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아침이 되자 본대의 입구에는 카란이 말을 끌고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함께 떠나는 사제들을 쭉 둘러보았다. 나와 레너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투원으로 계속 활동할지 아니면 은퇴할지 그 기로에 선 자들.
카란은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고는 모두가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말레드레드가 시찰단을 이끌 것이니 모두 그녀를 잘 따라 주길 바란다.”
카란은 이번엔 나를 보며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나와 상부에 보고하는 걸 잊으면 안 되네.”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카란은 재차 강조했다.
“이번 목적은 전투가 아니야. 마물이나 마족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도록 해. 이 인원으로 목숨을 버려 가면서 싸우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야. 전투 목적으로 차출된 사람들이 더더욱 아니니까 말이야.”
레너드가 천진난만하게 끼어들었다.
“근데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서 마물과 싸우게 되면 어떡하죠? 저도 모르게 마물을 죽이게 되면은요?”
카란은 역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모조리 죽여서 자네가 그랬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게.”
“아, 네. 그 방법밖에 없겠군요……. 아무도 모르게…….”
왠지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레너드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나름 시찰단에서 멋진 활약을 꿈꿨던 것일까. 나는 마냥 어린아이같이 열정에 넘치는 레너드를 흘깃 쳐다보고는 카란에게 말했다.
“혹시나 아론나이드 경이 깨어나면…….”
“아. 잘 말해놓겠네. 시찰단으로 떠났다고 말이야.”
“…….”
“왜, 그것만으로 부족한가? 더 할 말이 있으면 말해 줘. 전달하지.”
쫓아오지 말라고 해 달라는 것은 카란의 책무를 벗어난 일이다. 그렇게까지는 부탁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아론이 깨어나 나를 찾을 즈음엔 나는 시찰단에 있지 않을 것이다. 어디 다른 도시로 멀리멀리 떠났겠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흠, 그래?”
카란은 유심히 나를 쳐다본 뒤 아무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까칠한 듯 정 많은 눈빛을 빤히 바라보며 ‘안녕히 계세요, 몸 건강하시고요.’라고 인사했다. 평소와 같은 어조였지만 내용이 이상했던지 카란이 멈칫했다.
“자네 같지 않은 인사군. 마치 안 볼 사람처럼.”
“…….”
카란은 굳어 버린 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잘하고 올 거야. 무사히 돌아오게나.”
그 평소와 같은 무뚝뚝함이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우리는 대로를 선택했다. 빨리 가자면 좁고 험한 산길을 걸으면 좋겠지만 도적이나 괴생명체를 만날 우려가 있었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지원을 요청받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널찍한 대로에는 예상했던 사람들의 왕래란 없었다. 마차가 급하게 지나간 자국만이 여러 갈래로 패어 있을 뿐이다. 빠르게 지나간 흔적들을 유심히 쳐다보던 우리는 간신히 상인들 한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짐을 실은 채로 지친 말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왔으며, 벨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괴생명체의 출몰을 매우 두려워하던 그들은 우리의 경유지에 솔즈베리도 있다는 말을 듣자 화색을 띠었다.
“그래요? 우리 도시로도 오신다고요? 환영할 일이네요! 이미 도시에서도 알고 있겠지만 말을 해두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인원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말을 재촉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허둥지둥 근처 마을로 들어갔고, 우리는 대로를 조금 더 지나서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첫 도시 벨에 입성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하자 영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맞이했다.
“언제 오시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주민들이 모두 겁을 먹고 있거든요! 괴생명체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출현해서 말이죠!”
영주는 고민이라는 듯이 찡그린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몰려다니며 수확 작물이나 창고 등을 습격합니다. 기사들이 달려가면 잽싸게 사라지고요! 몇 달 동안 먹을 식량도 남김없이 약탈해 가니 미칠 지경이에요! 거기다가 사람들도 납치해서, 가족들은 울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식량 약탈과 납치요? 그건…….”
보통 도적들이 하는 짓이 아닌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영주는 내가 주저하는 이유를 몰랐던지 그 극악무도한 존재들이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만 이야기했다.
