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기사는 나를 바라보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나는 측은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더했다.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사는 다른 기사에게 나를 잘 데리고 있으라고 눈짓으로 표현하고는 저편 건물로 달려갔다. 나는 슬며시 내 허리춤에 있는 지팡이를 잡았다. 그리고 기운을 모아 나를 붙들고 있는 기사에게 신성력을 쏘아 보냈다.
윽. 그가 짧은 신음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신성력은 공격 형태로 맞으면 충격을 선사한다. 이런 걸 맞을 줄 몰랐는지 놀란 눈으로 바닥에 쓰러지려는 그를 서둘러 붙잡았다. 그리고 머리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바닥에 눕혀 주며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
“조금 있으면 회복될 테니까.”
나는 말을 줄였다. 도망가려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가 눈을 감는 것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더는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 없었다. 사람과 변화한 사람이 서로를 죽이려는 일에 내가 더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력한 사제였다. 내가 느낄 고통과 절망에 대해 먼저 생각할 뿐이었다. 일개 사제로서 내가 할 일은 모두 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저 멀리 산 너머에 있었다. 헤르간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간다면 나를 어지럽히는 고통도 죄책감도 사라질 거라 믿으면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기사 가득한 주둔지를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다니는 기사들은 홀로 다니는 사제인 나를 힐끔거리며 의아하게 응시했다. 시선을 끌면 잡힐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얼른 천막 뒤편의 그림자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물을 뜨러 간 기사와 다른 기사들이 나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나가지?’
나는 주둔지 전체에 팽배한 살기를 느꼈다. 천막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주둔지는 그 주변에 설치된 날카로운 철책으로 외부와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나간다면 문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신분이 증명된 이들만 나갈 수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무언가를 잔뜩 싣고 다니는 수레를 발견했다. 검이나 그물, 물병을 싣고 있는 수레들은 제법 수월하게 주둔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수레에 몸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천막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걸었다. 살금살금 걸어 나가자 수레들이 잔뜩 세워진 커다란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주둔지에 오래전부터 자리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허름한 그곳은 뜻밖에 창을 열자 벽돌로 지어진 내부가 보였다.
‘일부러 이렇게 지은 건가?’
외관으로 봐서는 안쪽이 이렇게 깨끗할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가 창틀에 손을 올렸다. 안쪽으로 조심스레 들어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나는 얼른 수레 뒤쪽에 몸을 숨겼다.
“……어떻게 되어 가지?”
“저항이 심합니다. 강한 신성력으로 묶어 두었지만 발광하고 있고요.”
“흠. 사제들이 오기 전에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네. 하지만 살려 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고위 마족이니 실험을 통해서 알아낼 정보들이 남다르겠죠.”
“그럼 저항하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잘라 주도록 해. 그 정도는 사제단도 눈감아 줄 테니까.”
이 목소리는 기사단장……? 나는 그가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인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기사단장으로 추정되는 갑옷 입은 남자가 보였고, 그 앞에 작은 체구의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멈칫했다. 지금 대화를 보건대 고위 마족을 그가 붙잡아 두고 있다는 건데? 뭐 때문에……?
“알겠습니다. 마족이 살아 있어야 그의 힘을 빼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강대한 힘을 갖는다면 우린 더욱 강해질 겁니다.”
사제의 눈이 힘을 향한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떤 존재도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요.”
“잘 알고 있는 거 같군. 그럼 수고하게.”
“알겠습니다. 근데 지금 밖이 소란스러운 거 같은데 괜찮나요? 벌써 소탕 작전이 시작된 겁니까.”
“아니. 붙잡아 둔 사제가 도망쳐서. 찾느라고 시끄러운 것뿐이야.”
“아. 고위 마족하고 함께 발견된 사제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그 소환사 말이군요. 흠, 그녀는 어쩐 일인지 상부에서도 무척 관심을 가지더군요. 반드시 잡으셔야 할 겁니다.”
“알겠네. 자네는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마족 관리나 잘 하게.”
“그러도록 하지요.”
곧 기사단장이 걸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는 그가 나간 뒤에야 몸을 돌려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에 장식된 촛대를 옆으로 꺾자 벽이 올라가며 통로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팔팔한 마족이군.”
