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하루만 묵고 싶어요. 나머지는 돈으로 받아 두고요.”
“흠. 보통 말을 사진 않는데, 사정이 안타깝기도 하고, 말도 상태가 좋아 보이니까. 그렇게 합시다.”
여관 주인은 말을 바꿀까 동전 열 개를 얼른 내밀었다. 영주의 것이니 좋은 말이란 게 분명해 아까웠지만, 어차피 산을 타면 끌고 갈 수가 없으니 여기서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동전 열 개를 받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방으로 올라왔다. 방에서는 희미한 풀꽃 냄새가 올라 왔다. 이상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여관 주인이 눈치챘냐는 듯이 설명했다.
“방이 비어 있을 땐 약초나 꽃을 말리기도 해서 냄새가 좀 남아 있어요. 창문을 열고 환기하면 괜찮을 겁니다.”
여관 주인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창문을 젖히자 산 그늘에 반쯤 잠겨 있는 도시가 보인다. 여관은 움푹 파인 주택들 사이에서 높은 지대에 있었고, 따라서 온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주택들을 내려다보았다. 여관 주인은 냄새가 빠져나가면 문을 닫아 놓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사악한 괴물들이 불쑥불쑥 나타나요. 도시 전체를 휘젓고 있으니까, 웬만하면 창문을 닫아 놓고 밖을 내다볼 생각도 하지 말아요. 외출은 당연히 삼가고요.”
여관 주인은 건조하게 경고하고는 방을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경비대를 순탄하게 지나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니 바깥을 보고 있을 찰나, 나는 한 무리의 경비병들이 무언가를 잡아서 창으로 때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괴생명체였다. 지나가던 주민들은 그 모습에 놀라서 뒤로 물러났고, 근처에 있던 집들은 창문과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경비병 하나가 외쳤다.
“이 사악한 괴물!”
퍽, 퍽 때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몸을 떨던 괴생명체가 축 늘어지자 경비병들은 그를 자루에 넣어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문득 호기심이 든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들을 뒤따랐다.
망토에서 흘러나온 진액이 뚝뚝 바닥에 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나는 따라서 거리를 두고, 그 진액이 떨어진 흔적을 따라서 경비병들을 뒤쫓을 수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움푹 파인 지대로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과 내리막길을 지날 때마다 꿈틀거리는 괴생명체가 무거운지 그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오래지 않아 절벽처럼 떨어지는 언덕에 이르자 그들은 멈춰서서 자루를 던졌다.
“……!”
자루는 곧 퍽, 커다란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부딪혔다. 경비병들이 손을 털며 사라지자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리고 말을 잃고 말았다.
“…….”
아래에는 수백 개의 자루들이 던져져 있었다. 뾰족한 바위 위에 수없이 내던져진 자루들은 마치 시체처럼 참혹했다. 검게 그을려 있는 것을 보건대 불을 질렀던 흔적 같았다. 자루가 쌓이면 불을 지르는 것을 반복해 온 것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자루 사이로 회색 재가 휘날렸고, 나는 눈을 찡그린 채로 그 바람을 피해야 했다.
새로 던져진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가득한 자루의 바다. 그걸 보면서 과연 괴생명체들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나타나서 인간들과 싸우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 가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아, 아가씨……?”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도시에 도착했을 때 심부름을 하겠다던 소녀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소녀를 보며 당황하자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팔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살아?”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집은 집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여러 판자를 뭉쳐 놓은 더미 아래였다. 판자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돌과 부서진 나무 기둥이었는데, 거센 바람이 불거나 비가 몰아치면 영락없이 흘러내릴 모양새였다. 내가 굳어져 보고 있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 여기는 경비병들만 오는데…….”
“자주 오니?”
“네, 하루에도 몇 번씩요. 괴물들이 많이 나타나거든요…….”
“여기, 혼자 살면 무섭지 않아?”
내 질문에 소녀는 멈칫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친구들도 있어서…….”
친구란 같은 처지의 소년 소녀들을 말했다. 나는 멀리서 나를 훔쳐보는 시선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말이야…….”
소녀의 딱한 처지. 경비병들이 괴생명체들을 버리고 가는 곳에 어린 아이들이 산다는 것이 마음에 못내 걸렸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비대까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그, 비, 비오타로 가시려고요?”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뒤의 친구를 보며 망설이는 몸짓을 했다.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덧붙였다.
“경비대가 보이는 곳까지만 안내해 주면 돼. 근처까진 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혼자 가기 좀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을 데려와도 돼. 두 명 정도 더.”
