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떠나기 전, 나는 마왕이 나를 찾을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마왕의 소환은 강력한 것이다. 아론의 막대한 신성력이 내 몸에 뿌려지고 나서야 소환을 거부할 수 있었는데. 딱히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 곤란해하던 차에 레너드가 내 천막을 방문했다.
“이번에 시찰단으로 함께 가게 되어서요. 지휘관께서 제게 이걸 맡기는 게 아니겠어요?”
레너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단검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둔탁한 칼날의 검이었다. 그러나 검신이 일반 철검과 달리 새하얗게 빛났고, 검 손잡이에는 엘크리찬의 모습이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신성력이 느껴지자 놀라서 그를 바라봤는데, 레너드가 알아차렸냐며 검의 정체를 밝혔다.
“신품이래요! 아주 오래전부터 축복의 상징으로서 수도의 제단에서 빛났다고 해요. 이번 시찰단의 상징이 필요할 거라면서, 에스더 경이 주셨어요!”
“어떻게 이걸 에스더 경이 갖고 있으셨죠?”
사뭇 놀란 내 질문에 레너드는 들뜬 어조로 설명했다.
“본대에 두려고 가져오신 거래요! 본대가 하도 마족에게 위협을 당하니까 사기 진작이 필요할 거라면서 신전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오셨나 봐요. 제가 떠난다고 하자, 에스더 경이 멈칫하시더니 주셨어요. 시찰단에게 더욱 필요할 거라면서요.”
“그랬군요…….”
“네. 누구랑 떠나냐고, 언제 떠나냐고 물어보시고는 결심이 확 굳으셨는지 이걸 주시더라고요!”
레너드는 해맑게 대답했다. 깊은 고민 없이 그저 좋은 걸 준다니 받아 왔다는 그의 천진함에 나는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에스더가 왜 누구랑 가는지 물어봤을까. 그가 이것을 그냥 준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왜냐하면 신품은 시찰단 중 한 명이 가지고 있기엔 너무나 귀중하고 값어치 나가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진짜 저희 걱정을 많이 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이런 시기에 본대를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 제가 보기엔 저보다는 남아 있는 에스더 경과 동료들이 더 걱정인데 말이죠.”
“…….”
“뭐가 됐든 진짜 기뻐요! 제가 생전에 어떻게 신품을 받아 보겠어요?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성한 기운이 제 몸으로 용솟음쳐 들어오는 거 같다니까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하면서 레너드가 넘겨 주는 단검을 얼떨결에 들고야 말았다. 그의 말대로 잡기만 했는데도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이 거세다. 순간적으로 손에서부터 팔을 지나 가슴으로까지 정화가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을 내쉬고야 말았다.
“아…….”
“어때요, 진짜 느껴지죠?”
레너드는 내 반응에 더욱 흥이 난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재빨리 호흡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레너드에게 넘겨주려고 하니, 레너드가 고개를 저었다.
“카란이 말하길 이번 시찰단의 지휘는 말레드레드가 한다고 하더라고요. 말레드레드가 보관하는 게 좋겠어요.”
“정말요?”
나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신품이란 건 그만큼 남에게 넘기기 어려운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레너드는 진심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전 검을 사용해야 해서요. 다른 검을 들고 있으면 거추장스럽더라고요. 무엇보다 신성력의 기운이 강해서 제가 힘을 쓸 때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요. 말레드레드가 보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잘 보관할게요.”
나는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지니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레너드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신성력을 지닌 물건이라면 마왕의 소환을 충분히 막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었고, 마왕을 거부해 나를 지켜낼 힘이 있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내 진지한 감사 인사에 레너드는 좀 쑥스럽다는 듯이 웃고는 내일 아침에 보자며 천막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짐을 챙겼다. 시찰단의 활동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정대로라면 도시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독려하다가 결혼을 하기 위해 수도로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칠 계획이었고 신품을 지닌 채로 다른 대륙으로 떠나는 것이 어떠한가를 고려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대로 빠져나가게 되면 탈영병이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결혼을 주선한 황제가 자신을 기만했다는 생각에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결혼에서 달아난 전투 사제, 백작가 사생아의 대담한 일탈, 신품을 갖고 달아난 신부.
