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런 관계 설정도 나름 신선하다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마왕이었다.
“읏……!”
뜨겁고 끈끈한 혀가 살결을 휩쓴다. 나는 마왕을 밀쳐 내려 했다. 그러나 밀어내면 더 짓궂게 달라붙는 흡혈 벌레처럼 마왕은 치사하게 나왔다. 나는 무의미한 저항을 그만두기로 했다.
“뭐지?”
“당신을 막을 수 없단 걸 알아요.”
나는 마왕의 붉은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가져요.”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어차피 당신은 그런 존재니.”
“건방진 소리를 한다고 내가 멈출 줄 아나?”
마왕은 비웃듯이 입가를 틀어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춤을 건드리자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이곳은 야외. 개방된 장소다. 설마 했지만 마왕은 내 옷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의 마기를 따라서 사라지는 비단이 눈앞에 아스라한 잔상처럼 흩어졌다.
“봐, 그대가 누구고, 내가 누군지.”
마왕의 뜨거운 눈길이 닿는다.
“우리는 그저 유희를 원하는 존재일 뿐이다.”
마왕의 입술이 부딪쳐 오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뜨거운 혀에 엉켜 있는 그의 숨결이 낯설고 탐욕적이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내 안을 휩쓸고 더 나아가 내 깊숙한 구멍까지 점령하겠단 것처럼 뿌리 깊이 넣어졌다.
“으, 읍…….”
괴로움에 눈을 뜨자 마왕의 가늘게 변한 눈과 부딪친다. 마왕은 내 괴로운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누가 사악한 종족 아니랄까 봐.
“욕망이란 강물 같은 거야.”
마왕은 입술을 떼고 조금씩 헐떡거리기 시작한 내 귀에 속삭였다. 목소리는 물결을 스치고 올라가는 작은 물고기들처럼 잔잔했다.
“늘 우리 아래 흐르고 있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가며.”
“아, 아…….”
“우리를 지배해.”
그의 손이 스며든다. 가슴을 부여잡는 손길에는 거역할 수 없는 열기가 있었다. 그 열기가 내 몸속으로 독처럼 퍼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간신히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웃고 있었다.
“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알 거야. 그대의 몸은 이런 내게 순수하게 반응해 오니까.”
그가 훑는 손길. 내 깊숙한 안쪽을 부드럽게 쓸어 오는 자극적인 행동에 실제로 몸은 절로 떨려 왔다. 눈앞이 순간 어릿거리고 마음속의 욕망이 꽃을 피우며 커진다. 나는 내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인정해.”
마왕은 매혹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자신이 이런 존재란 걸.”
그의 공격은 가히 가공할 만했다. 나는 앞섬이 완전히 벗겨져 그의 입술에 농락당할 때까지도 피어오르는 열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쾌락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내는 내 몸의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읏…….”
긴장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가슴의 돌기를 핥는다. 뜨거운 혀로 살살 빠는 감촉에 나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질렀다. 정신을 놓고 금방이라도 그에게 다리를 벌리고 어서 들어오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다. 이 눅눅하고 촉촉한 감촉. 숨결에 달라붙는 더운 정욕이 어찌나 좋은지.
나는 중독자가 된 것처럼 좋아하던 감각을 떠올렸다. 내가 그에게 다리를 벌렸던 이유. 이율배반적이고 타락한 정사가 얼마나 좋았는지 생각나자 눈앞이 어둑해진다. 밑바닥의 욕망이 서서히 일어나 나를 덮어 간다. 나는 그 기분에 충실하고 싶었다.
도망치던 기간이 얼마였던가. 마음 졸이며 불안해 떨던 시간. 이 아늑하게 신경을 녹여 버리는 감각들 사이에서 나는 그 불안에 떨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본능에 충실하려던 순간,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시체들. 방금 전까지 나와 같이 살아 있던 자들. 그들이 입은 갑옷이 붉게 젖어 있는 것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왜 그러지?”