“정말 예사롭지 않습니다! 단순히 치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될 정도로요! 모든 것이 위협받고 있어요! 사제들을 몇 차례나 요청했는데 저번에 조사를 하고 가신 뒤로는 다시 오지 않으시더군요. 오셨던 분들은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온 도시를 뒤지기만 하셨습니다. 별 성과가 없으셨던지 다른 도시로 떠나셨지만요.”
“아. 그렇군요.”
괴생명체 조사를 떠난 대장님 일행인가 보다. 나는 그들이 원인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괴생명체. 징그러운 형상을 하고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그들이 갑자기 늘어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원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저는 시민들을 안정시키는 게 걱정입니다. 도시 전체가 겁에 질려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사제단이 이렇게 와 주셔서…….”
영주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나는 서둘러 정정했다.
“저희는 시찰단이예요. 공격이나 방어를 하는 사제단이 아닙니다.”
과한 기대는 곤란하다. 시찰단은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을지언정 실제적인 보호나 방어와는 제공하지 못한다. 도시를 구하는 것은 영주의 몫이었다. 영주는 내 냉정한 말에 멈칫했다가 곧 진심을 털어놓았다.
“알고 있습니다. 전투 사제단이 아니라니 무척 아쉬웠지만요. 하지만 저희 사정을 잘 알아 가셔서 위에다가 좋은 말씀을 해 주실 수 있겠죠. 어쩌면 저보다도 더 확실하게 말입니다.”
나는 그제야 영주가 우리를 격하게 환영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상부에 좋은 말을 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나는 도리어 씁쓸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영주의 응접실을 나오자 잠자코 있던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진짜 상황이 안 좋긴 한가 봐요. 영주님께서 저런 말을 직접 할 정도면…….”
“지금은 시찰단 활동에 집중해야 해요.”
사무적인 어조에 레너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반응이 의외란 눈동자였다. 나는 차갑게 말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시찰단이지 전투원이 아니니까, 우리가 도시에 더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그럼 옷을 갈아입고 만나요.”
나는 서둘러 개인 방으로 들어왔다.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들어오기 전 보았던 레너드의 놀란 얼굴이 가슴을 쿡쿡 찔러 왔다. 하지만 떠나자고 마음 먹었다면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레너드와의 친분이 있다면 떠난 후 그도 곤란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나는 머리까지 깔끔하게 빗고, 화장까지 반듯하게 한 뒤 방을 나섰다.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죠.”
내 말에 레너드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별말 없이 도시를 돌았다. 사람들은 창문을 연 채로, 길거리를 걷다 서서 우리의 예식을 지켜보았다. 내가 들고 있는 검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챈 소수의 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한순간의 안도와 평화. 그들의 얼굴에 깃든 안정감이 공포를 완전히 걷어내진 못할 것이다. 나는 우리를 하염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시민들을 뒤로한 채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저녁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검을 옆에 낀 채 나는 영주가 제공한 높다란 방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론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로 이동되어 치료를 받고 있을까? 마왕은, 지금쯤 나를 소환할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겠지? 어쩌면 그의 수하에게 나를 찾게 했을 수도 있다.
초조해진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물고 말았다. 본대를 떠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걱정거리를 둔 채로 무작정 떠나는 내가 무모하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어쩌면 나는 내 모든 생활을 고백하고 사제단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단자로서 신성한 불에 처단되어야 하는 것이 내 진정한 운명이 아닐지…….
나는 왠지 두렵고 마음이 약해져 그날 밤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새벽녘에 기상한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신성력 훈련이라도 할 겸 야외 훈련장으로 왔는데, 훈련장에는 이미 영주의 기사들이 검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게 인사를 건넨 기사단장은 나를 묘한 눈길을 보냈다. 호기심과 관심이 듬뿍 든 눈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훈련장에는 여자들이 거의 없었다. 사제들은 더더욱이 없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시선은 내게 집중되었고,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정찰을 나간다는 명목으로 성을 빠져나왔다.
새벽의 도시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골목길에는 어스름이 가득했고 이른 아침 동물들 먹이를 주려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목격될 뿐이었다. 이목을 끌기 싫었던 나는 조용한 소로로 들어섰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