어떤 명칭으로 불리든 좋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아론과 마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쉬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다음날, 나는 흐릿하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겁고 축축했다. 잠을 잘 자지 못한 것도 있었고 꿈속에서 악몽을 꾼 탓도 있었다. 나는 눈가를 만져 보고선 울지 않았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꿈에서 아론은 어둠의 괴물에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구하지 못했고, 그저 겁에 질린 채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랗고 유순한 황금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 내 손발은 떨리기만 할 뿐 움직여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심해에 잠겨 버린 것처럼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목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아주 나지막하게.
[그댄 그저 인간일 뿐이야.]
그 넋두리 같은 단정이 왜 이리도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던지. 나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져야 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어둠을 대변하는 존재. 마왕이 왜 굳이 그런 말을 내게 날렸는지 의아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항상 나라는 존재에 대해 기대감이 없었다. 날 어떤 선망의 눈으로 보아 왔던 아론과 달리 마왕은 내가 늘상 한계에 머무르는 인간이라고 보았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 이야기해 왔다. 나에게서 어떤 관념을 기대하지 않는 남자. 나는 그래서 그가 편했고 관계하기 좋았는지 모른다. 내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안도하면서……. 아론과 정반대로 말이다.
“어떻게 오셨죠?”
새벽부터 치료소를 찾자 사제가 눈을 크게 떴다. 훈련이 아직 시작하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다. 그녀에게선 부드럽고 향긋한 약초 냄새와 빨래 냄새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환자를 다루는 장소인 만큼, 깨끗한 의복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론나이드 경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시간……. 아.”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보더니 작은 감탄사를 냈다.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다.
“말레드레드죠?”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물었다. 맹세하건대 처음 보는 치료 사제다. 내가 멈칫한 것과 달리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워낙 유명해서요. 그 아론나이드 경하고 소문이 나서…….”
내가 긴장한 것처럼 침묵하자 그녀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들은 거예요. 잘은 모르고요. 그런데…….”
그녀는 나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아론나이드 경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어요. 뵙더라도 얼굴만 볼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녀는 아론이 누워 있는 침대까지 안내하겠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조심스레 발길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많은 사제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물과 마족들의 거센 공격, 습격에 다치거나 의식을 잃은 자가 대부분이다. 마기의 침투란 건 한 번 치료한다고 없어지지 않고 늘 몸을 괴롭혔기 때문에 오래 누워 있는 자들도 많았다.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 분들은 오늘 아론나이드 경과 함께 수도로 옮길 예정이에요. 여기는 마물 출몰 지역이라 새롭게 다친 분들이 많이 몰려오시든요.”
그녀는 천막을 걷으며 설명했다. 천막 뒤에는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곳에 누워 있는 자들은 여태 본 부상자들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의 사람들이었고, 그 복도 끝에 아론이 누워 있는 침대가 있었다. 그녀는 그곳의 문을 열기 전 나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네?”
“그러니까 권력가 틈새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거요.”
“…….”
“아론나이드 경이나 황제 폐하나, 모두 강력한 분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 틈새에 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저도 남작가의 사생아로 자라 귀족 세계에 있었거든요.”
어쩐지 그녀의 눈빛이 짙은 빛깔로 일렁였다. 살아온 세월이 쉽지 않았다는 듯이 차갑게 빛나던 눈빛은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발랄하게 반짝였다.
“보고 나오세요.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거니까, 시간은 많이 못 드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론은 하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휘관이라는 그의 배경에 걸맞게 가장 크고 깨끗한 침대를 독차지한 그의 모습은 신성하면서도 거룩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그의 숨소리가 작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것에 안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을 말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 것도, 또 보자 인사를 하는 것도 모두 충분치 않다. 나는 이렇게 떠날 거라고 구구절절 설명을 하더라도 개운해지지 않을 듯한 이 느낌. 나는 그것이 알아 온 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론.”
그가 갑자기 사라져 찾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막막함이 왜 이런 때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만 걸까. 이번에는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될 것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울컥하는 가슴을 느끼면서 그의 이마를 쓸었다.
반듯하고 매끈한 이마는 손에 정겹게 와 감겼다. 나는 이것이 작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찾지 마.”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의식이 없어 들을 수 없음에도 그가 소용없는 일을 함으로써 소요될 시간과 노력이 안타까워.
“부디.”
나를 그리워 마. 나는 힘겹게 중얼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의 잠든 얼굴을 애처롭게 잠시 내려다보고는 이내 방을 빠져나왔다. 안내했던 치료 사제가 빙긋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해 주었던 것이 본대에서 봤던 마지막 호의 어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