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61화 (161/220)

161화

기사단장은 팔을 내밀었다. 나를 직접 안내하겠다는 의도였다.

“불편하시겠지만 사제단이 도착할 때까지 저희가 정한 숙소에서 쉬고 있으셔야 합니다.”

친절한 태도였지만 어딘가 거슬리는 불편감이 있었다.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데 혼자 살아남은 나를 석연치 않게 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그의 형식적인 친절에 넘어가지 않았다.

“전, 기절해 있던 터라 이 사건에 대해 더는 아는 게 없어요. 지금 기사단장님이 보고 계신 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 가겠어요. 감사하지만 제공해 주신 숙소에 가만히 머무를 순 없습니다.”

내가 가려던 순간 안내하려던 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기사단장의 눈빛은 매우 차갑게 변해 있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상부의 명령을 따르셔야죠. 지금은 비상 사태입니다. 도시 전체에 괴생명체들이 들끓고, 그 와중에 마족이 나타나 사제단을 전멸시켰습니다. 이런 시기에 혼자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전체를 위험하게 하는 아주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검이 달린 허리를 눈짓한다. 그의 의도는 명확했다. 검을 꺼내서라도 내 갈 길을 막겠다는 의사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살벌한 분위기의 기사단까지. 그들을 모두 제치고 갈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더분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니 기다려야겠네요.”

방에 도착해서 빠져나갈 기회를 엿봐야겠다.

“안내 감사합니다.”

기사단장은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나를 곱지 않은 눈초리로 힐끗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가면서 나는 몰려온 기사의 숫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족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 모든 도시의 병력을 끌고 온 것일까. 괴생명체가 들끓다 보니, 어쩌면 마족 출현이라는 것에 더 과민반응했을 수도 있다. 나는 기사들이 머무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언제 그분들이 오실까요.”

“내일 점심 즈음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누가 오는지는…….”

“모릅니다. 저희도 갈 거라는 연락만 받았습니다.”

기사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나는 방문을 닫으면서 기사들이 내 방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생존자를 위한 처사가 아니다. 마치 죄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

‘어떡해야 하지?’

나는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비비자 차가운 체온이 물씬 손가락을 감아 온다. 아까 야외에서 옷이 벗겨진 탓일까. 어쩌면 이 사태에 대해 절망적인 심정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도망쳐도 될까? 마왕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내가, 이대로 도망쳐 버리면 이 도시 헤르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세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의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결국 세상이 멸망의 가도를 걷게 된다면, 나는 향후 이 도시를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을까?

“…….”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도망쳐야 한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올라왔다가도 슬며시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이대로 더 여기에 머물면,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무섭다니, 대체 나는 무엇이 무서운 걸까. 이미 마왕에게선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도망친다면 그건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

바로 아론나이드, 치열하고 고집스러운 눈을 가진 금발의 기사 때문에.

나는 아론을 떠올리자 생각이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방을 둘러보았다. 쓸 만한 종이와 펜을 서랍에서 찾자 앉아서 글을 적기 시작했다. 누가 오더라도 나 대신 이 종이가 괴생명체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나는 마왕에게 들었던 것을 뭉뚱그려 적었다. 마족이 조사단에게 말하던 것을 운 좋게 들었다고 그럴싸한 상황 설정도 지어냈다. 마족이 이 헤르간에서 다른 마족과 실험을 하던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하면서, 지금 나타나는 괴생명체들은 모두 인간으로,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기대하며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마족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설사 누가 와서 의구심을 갖더라도 일단 조사는 해 보지 않겠냐고 생각하면서.

종이를 접어 책상에 반듯하게 놓은 나는 창문으로 기사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먼지가 끼인 창문에는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기사들은 어디서 오는지 점점 그 수가 늘어났고, 분위기도 덩달아 심각해지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준다고 기사들이 문을 열었을 때, 서둘러 물었다.

“무슨 일이죠? 기사들이 많아지는데.”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겁니다. 마족이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위 마족이 죽었기 때문에 다른 마족이 흥분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나 문제는 저들이 일반 기사라는 데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의 말에 허점을 짚었다.

