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52화 (152/220)

152화

“넌…….”

나는 들이밀었던 지팡이를 주춤하며 눈앞에 나타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가난한 형편을 암시하듯 헐거운 옷차림에 앞이 터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나는 소년이 주저하며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거칠고 까진 손바닥에 들려 있는 것은 신전에 바치는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흰 신령(神靈), 아델무네였다.

“이, 이걸 드, 드, 드리려고……. 어, 어, 어제 행렬을 보고서…….”

긴장으로 말을 더듬는 것만 같지 않았다. 나는 소년의 몸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가축의 분뇨 냄새를 맡았다. 축사 일을 맡아 하는 걸까. 소년의 까지고 상처 가득한 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나는 얼른 지팡이를 뻗었다.

“치료해 줄게.”

“아, 아, 아니에요!”

소년은 기겁하며 손을 뒤로 뺐다.

“제, 제 손은 너, 너, 너무 더럽고, 저, 전 그저 와 주신 것만 해도 무척 기뻐서…….”

“…….”

“지, 진, 진짜 만나서 드리게 될지 모, 모, 몰랐던 터라…….”

소년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소년의 허름한 행색에서, 그리고 소년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생각에서 나는 왠지 모를 연민의 감정이 가슴에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그저 와 주신 것만 해도 기쁘다니. 그토록 순수하고 담백한 말이 또 있을까. 소년의 감사는 신이 이 도시를 돌보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표현이었다.

소년이 보고 있는 것은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신의 사자로서 축복받은 사제라고 생각하자 나는 사제의 신분에서 도망가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인지 고민하고 말았다. 생각이 깊어질 때 소년이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부, 부, 부담 갖지 않으셔도…….”

“알겠어. 그럼 꽃은 받아도 되지?”

손을 내밀자 소년이 환하게 입가를 벌리며 꽃을 건네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멈칫했던 소년은 자신의 손을 흰빛이 감싸자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흰빛이 손 마디마디 구석구석에 감돌자 어느새 아리던 상처는 회복되고 벗겨진 살 껍질은 반듯해진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얼이 빠져 있던 소년은 마침내 분명한 감탄을 터트렸다.

“와, 아…….”

소년은 제 손을 맞잡아도 보고 비벼도 보고 꼬집어도 보더니 울먹였다.

“가, 가, 감사……합니다! 저, 저, 정말 감사…….”

나는 소년이 민망해지지 않도록 얼른 손에 들린 꽃을 흔들었다.

“내가 더 고마운걸.”

소년은 연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소년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최대한 소년이 어색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우연히 나와 마주친 이들은 대부분 모두 소년과 같은 반응을 보여 주었다. 안도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오래 있어 달라는 바람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에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무거워질 때, 나는 영주의 성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성으로 돌아가자, 시찰단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나는 레너드가 소란 중심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너드 뒤로는 영주의 일반 병사들이 보였고, 그들은 같은 병사 갑옷을 입은 부상자들을 옮기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레너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해 왔다.

“괴생명체와 마주쳤나 봐요, 아침 순찰을 돌다가. 제가 얼른 가서 도왔지만, 몇몇은 이미 크게 다친 터라…….”

레너드는 감정이 고조된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기사들을 급파했다고 말하면서도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이 괴생명체들은 밤낮 안 가리고 소란을 만든다니까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피해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보호할 기사들도 부족하고요!”

레너드가 나를 보며 물었다.

“어떡하죠?”

우리는 시찰단일 뿐이다. 맞서서 싸우지 말라는 카란의 말을 애써 상기하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상부에 연락을 취하고 우리는 떠나야죠.”

“하지만 이런 피해를 보고도 그냥 떠나는 건 우리가 아니잖아요? 우린 사람들을 구하고 보호해야 하는 사제들인데!”

사제란 단어가 가슴에 크게 와닿는다.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에요. 우리가 더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러자 다른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란의 말도 있었잖아요.”

“우린 전투를 위해 차출된 인원이 아니에요.”

“도움을 요청하고 서둘러 다른 도시로 가죠.”

사제들이 모두 한 의견으로 말하니 레너드는 더는 고집부릴 수 없었다. 그는 침울한 눈빛을 하면서 방에 들어가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흰 꽃 아델무네를 바라보았다.

“……상부에 연락하고 싶은데요?”

“아, 절 따라오세요.”

영주는 연락하는 장소로 안내하겠다며 앞장 서서 걸었다.

상부에 연락을 하고 난 뒤 다시 모였을 때, 사제들은 모두 떠날 행장을 마친 상태였다. 레너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침침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도시가 걱정되는지 내내 뒤돌아보는 그가 신경 쓰였지만 벨에 머물 수는 없었다.

“다음 도시, 노트담으로 가죠.”

