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레너드가 벌컥 문을 빠져나가고 나자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사제 중 제일 나이 많은 자가 말했다.
“벨에서 기사가 바로 앞에서 죽는 걸 보았다나 봐요. 마침 레너드와 동갑이라고 하던데…….”
그랬기 때문에 더욱 감정이 끓어올랐던 모양이다. 동갑내기 기사의 죽음을 목격했다니. 나는 가만히 나이 든 사제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젊은 때엔 저런 상념에 쉬이 빠져들곤 하지요.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내 책임인 마냥…….”
“…….”
“어쩌겠어요. 시간이 답일 겁니다.”
나는 그 읊조림을 들으며 방 안을 빠져나왔다. 레너드를 찾아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떠나더라도 그가 이 시찰단을 이끌려면, 냉정함을 되찾아야 할 테니까.
“응……?”
내가 그를 찾으러 중심가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유독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사람들 한가운데에는 좌판을 늘어놓고 무언가를 파는 청년이 있었다. 음침한 분위기를 깨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며 청년은 신나게 두 팔을 벌렸다.
“자, 자. 모두 잘 알겠지만 이런 시대에 진짜 필요한 약물입니다! 아름다운 사제의 눈물을 모아서 만든, 말레드레라 하죠! 이 신성한 물을 한 모금만 마셔도 온몸에 상쾌한 기운이 돌 겁니다!”
“진짜요? 어째 사기 같은데.”
“허허, 진짜라니까요? 제가 그 사제와 친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 사제는 신성한 기운으로 모든 악을 물리쳤어요! 그런 사제의 몸에서 나온 게 어찌 신성하지 않겠어요? 절 믿고 한번 먹어 봐요! 진짜 다를 테니까!”
나는 황당함에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레드레……? 말라 비틀어진 나무뿌리 이름 같다. 내 이름에서 한 글자를 빼면 이렇게도 들릴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천천히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가자, 신나게 약을 팔고 있던 청년이 크게 흠칫했다.
“어?”
“…….”
청년은 익숙한 얼굴이다. 그도 이제 나를 본 모양이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끔뻑거렸다.
“아, 하하…….”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것처럼 웃더니 서둘러 좌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 여러분,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이만 장사를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만나요!”
잠시 후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자 청년이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이게 누구예요? 절 찾아오다니, 진짜 기쁜데요?”
청년은 덥석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서 그의 팔이 허공을 휘젓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철창에 끌려가고 싶어요?”
“하하, 초장부터 역시 살벌하게 말하는군요. 말레드레드다워요!”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랜만인데 더 냉랭해졌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혹시 그때 그 남자랑 잘 안 된 거라던지.”
화를 자초하는 남자다. 나는 그를 무시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렇게 절 팔아서 약 장사를 하면 곤란해요.”
나는 그에게 지팡이를 들이밀었다. 흰빛이 위협적으로 감돌자 청년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그, 그쪽 이름을 빌려 쓴 건 미안해요! 하지만 사기는 아니에요! 지난번 일로 다시는 그런 사기는 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성수가 아니라 그저 상쾌한 약초가 들어간 약초 물일 뿐이에요!”
“예쁜 사제가 흘린 눈물이 들어갔다면서요? 그게 사기가 아니고 뭐예요?”
“사제는 아니겠지만 예쁜 건 맞아요. 아름다운 그녀가 아찔하게 흘린 귀한 눈물이 들어갔으니까.”
“네?”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쳐다보자 그는 자신의 병을 흔들며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관계를 하던 도중에 그녀가 흘린 눈물을 넣어서…….”
“싹 갖다 버려요.”
나는 인상을 왈칵 찡그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병에 담아 공공연히 팔 생각을 하다니. 혼자만 즐기면 모르겠지만 남에게 돈 받고 파는 것은 순진한 피해자를 양산한다. 거기다가 사제의 명예나 내 이름을 팔게 되면 더더욱. 내 살기 어린 눈동자에 청년은 슬금슬금 약병을 뒤로 감추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진짜 이 도시에 웬일이에요? 괴생명체랑 마물이 나타났다고 온 도시가 시끄러운데. 그래서 온 거예요? 영주님께서 아침에 떠드신 거랑 관련해서?”
“떠드시다뇨?”
“사제단이 성물을 들고 도착할 거라 아침부터 흥분하셔서 떠드셨거든요! 신전 사람들도 굉장한 사건이라고 거들었어요. 성물이 도착하면 도시 전체에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할 테니까, 어둠의 무리도 물러가고 장사도 잘될 거라고 하면서!”
과장이 심했던 듯싶다. 우리는 시찰단일 뿐 군대가 아니다. 도시의 안전을 위해서는 기사를 늘리고 순찰하는 인원을 파견하는 게 더 현실적인 도움이 될 터였지만, 시민들이 워낙 겁을 먹고 있으니 우리의 방문이 거창한 일인 것처럼 말한 듯싶었다. 나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시찰단으로 온 건 맞아요. 아주 소수의 인원이지만…….”
나는 말을 아끼면서 경고했다.
“어쨌든 다시 사기 칠 생각 말아요.”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저나 신전의 이름을 썼다간 다음엔 바로 감옥으로 끌고 갈 테니까.”