“하지만 저들은 일반 기사잖아요? 성기사가 아닌데…….”

무엇으로 마족을 상대할 수 있겠냐며 되묻자 기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런 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전 목격자지만 죄수는 아니에요. 엄연히 상황을 알 필요가 있어요.”

나는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전 그냥 사제도 아니에요. 소환사죠. 마족과 마물을 상대하는 전투 사제. 제 직업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자 기사의 딱딱한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는 당황했는지 조금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사단장님께서 당신과 쓸데없는 대화는 일체 삼가라 하셔서요. 아무튼, 안전을 위한 겁니다. 인근 도시에서까지 기사들이 파견되어서 우리 도시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죠.”

“지켜요? 무엇으로부터요?”

의아하다는 내 질문에 기사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대답했다.

“괴생명체요. 그 사악하고 잔인한 것들을 모두 죽이려고요.”

“……!”

“내일 아침 소탕 작업이 있을 겁니다. 사제들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 놓으려고 하고 있죠.”

“아…….”

“그럼 얌전히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 기사는 문을 닫으려 했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기사단장님을 뵙고 싶어요!”

“네?”

“한시라도 빨리요!”

나는 다급한 심정이었다. 이것은 내 도망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무슨 일로 절 보고자 하셨습니까.”

기사단장은 다른 기사들과 작전을 짜는 천막에 있었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 잠깐 주눅 들었지만, 얼른 그를 보며 말했다.

“마족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괴생명체들과 관련해서요.”

“아까 기절해서 들은 이야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사단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기절한 건 맞아요. 하지만 기절하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까는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기억이 안 났는데 쉬다 보니 기억이 선명해져서요. 빨리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그렇습니까.”

기사단장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였지만 내 말을 들어 보자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서둘러 편지에 적었던 내용을 그에게 말했다. 괴생명체가 인간이며, 마족들의 실험으로 변한 것임을. 그들은 아직도 이 도시 어딘가에서 실험을 계속하며 인간이 인간을 죽이길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놀란 표정의 기사들을 둘러보고, 침묵하고 있는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마족들은 우리가 괴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처단하는 것이니까요.”

“괴생명체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있습니까?”

기사단장이 물었다. 나는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법은 말하지 않았어요. 마계의 물질, 특정한 마물로 인간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했지만요…….”

“그렇다면 달라질 건 없군요.”

기사단장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설사 예전엔 인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아닌 사악한 존재들.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단지 살려고 물건을 훔치는 건데…….”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어떤 회복이나 구원의 노력 없이 무작정 죽여 버리는 건…….”

“이상적인 말은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괴생명체가 우리의 식량을 훔치는 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식량 창고를 약탈하면 우리에게 남은 건 굶주림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악보다 가장 치명적인 악입니다.”

기사단장은 딱 잘라 말하고는 주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내일 오전에 도시 전체를 봉쇄하고 일망타진에 들어간다. 인간이 아닌 자는 한 명도 남김없이 말살해 버리는 거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외침이 귀를 때려 왔다. 나는 약간 질린 채로 서 있었다. 기사단장은 그런 나를 보면서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그대의 처우는 제가 아니라 같은 사제가 결정할 테니까요.”

기사단장은 은연히 경고했다.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제 눈만 아니라 그들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살아난 것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고급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도요.”

“…….”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가 보십시오.”

나는 내쫓기다시피 천막을 나와야 했다. 끌려가다시피 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철 그물에 가시를 박아 넣는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살생을 위한 무기 손질. 한편으로 몇 수레 가득히 쌓여 있는 시체 자루를 보자 왠지 섬뜩해진다. 얼마나 더 죽일 것인가. 얼마나 괴생명체를 없애고 불태울 것인가.

그리고 그게 과연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인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가치의 저울 앞에 선 기분이다. 머리가 어질거리자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얼른 팔을 부축하려 했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젓고는 그에게 말했다.

“차가운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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