노트담. 그곳은 가야 할 두 번째 도시였다. 노트담이 끝나면 솔즈베리로, 그 뒤는 헤르간으로 가는 것이 우리 시찰단의 임무다. 나는 세 번째 도시인 솔즈베리에서 시찰단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제로서의 본분을 불태우고 있는 레너드와 달리, 사제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두 남자로부터 벗어나려면 내가 사제란 사실을 잊어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시민을 보호하며 적당히 명성을 얻었던 말레드레드가 아니라 내 한 몸 건사하는, 내 행복과 안전만을 신경 쓰는 말레드레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자신했다. 왜냐하면 늘 내 개인의 행복과 욕망을 우선했기 때문에. 사제란 신분을 좋아했던 것은 끔찍한 현실에서 날 벗어나게 해 주어서다. 어떤 숭고하고 고결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수녀원에 갇혀 지내야 할 처지의 나를 구해 준 수단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숨겨진 욕망을 배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직업적인 장치였던 것이다.

“말레드레드, 뭐해요?”

따라서 나는 흰 꽃 아델무네를 아무렇지 않게 버려야 했다. 내가 마차에 타지 않고 꽃을 든 채로 망설이고 있자 레너드가 다시 한 번 물어 왔다.

“안 갈 거예요?”

그의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델무네를 쥔 손을 폈다가 쥐고를 반복하고는 마침내 중얼거렸다.

“이 꽃은 잠을 잘 오게 하는 약초로도 쓰이지.”

“네?”

“아뇨, 간다고요.”

나는 약초를 짐 가방에 넣었다. 이 꽃은 말리면 약으로 쓸 수도 있다. 그래서 버리지 않은 것뿐이다. 그렇게 변명하면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상인들의 도시, 두꺼운 성벽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 노트담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의 안배인지 마물과 마주치지 않았고, 우리는 편하게 도시까지 갈 수 있었다. 다만 도시의 분위기가 어딘가 뒤숭숭해 보였다.

지난번 임신이 안 되는 약초를 찾으러 왔을 때보다 활기가 죽어 있는 도시는 큰 도로에서도 그 적막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딘가를 빠르게 달리는 마차와 어두운 행색의 사람들. 마치 벨의 시민들처럼 어딘가 겁에 질려 있었다. 괴생명체의 영향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를 반기는 사제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께서 오신다고 말씀을 전해 주셔서 제가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자신을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소개한 사제는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이 보기 좋은 사제는 노트담 신전에 속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거듭 환영했다.

“시찰단이 이렇게 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가시죠! 제가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손을 뻗으며 가리키는 것에 순간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노트담의 신전으로 가는 건가요?”

“아뇨, 저희 신전에는 현재 부상자들이 많아서요. 영주님께서 지정해 놓으신 여관에서 머무르실 겁니다.”

나는 작게 안도했다. 사제가 신전을 무서워하다니. 이상한 일이지만 아론이 노트담의 신전으로 데려가 신성력을 억지로 쏟아부었을 때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 듯하다. 나는 다행이라며 일행들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

“보시다시피 도시 분위기가 조금 흉흉합니다. 최근에 마물들이 몰려와서요.”

“괴생명체가 아니라요?”

“저희는 괴생명체보다 마물의 피해가 큽니다. 괴생명체는 출몰이 잦긴 해도 농작물을 훔치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지 죽이진 않거든요.”

사제의 말에 레너드가 반론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 오다가 벨에 들렀었는데 거기서 괴생명체 때문에 큰 피해를 봤습니다.”

“아, 물론 그렇지요. 저도 괴생명체는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인들이 가득한 이 도시에선 마물들이 조금 더 곤란한 문젯거리입니다. 그것들은 죽고 나서도 마기를 남겨서요. 팔 상품이나 물건이 썩어 버리면 정말 방법이 없죠. 그 탓에 요새 현저하게 외부 도시와의 거래가 끊기고 있습니다.”

사제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상태가 더 지속되면 정말 곤란할 겁니다. 얼른 사악한 마물과 마족의 무리가 처단되어야 하는데…….”

사제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가 이내 가라앉은 우리를 보며 얼른 말을 바꿨다.

“이런. 제가 먼 곳에서 와주신 손님들에게 불길한 소리부터 했군요! 시찰단이 오셨으니, 그래도 사기 진작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품까지 들고 오셨다는 말에 벌써부터 신전이 떠들썩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행진을 할까 하는데요.”

“네, 그리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기에 정말 필요한 일이니까요!”

사제는 신나게 말하고는 우리를 여관까지 안내해 주고 돌아갔다. 나는 예전에 묵었던 여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한 여관의 규모를 보며 감탄했다. 영주의 소개인지 우리는 값비싼 여관에 묵을 수 있었고 좋은 방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시찰단의 임무가 마냥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군요.”

사제 중 하나가 비단 침대를 손으로 훑으며 감탄했다. 다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레너드만은 울컥해서 외쳤다.

“힘들다니요! 이런 임무는 사제들의 임무 중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비단 침대를 보며 좋아하는 동안 누군가는 생사를 가르며 피를 흘리고 있다고요! 우리가 비단을 만지고 있는 시간에 말이에요!”

“레너드…….”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레너드는 흠칫했다가 곧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잠깐…….”

스스로가 너무 과격했다는 것을 깨달은 걸까. 레너드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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