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55화 (155/220)

155화

“네.”

영주는 내가 웃자 기분 좋다는 듯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들었지요, 듣고 말고요. 흥미진진하더군요.”

그의 눈이 파고들 것처럼 빛났다.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높은 사람들에게 몸을 주는 경향이 있다고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 중 가장 확실한 게 몸이 아니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전 그런 면에선 사제님을 완전히 이해합니다.”

“네? 이해라뇨?”

“저도 제 외모에 자신감이 있거든요. 여자들이 열광하면서 달라붙기 때문에 사제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

착각이 심하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눈앞의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취향이 바닥이거나, 눈이 없는 자일 것이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전요, 깨끗한 걸 좋아해요. 뒤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깔끔한 관계요.”

“아, 그렇다면 제가 적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을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분명히 아시겠죠. 상인들의 영주는 뒤끝이 없는 남자라고요.”

뒤끝이 무척 심하게 생겼는데. 나는 영주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무엇이 됐든 영주는 내 반응에 흥얼거리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가 다가오자 천천히 얼굴을 그의 쪽으로 가까이 대는 척했다.

그것만으로도 버겁고 비위가 약해졌다. 그에게서 올라오는 짙은 향수 냄새가 코를 마비시키고 신경을 둔화시킨다. 그는 전투원에게 선천적으로 해가 되는 남자였다. 독한 향기로 감각을 무너뜨리는 파괴자.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영주님.”

“네, 네. 말씀만 하세요.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내 등 뒤로 손을 보냈다. 나는 그 손을 탁 잡으면서 상냥하게 속삭였다.

“제게서 떨어져 주시면 안 되나요?”

“네?”

헤실거리던 얼굴이 굳어졌다. 멈칫한 남자를 보면서 나는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전 영주님에게 조금의 관심도 생기지 않아서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욕적이라는 듯이 빨개진 얼굴을 보면서 나는 도리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읽으실 줄 알았는데요. 제 거부감을요.”

“……!”

“영주님께서는 제 취향이 아니신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저도 상대를 심하게 가려서요.”

“모, 모욕적인 말이군요! 저는 당신에게 과분한 상대이지 결코 부족한 상대가 아닙니다!”

영주는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의 두터운 입술에서 침이 튀어나오는 것에 살짝 고개를 뒤로 빼면서 말했다.

“맞아요. 제게 과분한 분이시죠. 그러니 제가 거절해도 미련이 없으시겠어요. 아쉬울 게 어디 있나요, 저보다 더 좋은 분들을 만나실 텐데요. 그럴 자신이 없으신 건 아니잖아요?”

살살 그의 자존심을 긁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흥분해서 내게 내리라고 외치던가, 이곳에서의 생활이 괴로워질 거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주는 달랐다. 사람을 많이 상대해 봤다던 그는, 자신을 거부하던 여자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는 듯이 갑자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사제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어쩔 수가 없군요.”

울적한 얼굴로 말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손을 모았다. 나는 그가 잠깐 소매 끝을 말아쥐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은 순식간에 내 팔을 꽉 움켜쥐었다.

“무슨-!”

나는 빠르게 반응했다. 전사로서의 내 순발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덩치 큰 영주 또한 기사 훈련을 받았는지 움직임이 빨랐고 악력이 강했다. 무엇보다 그가 소매에서 꺼낸 손이 내 팔에 닿자 갑자기 내 몸에 힘이 빠지며 그에게 저항하려던 기운이 바닥이 되고 말았다.

“……!”

“이건 마족의 물건 중 하나라고 불립니다.”

영주는 비틀거리는 나를 보며 입가를 쭉 올렸다. 흐릿해진 시선 속에서 영주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간신히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면서 쓰러지려는 상체를 붙잡았다. 영주는 제법이라고 말하면서 설명했다.

“경매에 나왔던 걸 샀습니다. 네, 아주 좋은 값에요. 원래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하는데, 영주인 제가 마족의 물건이라고 불리는 속박구를 사면 평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샀던 인물을 죽여서 빼앗았지요. 공짜라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 가격입니까.”

거지 같은 이야기. 끔찍한 고백이 귓속을 파고들어 온다. 나는 몸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발에서부터 천천히 진흙에 빠져들어 가는 기분. 나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 이런 일을 하면…… 후환이 두려울 텐데…….”

“……후후. 이야기야 만들어 내면 되지요.”

영주는 내 턱을 만지다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손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축축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평판이 더러운 여자들에게만 이런 것을 쓰니까요. 그녀들이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제 편을 들 겁니다. 물론 그러기 전에 그녀들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지만요.”

“…….”

“사제님은 어떤 경우가 될까요?”

