명체들도 붙잡혀 참혹하게 도륙되었다. 보고 있노라면, 누가 악한지 모를 정도로 잔인하게.

“…….”

외형이 변해 버린 생명체들.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흉측한 몰골이란 것을 안다. 그들이 살고자 우리 음식을 약탈해 가는 것도, 그걸 마냥 두고 보기엔 위협적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저들이 저토록 잔인하게 도살될 필요가 있을까? 방어하지 않고 도망가는 존재들이 말이다.

“…….”

나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것은 허무를 가져왔고 씁쓸함을 동반했으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자아냈다. 마물과 마족을 기꺼이 처단했던 나이지만, 괴생명체의 죽음에는 이토록 연민과 안쓰러움을 느끼다니.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같은 전사인 기사들이 잔인하게 생명을 도륙하는 모습을 보아서일까.

“…….”

어느 쪽이든 이 광경에 흡족해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담벼락에 기대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살피면서. 그때 나는 저 멀리 담벼락에 붙어 있는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괴생명체……!’

공격을 피해 도망친 것인지 괴생명체 다리에는 굵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괴생명체는 끙끙거리며 다리를 옮기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해서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눈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공포는 익히 알 수 있을 만큼 친숙했다.

살려 달라는 바람,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 나는 멈칫했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허, 허어…….”

그는 두려운지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직 인간의 손 같은 거뭇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지지대가 되지 못하는 흙은 그를 도울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발 근처로 다가갔고 그의 다리에 붙어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설마…….”

공 마물? 언젠가 없앴던 작고 동그란 형태의 마물이다. 마기가 느껴지자 나는 서둘러 지팡이를 꺼냈다. 신성력을 발휘했지만 그 전에 공 마물은 괴생명체의 다리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크흑, 허억-!”

마물이 스며들자 괴생명체는 입을 벌린 채 몸을 떨었다. 입은 괴이하게 찢어졌고 녹색 침은 어둡게 변색됐다. 피부는 더욱 까매졌으며 갑각류처럼 딱딱해지기까지 했다. 발톱은 짐승처럼 자라났고, 목에는 보이지 않는 껍질이 덮어졌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변화는 끔찍했다.

‘특이한 물질로 변화시켰다고 하더니, 그게 공 마물이었어?’

지난번 공 마물을 잡을 때,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공 마물은 공격력이 높지 않지만 환경을 오염시켜 골칫덩어리였다. 나무와 풀, 땅들에 물들어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성력을 쏟아부었던가. 본대의 사제들이 거의 전부 동원되다시피 했었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괴생명체의 변화도 신성력을 통해 되돌려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지팡이에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신성력이 닿자 괴생명체는 끄악, 끄악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발…….”

돌아와 줘. 나는 애타게 바랐다. 하나 변화는 없었다. 다리에 꽂혀 있는 화살의 상처가 치료될 뿐이었다. 침을 흘리며 발광하던 괴생명체는 다리가 나아진 것을 느꼈는지, 도마뱀의 갈퀴처럼 변한 손으로 화살을 잡아 뺐다.

“카악!”

잠시 고통스러워하던 괴생명체는 이내 내 쪽으로 팔을 거세게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방어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괴생명체는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의 정적! 그의 이질적인 눈에는 갈등의 감정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고 내 지팡이를 보더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숲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멀어지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달려가는 그의 등에 무언가 와서 박히자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커다란 창이었다. 창에는 쇠가시가 박혀 있었고, 살과 근육을 찢으며 박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났으나 기사가 와서 창 하나를 목 뒤에 찔러 넣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 있었군요.”

나는 굳어진 채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밝아진 태양 아래, 기사단장의 어두운 그림자가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순간 오한이 느껴졌다.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기사단장은 얼굴에 녹색 덩어리와 빨간 핏자국을 묻히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쪽으로 기사들이 괴생명체들의 시체와 더불어 주민의 시체도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는지 기사단장이 말했다.

“아, 저들이요? 변절자죠. 괴생명체에게 호의를 베풀어 먹을 것을 준 주민들이요.”

“…….”

“사악한 것들에게 동정을 베풀면 이 도시는 금세 어둠으로 물들 겁니다. 사제니까 잘 아시겠죠.”

기사단장은 입가를 올렸다. 전혀 웃지 않는 눈빛 때문인지 섬뜩한 미소였다. 그는 곧 나를 끌고 가라고 두 기사에게 지시했다. 나는 내 팔을 억세게 잡는 기사의 팔을 쳐내면서 단장에게 말했다.

“마물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방금도 괴생명체에게 흡수해서 몸을 변화시켜…….”

“마물이요?”

기사단장이 눈썹을 힐끗 올렸다.

“돌아다닌다면 제가 알았겠죠. 혹시 겁에 질려 잘못 본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똑똑히 보았어요!”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강하게 대답했다. 기사단장의 눈빛은 그러나 한없이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믿기 어렵군요. 갑자기 마물이 괴생명체에게 흡수되었다는 것도요. 하긴 사악한 무리에게 사악한 힘이 깃든 게 뭐 별거겠습니까.”

“제 말은 마물이 괴생명체를 변화시켰다는 거예요, 공 마물이 더 있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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