마왕은 내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갑자기 어깨를 떨며 눈을 불안하게 뜨자 마왕은 그쪽을 보지 말란 듯이 내 고개를 돌렸다.
“불행해지려고 하지 마.”
마왕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약하고 나태한 나를 꿰뚫는 말이었다. 실은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죽은 그들에게 내가 해 줄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그저 내 마음의 안도를 위해서 그들을 묻어 주고, 축복을 내려 주는 것 외엔 할 게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붉은 피가 흙 사이로 스며드는 모습은 기괴했다.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을 누르며 동정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하지 않아요.”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귀에 의사를 밝혔다.
“당신에게 끌리지 않는다고요.”
“…….”
마왕이 심히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마왕은 빠르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마기가 거대한 원을 형성하며 날아온 무언가를 튕겨 냈다.
“마족이다! 공격해!”
그들은 성기사가 아니었다. 일반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마족이 있을 줄 몰랐는지 무척 당황해서 뿔나팔을 불고 있었다. 거대한 소리가 계곡을 울리며 번져 나가자 마왕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귀찮게 됐는데.”
그의 손에는 이글거리는 마기가 가득했다. 마왕의 힘.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들에게 쏟아지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려치기 전에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
마왕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러난 가슴을 자신의 살결에 비빈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는 의미다. 나는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을 기약하죠.”
“……그 말은 이제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마왕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를 보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숨죽인 목소리는 불만이 가득했다.
“의미 없잖아요.”
당신이 또 나를 찾을 테니까. 내 감춘 뒷말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왕은 웃었다.
“그래, 의미 없지. 역시 똑똑해. 만약 그대가 나를 찾지 않았다면.”
마왕은 검은색 회오리에 발부터 휘감기기 시작했다. 마기에 점점 감싸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인간계의 도시 하나를 부술까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마왕은 짓궂게 웃었다.
“그럼 조만간 또 보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마기도 깔끔하게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없어졌는데, 그가 룬으로 감쌌던 마족만은 툭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얼른 남은 옷을 추키며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듯했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왕은 어째서 그를 데려가지 않은 걸까. 그의 애완동물이라던 룬은 사라졌지만, 인간계에 남아 있는 마족을 복잡한 눈으로 보던 나는 다가온 경비병을 보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그는 몹시 놀란 눈이었다. 쓰러진 사제들과 마족을 번갈아 보는 그는 내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했다.
“바, 방금까지 마족이 있었는데…….”
경비병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훑었다. 그는 내 행색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것도, 내 얼굴에 야릇한 홍조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왠지 사실을 알기에는 두려운 듯한 그를 보면서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마족이 조사단을…….”
쓰러진 대장님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죽였어요. 제가 발견했지만 구하지 못했고요.”
“저, 저 마족이 말입니까? 사제님께서는 같은 조사단이 아니신 겁니까? 그런데 어떻게 멀쩡하신지…….”
경비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도시의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그의 뒤로는 중장갑 차림의 병사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긴장된 분위기, 곧 마족과 싸우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읽자 그들이 얼마나 마족을 무서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기사단장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고 고갯짓을 해서 누군가가 내 초라한 옷차림 위에 망토를 덮어 주게 했다. 나는 엄격한 표정의 그를 보면서 대충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곳에 올랐다가 조사단을 보았고, 뭐라 하기 전에 마족의 공격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왜 이곳에 올랐는지에 대해선 돈주머니를 잃어버려 경비병들이 수색했다는 곳을 찾으려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기사단장은 여관 주인을 통해서 진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에게 피해를 입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운이 좋으셨군요. 매우 강력한 마족인데.”
운이 좋은 게 아니다. 더 강한 마족을 알고 있어서 살아남았을 뿐.
“신전에 연락해 두었습니다. 마족을 잡았다고 했으니 곧 사제단이 도착할 겁니다.”
“전…….”
그들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 나는 고개를 들며 가 보겠다고 하려 했으나 기사단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그는 엄격한 눈빛이었다.
“신전에서 분명하게 답이 왔습니다. 누가 됐든 살아남은 사제가 있다면 마땅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