영주는 벌레처럼 웃으며 내 몸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 순간 내 몸속에 있는 단검이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희한하게도 신품이라는 물건은 이 속박구에 반응한 것처럼 빛을 뿜어냈다. 영주는 갑자기 내 가슴께에서 빛이 뿜어나오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뭐, 뭡니까?”

힘은 쓸 수 없지만 빛은 빠져나온다. 기겁한 영주를 보면서 나는 모든 힘을 끌어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내가 지팡이를 휘두르기 전에 영주가 내 팔목을 강하게 후려쳤고,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문에 처박히고 말았다.

덜컥!

“흐읏-!”

동시에 문이 열리며 은발 머리가 거칠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영주는 잠시 상황을 가늠해 보더니, 내가 여전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저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생각보다 저항을 합니다만, 결국 미약한 사제일 뿐이에요.”

영주는 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가 거칠게 옷을 뜯어내자 실밥이 터져 나가며 감춰 두었던 단검이 드러났다. 영주는 감탄했다.

“호오, 이게 바로 신품인가 보군요! 굉장합니다!”

“비, 비켜……!”

“아직도 말할 힘이 있다니. 신품을 다루는 사제이기 때문일까요? 제 마족의 속박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군요. 저도 신을 믿지만 마족의 물건이 현실에선 더 쓸만하거든요.”

영주는 어둡게 중얼거리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 검으로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두려움이 치밀었다. 하지만 영주는 단지 바깥 풍경을 살펴보더니 때를 기다려 단검을 던져 버렸다.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나자 나도 모르게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어때요? 신품을 잃어버린 벌까지 받으셔야겠지요?”

“윽…….”

“저와 신전에 모두 말이죠.”

영주는 히죽거리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보는 눈은 없었으나 이런 일을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한다는 것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거친 길바닥에 닿자 손끝이 쓸려 나갔으나 그 아픔에 도리어 멍한 기운이 사라졌고, 나는 모래를 쥐어 영주의 눈에 뿌릴 생각을 했다.

“어딜……!”

그러나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면서 영주가 내 목을 움켜쥐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말이 커다랗게 울며 멈춰 선 것이다. 그 충격에 마차는 급하게 정거를 했고, 영주는 벽에 부딪쳤으며 나는 바닥을 구르고야 말았다. 팔이 계단에 찍힌 것처럼 몹시도 아팠다. 시야도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먼저 정신을 차린 영주가 마부를 향해 사납게 외쳤다.

“여기서 왜 갑자기 멈춘 거야? 내가 저택의 별장까지 쉬지 않고 달리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크르크흑!”

그러나 침묵 속에는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동시에 말이 놀라서 뛰는 것처럼 마차가 쿵쿵 흔들렸다. 날뛰는 말들 때문에 마차는 사납게 쿵쾅거리다 이내 조용해졌다. 옷과 머리가 산발이 된 영주는 이내 나를 밀치며 문밖으로 나섰다.

“도대체 무슨…… 어?”

영주의 말은 채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놀란 듯 멈춰선 그를 덮친 생명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흐갸악-!”

영주는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 다녔다. 나는 가만히 눈을 돌렸다. 괴생명체들. 그들은 인적 없는 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습격한다. 나는 얼핏 시야에 다섯 정도 되는 괴생명체들이 영주를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주의 마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혹은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영주는 자신이 가진 액세서리를 던지면서 괴생명체들을 피해 다니려 하고 있었다.

“제 팔에 있는 속박구를…….”

“네?”

영주는 간신히 웅얼거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떼어요…….”

나라면 저 괴생명체를 상대할 수 있다. 영주도 그것을 아는지,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내게 달려왔다.

“윽. 어쩔 수 없군요!”

영주가 내 팔에서 금속체를 떼어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이 돌아왔다. 나는 일어서자마자 영주의 뒤편으로 달려드는 괴생명체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서 빠져나온 빛이 내리꽂히자 괴생명체는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과일과 빵을 들고 있던 다른 괴생명체도 내 지팡이에서 빠져나온 빛이 위협적인 걸 아는지 쳐다보고는 숲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 저 끔찍한 것들이 제 성 근처까지 와 있을 줄이야! 정말 최악이군요!”

영주는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는 습격한 괴생명체가 모두 달아난 걸 보고 내심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저어, 아까 일은…….”

영주는 내 헝클어진 몰골이 신경 쓰였는지 대번에 측은한 표정을 하며 말을 걸었다.

“상호 합의하에 없던 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멈칫했다.

“괴생명체에 습격을 당해서 신품을 잃어버리고, 몸을 다친 거로 하면 제격이니까요?”

“네, 네. 바로 그렇습니다.”

바로 맞장구쳐 오는 그를 보면서 나는 미소 지었다.

“싫어요.”

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에서 커다란 흰빛이 빠져나오자 영주의 몸이 뒤로 붕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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