사제는 흥얼거리듯 중얼거리고는 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나가고 나서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가야지…….”
한편으로 마음이 심란하다. 마족이라면 무조건 죽이는 게 답이 아니었던가. 목숨을 부지시켜 그의 힘을 빼낼 연구를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강해진다면, 그것은 잘된 일일까. 사제가 마계의 힘으로 강해진다는 것은 어쩐지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도 인간들처럼 실험을 한다. 이 세계를 쉽게 얻기 위해서.’
마왕의 말이 그저 나온 게 아니었다는 건가. 나는 그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면서 수레 안쪽에 누웠다. 그리고 어깨에 걸쳐진 망토를 몸 위에 올렸다. 잠시 기다리자 물건을 빼내야 한다면서 기사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이건 마을 중앙으로 옮겨. 괴생명체를 엮을 사슬들이니까.”
“알겠습니다.”
덜컹거리며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마차가 밖으로 나갈 때를 노렸다. 그리고 마차가 주둔지를 벗어나는 게 느껴지자 몸을 일으켰다. 누가 볼세라 숲으로 달려나가며.
“……하아, 하아.”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목까지 차오르자 나는 나무에 기대 숨을 골라야 했다. 이마 옆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비오타로 밤에 가는 건 위험하다고 했으니, 머물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관에는 갈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장소는 틀림없이 경비병이나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
고민하던 나는 땟자국이 가득했던 소녀를 떠올렸다. 하루 정도는 머무를 수 있겠지. 나는 주춤거리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시의 저녁은 평소보다 더욱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내일 아침, 괴생명체를 소탕한다는 소문이 번지기라도 했는지 밤의 거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건물 벽에 애써 숨을 필요도 없었다. 돌아다니고 있는 자는 기사들뿐이었고, 횃불이 보인다 싶으면 몸을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소녀가 있던 외진 절벽으로 향했고,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하루 머물 수 있을까?”
“지저분한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도 몸이 지쳐 있었다. 하도 달리고 뛰었기 때문일까. 잡힐까 두려움에 떨었던 탓일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올라서 몸을 떨자 소녀가 갈대 잎사귀 모은 것을 건네주었다.
“몸에 두르면 따뜻해요.”
“고마워.”
나는 애써 입가를 끌어 올렸다. 소녀는 내 미소에 머뭇머뭇 어색한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내게 물었다.
“내일 비오타로 가실 거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궁금해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데요?”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없어서 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망울에 너무 허망한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멋쩍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아. 그렇군요. 어쩐지 멋지네요.”
소녀는 차가운 온도에 손을 호호 불며 대답했다. 허름한 옷차림이 몹시도 썰렁해 보였다. 나는 얼른 망토를 소녀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그렇게 반반씩 덮자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저 더러운데…….”
“나도 안 씻은 지 좀 됐어.”
소녀는 내 말에 살짝 웃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멀리 우리를 보고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과 눈이 부딪쳤다. 그들의 모습과 처지를 보니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
“있잖아. 내일은 이곳에 있으면 안 돼. 아침부터 말이야.”
“어, 어째서요?”
소녀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내일 아침에 많은 기사들이 이곳을 들락날락할 거야. 대대적으로 소탕 작전이 있거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기를 피해 있는 게 좋겠어.”
“치, 친구들에게 말해야겠네요.”
“응.”
나는 꼭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곧 판잣집을 떠나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는 소녀를 보니 어쩐지 옛 생각이 난다. 그 어린 시절, 차별과 박해가 익숙했던 그 소녀 시절에 위로가 되던 누군가가 나 역시 있었다. 그 소년이 나만 바라보던 그 시절이 참 좋았는데……. 괜히 커 버린 그의 모습까지 생각나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잠이 설핏 들어 버리고 말았다. 눈을 깬 것은 찬 바람이 살갗을 떠미는 느낌이 나서다. 소녀는 옆자리에 없었다. 벌써 일어나 나간 것일까. 나는 칼날 같은 바람이 판자 사이로 불어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주는 암담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사방은 고요하다 못해 정적이었다. 바람만이 휭 쓸고 가는 소리가 절벽에서 비명처럼 희미하게 울릴 때, 나는 소년 하나가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나와 함께 있던 소녀가 어디 간 줄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