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아쉽게도 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군.”
저쪽에서 흰 빛이 날아온다. 맹렬한 복수심을 머금은 강대한 신성력이.
“정녕 한쪽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마왕은 그게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리고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공간을 강타한 것은 눈부신 신성력이었다.
“……후우.”
숨을 거칠게 내쉬며 도착한 아론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은 채로, 생채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피가 흐르는 배 부근의 옷이 걸을 때마다 철벅거리며 핏방울을 뚝뚝 떨구었다. 하지만 아론은 멈추지 않았다.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를 발견하고 안도했다는 듯이 내 앞으로 다가섰을 뿐이다.
“……절대,”
아론이 한 무릎을 꿇었다. 비장한 그의 목소리처럼 단단한 검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뺏기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 더 짓무른 것은 그의 맹세. 그의 피 맺힌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각오일 것이다.
“공유 따윈 없어.”
나는 그가 반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빛이 슬프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날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나는 어여쁘고 선망 가득했던 황금빛 눈을 떠올려 보고는 슬그머니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눈을 뜨면서 든 생각은 ‘도망가야겠다’ 였다.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단지 이 상황에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마왕과 아론. 그리고 황제까지. 나는 그들을 거스를 수도,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다. 그럴 역량이 되지 않는다. 내 스스로를 하찮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더더욱이 과대평가는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상대할 수 없다면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내 머릿속에선 이기적인 울림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가 익숙했다. 아론이 나를 본대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익숙한 천막 안을 천천히 둘러본 나는 곧 내가 깨끗한 사제복을 걸치고 있음을 발견했다.
몸은 멀쩡했다. 피가 맺혀 있던 입술도 깨끗해졌고, 얼굴빛도 돌아왔다. 우울하고 암담한 눈빛을 제외하곤 모두가 정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빛에 무게를 두었다. 눈빛에 흐르는 절망감은 내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결론만 내리자면 나는 두 남자에게 싸움을 붙여 놓았다.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두 남자의 쾌락을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초반에 두 존재와 관계를 끊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아론과 관계를 그만두었다면…….’
그가 고통받거나 괴로워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나는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흘렀을까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위기를 피할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야 할까? 내가 떠나면 마왕과 아론이 나를 찾으러 서로를 공격하는 것을 관두지 않을까? 고민하며 걸어 나왔을 때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있었다.
“일어났나? 다행이군. 매우 놀랐었는데.”
카란은 내가 숙소를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 왔다. 그는 나를 깨울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혹시나 해서 그를 바라보니 카란이 쓰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론나이드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말이야. 마기 침투가 생각보다 심각해.”
손이 떨려 왔다. 도망쳐야 하는데. 그를 모른 척하고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는데…….
“그래서 말인데. 도대체 어떤 마족하고 싸운 건가?”
카란의 질문에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고 말았다. 아론은 마족과 싸웠다는 것만을 말했을 뿐, 기절하기 전까지 어떤 마족인지를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입술을 떼었다.
“……마왕이요.”
“마왕?”
카란은 자신이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잠자코 있자 결국 그게 답이란 걸 알았는지 크게 한탄했다.
“마왕이 직접 나타나서 아론나이드를 공격했다고? 베리스에서 말인가?”
그 말은 생각보다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마왕의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마왕은 마계의 지휘관이었지 한 사람을 노리는 암살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마왕이 일반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에 비추어 보건대, 아론의 중태는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정말 큰일이군. 아론나이드를 지킬 만한 이들이 본대에 얼마 없는데.”
“에스더 경은요?”
“지금 전투에 나가 있어. 마물들이 몰려와서 말이지. 쉽게 전투 장소를 떠날 수 없을 걸세.”
나는 재빨리 말했다.
“황제 폐하께 지원 요청을 해야 해요. 아론나이드 경이 다쳤다고 말하면서요.”
“안 그래도 연락을 드렸어. 이쪽으로 사제들을 더 파견한다고 하셨지. 그리고 경을 수도로 옮기라고 하셨어.”
“수도요?”
“그래. 이 본대에 더는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인가 봐.”
카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치료 사제들도 그쪽이 더 많고 지키는 자들도 더 많으니까, 아론나이드를 위해선 옮기는 게 최선일 거야.”
“…….”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방금까지는 도망가도 될 것인지, 아론을 이대로 두고 떠나도 될 것인지 죄책감이 가득했다면, 카란의 이야기에 갑자기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 것이다.
“아, 아론은 괜찮을까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아론? 그만큼 친숙한 사이군.”
카란은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네.”
“…….”
마왕의 공유하자는 제안에 돌아버린 것처럼 분노한 아론이었다. 나를 어쩔 수 없이 공유했지만 앞으로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아론을 보면서, 나는 모든 일의 원인이 나의 나태함과 안일함에 기초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적어도 아론이 어떤 성향인지를 알고 있었던 나라면, 충분히 그에 따른 비극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아니, 예측했다. 아론과 마왕이 싸우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둘 중 한 명만을 고르거나 떨칠 수 없다는 이유로 방관한 것이다.
내 태도가 이번 일의 원인 중 일부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더욱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란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내키지 않지만 나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름난 치료 사제들이 그를 보살피고 있어. 젊고 튼튼한 육체를 지닌 성기사이니, 회복력도 남다를 걸세. 그의 강점을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지 않나. 그러지 말고 걱정된다면 한번 찾아가 봐. 눈으로 보면 더욱 안도가 될 테니까.”
“제가…… 가도 될지 모르겠어요.”
“왜? 자네의 동료이기도 하잖아. 자네와 염문이 난 남자 이전에 말이야. 물론 새 결혼 상대가 신경 쓰이겠지만…….”
카란은 곤란하다는 듯이 잠깐 눈썹을 찡그렸다.
“이렇게 된 거 자네 당분간 이 본대를 벗어나 있으면 어떻겠나?”
“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카란이 내놓은 제안이 신묘했기 때문이다.
“아론나이드가 수도로 가 있는 동안에 자네도 이 본대를 떠나 있는 거야. 여기 있으면 싫어도 전투에 참가해야 하니까. 결혼할 가문이 좋아하지 않을 거란 핑계로 나가 있기도 수월해지지 않겠나. 본대를 떠나서 시찰단 활동을 하면 되니까.”
“시찰단이요?”
“저번에 이야기한 거 기억하나? 제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저번의 시찰단 활동에 대해 무척 좋은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일을 하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네.”
“아…….”
“안 그래도 마물 출몰이 더 잦아진 데다 이상한 생명체가 도시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어. 조사단으로 떠나 있는 대장님의 편지에는 괴생명체의 개체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걱정이 가득했네. 이런 시기에 안정과 위로란 그 무엇보다 중요해. 나는 자네가 그 역할로 적격이라고 생각하네만.”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내 자신에게서조차도 위로와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여인이 남들에게 위로와 안정을 선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런 나의 의아함과는 달리 카란은 내가 제 역할을 잘 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말레드레드. 자네는 자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야. 당장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위기에선 반드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될 걸세.”
위기에 봉착하자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카란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지 진정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시찰단을 하겠다고 말했다. 카란은 반가워했다.
“그래, 여길 떠나 있는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다독이게. 물론 그럴 시간이 있다면 말이야.”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카란이었다. 나는 무작정 정처 없이 떠나는 것보다 시찰단이란 임무로 두 남자를 떠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반가워하며 다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바로 내일 아침에 출발하라고 카란이 말을 한 것이다.
“인원은 저번보다 적을 거야. 5명만이 떠날 거고 딱히 통솔자가 없으니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