“여부가 있겠어요? 말씀대로 할 테니 예쁜 얼굴 너무 찡그리지 말아요. 미모가 그리 아름다운데 우중충한 얼굴이면 너무 손해잖아요. 좀 더 환하게 웃으면 주변까지 밝아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텐데……. 어, 어, 말레드레드?”
나는 떠드는 것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레너드를 찾으려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다. 청년은 허둥지둥 나를 따라오다가 내 지팡이에서 흰빛이 튀어 나가자 움찔해서 물러났다.
“악! 맞을 뻔했잖아요! 깜짝 놀랐네!”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따라오지 마요.”
그러자 청년이 울상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해요! 나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청년이 어디 있다고!”
글쎄. 섹스할 때 흘리는 여자의 눈물을 채취했다는 것에서부터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의 청년을 모른 척하고 빠르게 거리를 돌아다녔다.
큰길 위주로 걸었는데 지나가던 노트담 시민들이 나를 보고선 기뻐하며 인사를 했다.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된 식량을 건네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진 돈을 꺼내 전부 주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좋은 축복을 내려 주길 무척이나 바랐다. 신전에서 기도를 올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그들은 사제인 내가 더욱 명확한 신의 힘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이 암울한 세상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누군가 외친 그 문장은 벼락처럼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나는 모여드는 시민들을 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내미는 손, 열기 가득한 눈동자, 간절하게 외치는 입술.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어릿어릿해진다. 나는 나 자신조차 구하지 못해 이러고 있는데 과연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뒤로하고서 정말 도망쳐도 될까. 말레드레드는 이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물러서세요.”
그때 누군가 관중들 틈에서 나를 끌어냈다. 레너드였다. 레너드는 어두운 눈으로 나를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축복은 행진을 하면서 할 겁니다.”
“오오-!”
“그때 나오셔서 이렇게 기원 보내 주세요.”
레너드는 그렇게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나를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괜찮아요?”
“…….”
왜 이런지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뜨거운 찻물에 갇힌 찻잎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정신이 갈피를 못 잡는 것은 갑자기 너무 많은 기대를 받았기 때문일까. 레너드는 슥 나를 훑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머리를 식힐 겸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말레드레드처럼 시민들이 제 갑옷을 보자 순식간에 모여들더라고요. 무척 부담스러웠어요.”
“…….”
“신의 사도라고 부르니까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이죠…….”
레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우울하게 흔들렸다.
“그를 구하지 못했는데,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아직도 사악한 무리가 이렇게 지천으로 널렸는데…….”
“계속.”
나는 입술을 겨우 떼었다. 마음은 암담하게 가라앉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돌아간다. 사제로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싸웠잖아요. 멈추지 않고 검을 들었잖아요. 저들은 알고 있는 거예요. 사제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들을 어떻게 지켜 주고 있는지. 우리에게 끝까지 기대를 걸고 있는 거죠.”
말을 하자 울렁거림이 나아졌다. 사제란 무엇인가. 사제란 사람들을 지키는 자일 것이다. 아직 사제로 있는 동안에는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할 거라고 마음먹으며 나는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사제가 되어 줘요. 레너드는 할 수 있어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말레드레드…….”
울컥해서 얼른 내 손을 잡아 오는 레너드였다. 순진한 그는 금세 내 말에 감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그가 내가 탈영하고 나서 받게 될 충격과 공포에 대해서, 나는 섣불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을 미리 하면 너무 속상했고, 너무 미안했기 때문에…….
“어? 저기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데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레너드가 보고 있는 쪽은 민가가 있는 지역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가자 창고를 약탈하는 괴생명체들이 보였다. 그들 앞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제가 맡을게요! 말레드레드는 남자를 보호해요!”
레너드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섬세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깃들면서 펑펑 터져 나가자 괴생명체들이 나동그라졌다. 나는 재빨리 그 틈을 타서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괴생명체가 습격한 것인지 남자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얼른 지팡이를 내밀었다. 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가슴에서 뻗어 나간 신성력이 그에게 뿌려지는 동안, 레너드는 식량을 훔쳐 가는 괴생명체들을 처리했다. 그들은 식량을 품에 안자마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듯이 도망쳤고, 하나만이 다리를 다쳐서 레너드의 검을 마주해야 했다.
“죽어……!”
레너드의 검이 치솟아 아래로 강하게 내려칠 찰나, 누군가 그를 붙들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차, 참으세요!”
그는 레너드의 허리를 붙든 채로, 그를 말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갑자기 누가 매달리자 레너드는 기우뚱하며 몸을 휘청하고 말았다. 레너드가 대검을 내리자 신전의 사제로 보이는 자는 그제야 떨어져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사, 살려 둬야 합니다. 이 도시에 오셨던 조사단의 대장님께서 강조하셨습니다. 괴생명체를 살려 둬야 정확한 조사를 할 수가 있다고 말이죠.”
그는 노트담 신전의 사제였다. 얼마 전에 괴생명체를 조사하던 사제단이 왔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쓰러진 괴생명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상태가 제법 좋군요. 해부할 때 쓸 만하겠어요.”
해부란 단어에 내가 흠칫했지만, 사제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