“정말요?”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동이 틀 무렵에 떠나려고 하는데 가능하겠니?”
“네! 제, 제가 그럼 묵고 계신 곳으로 찾아갈게요!”
“고마워. 내가 있는 곳은…….”
나는 간략히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소녀의 좋아하는 얼굴, 내가 떠나자 환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왜인지 가슴에 걸리듯이 남아 있었다.
시체 자루들이 가득 쌓여 있는 절벽 골짜기와 그 계곡에서 숨어 살아가는 어린 아이들. 죽음을 의미하는 피폐함과 삶을 상징하는 연약함이 한곳에 가깝게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비오타로 향할 때마다 두려움은 있을망정 마음은 한결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들에게서 멀어질수록 평화가 찾아오고, 나를 옥죄던 관념에서 벗어나 사제로서의 허물도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의 머뭇거림은 발을 옮길 때마다 깊어졌으며 나의 망설임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짙어졌다. 아직 비오타로 완전히 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여관으로 돌아갔을 때,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어, 손님 돌아오셨어요?”
여관 주인이 두 명의 경비병과 함께 나를 맞이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설마 나를 잡으러 온 걸까. 긴장한 채로 허리춤에 있는 지팡이를 잡으려는 찰나 경비병 하나가 무뚝뚝한 눈으로 물었다.
“돈주머니를 강탈당했다고요? 주인 아주머니가 그러더군요.”
“아, 네…….”
나는 여관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까 벽보가 하나 붙었거든요. 경비병들이 도시에서 도둑 하나를 잡았다고요. 그래서 손님 이야기가 생각나서 말했더니 경비병들이 찾아온 거예요. 사실을 확인하러요.”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경비병에게 물었다.
“도둑이 훔친 주머니를 찾은 거예요?”
“아뇨, 도둑만 잡았습니다. 녀석이 말하길 주머니는 따로 위쪽 산에 묻어 놓았다고 하더군요.”
경비병들은 종이를 꺼냈다.
“그래서 피해 액수와 주머니를 먼저 확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돈을 찾게 되면 오해가 없도록요.”
경비병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주머니의 색깔과 액수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여관 주인은 그들에게 들러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됐네요. 이런 시대에 돈이라도 있어야지 든든하지.”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밥을 먹었냐고 물었다. 고개를 젓자 여관 주인은 괜찮은 식당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인심이 흉흉해져 있으니까 여행자라는 것을 되도록 밝히지 말고 조용히 다니는 게 좋을 거예요.”
어조는 무뚝뚝했지만 상당히 친절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여관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망토를 쓰고 지나다니는 나를 힐끔거렸으나 곧 자신들 이야기에 집중했다. 누가 괴생명체 때문에 다쳤고, 얼마큼 식량을 빼앗겼나 하는 것들.
한 명이 침을 바닥으로 뱉으며 말했다.
“경비병들이 아무리 많으면 뭐해? 괴물들이 자꾸만 나타나는데!”
“마물보다 더 사악한 놈들이라니까! 소중하게 모아 놓은 식량들을 싹 다 훔쳐 가니까!”
“진짜 만나면 곡괭이로 내려치고 말 거야! 싹 다 죽여 버릴 거라고!”
그들은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 살기가 고조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움찔했다.
“도대체 사제들은 저 위에서 뭘 하는 거야? 조사만 하면 다인가?”
“어휴, 이렇게 대책이 계속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들고 일어서야지! 영주님의 성에 몰려가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하자고!”
“맞아! 그러자고!”
나는 사람들이 결의하는 것을 들으면서 멈칫했다. 조사라니, 설마 대장님의 조사단이 여기 있는 것일까? 그들의 경로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얼마 전 노트담에서 그들이 왔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가까운 도시인 헤르간에 충분히 있을 만했다.
나는 능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비대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먼저 대장님의 상황을 확인하고 찾아 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고민을 멈추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이라서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을 때, 숲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는 고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
조사단. 괴생명체를 조사하기 위해 떠났던 본대의 사람들이다. 나는 멀리서도 그들의 갑옷과 무기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고, 바닥의 무언가를 둘러싼 채로 멈춰서 있었다. 맨 앞에 있는 자가 대장님 같았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기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이상함을 느낄 때, 나는 그들 뒤로 슬며시 피어오르는 어둠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거뭇한 염색약이 강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암담했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위험해요-!”
소리가 그들에게 닿았다고 느꼈을 무렵, 암담한 기운으로부터 시퍼런 칼이 튀어나왔다. 성기사단장과 성기사들은 당황해서 외쳤다.
“마족의 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