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드디어 왔군.”
“!”
아론이 얼마나 빠르게 반응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빛의 얼룩이 움직였다고 느꼈을 때, 아론은 어느새 마왕의 앞으로 다가가 대검으로 그의 팔을 내려치고 있었다. 엄청난 파동이 일어났다.
“윽……!”
그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튀어나온 벽을 얼떨결에 붙잡았다. 희고 검은 난잡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찢을 것처럼 흔드는 게 느껴졌다. 손을 놓칠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쓰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신성력이 날아들었다. 그 신성력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담긴 신성력을 일깨우려 한다는 듯이 나를 흔들었다. 나는 곧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 전체를 덮듯이 올라온 신성력 방어막을 발견했다.
“대단한데?”
마왕은 작게 감탄했다.
“쓸만한 잔재주야.”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어조로 마왕은 중얼거리며 이내 대검을 바닥으로 휘둘러 쳤고, 아론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쾅 소리를 내며 대검을 땅에 박고 말았다.
“진정하지 그래. 힘을 더 썼다간 네 잔재주로 만든 방어막이 허무하게 날아갈 테니.”
마왕은 나를 보았다가 다시 금색 눈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유로운 어조에, 태연한 자태. 눈앞의 분노로 짓무를 듯 타오르는 성기사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흥분할 거 없어.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
“아니면 분이 풀릴 때까지 내게 공격을 시도할 셈인가? 자신이 얼마나 끈질기고 어리석은 인간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그 말은 오히려 아론의 증오를 키운 듯했다. 끈질기고 어리석다. 이 말은 아론이 현재 무모한 짓을 무리하게 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렸다. 아론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치고 싶다는 듯이 혁혁하게 빛났지만, 더 강한 공격은 내 방어막을 도리어 깨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한 번 보고서 천천히 검을 내렸다.
“좋아.”
마왕이 말했다. 여전히 아론의 기세는 굉장했다. 싸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그의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듯 돌고 있었지만 마왕은 무심한 척 입술을 떼었다.
“나는 죽어 가고 있어.”
“……!”
아론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직면한 사람처럼. 의심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는 그에게 마왕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복잡하거나 귀찮은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지. 딱히 인간 세계의 정복에도 관심이 없고.”
“그 말을.”
아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금빛 눈은 점철된 증오로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믿을 줄 아나?”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었지만 마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듯이 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야.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제안이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밝혀야겠다고 판단해서다. 네 믿음과 상관없이 그녀에게도 이 제안이 설득력 있게 들려야 하니까.”
마왕은 그러면서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길은 욕정을 담고 있었고 쾌락을 부추기는 것 같았다. 으드득. 아론이 검 손잡이를 바투 잡는 소리가 사납게 들려오자, 마왕의 고개가 다시 아론에게 돌아갔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네게 제안을 하고 싶다. 그녀를 나와 공유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숨을 멈췄다. 마왕이 하는 소리가 마치 운명의 종소리처럼 내 귀를 강타하고 있었다.
“인간계에 공격을 백 년간 멈추겠다고.”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를 공유한다니. 그것은 여태처럼 서로가 서로를 몰랐던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채로 나라는 여자를 함께 탐한다는 것을 말하는 건가?
‘말도 안 돼……!’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제안에 내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아론도 다르지 않게 반응했다.
“……뭐?”
아론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동요한 듯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흔든다. 이 순간을 어찌 참아내야 할지 모르는 이처럼 몸을 떤 그가 마침내 말했다.
“지금 그걸 제안이라고 하나.”
아론의 목소리는 낮았다. 조용했지만 성난 노기가 비쳤다. 그의 몸 주변으로 곧 거센 파도처럼 신성력이 치솟자 마왕은 미약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락바락 반응하는 게 재밌기는 한데, 매우 어리석게 보여. 네 입장에서만 현상을 보지 마. 그녀 입장에서도 생각해 봐. 너나 내가 아니어도 그녀는 또 다른 쾌락을 찾아 떠날 것이다. 우리에게 미련 따윈 없다는 듯이.”
이번엔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그 정곡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되레 찔러 온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관계, 상대에게 연연하지 않는 관계는 내가 원한 것인데 왜 남의 입으로 들으니 이토록 헐겁고 상처 가득하게 들리는 걸까.
어린 시절 아론이 말없이 떠났던 순간, 그때의 처참하고 씁쓸한 심정이 떠오르자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오히려 마왕의 제안을 반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욕망을 맘껏 해결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계에 대한 마족의 공격이 멈춘다면 나는 적극 환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아론과 마왕, 두 남자를 모두 가지면서 머리 아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었는데도 이상하게 내 심장은 모순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처럼 뛰고 있었다. 나는 아연해진 채로 마왕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그녀를 생각해서도 옭아매는 건 좋지 않아. 적어도 그녀가 도망가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아론은 침묵했다. 마왕은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어두워져서.
“너도 알 텐데. 지금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을 질색하며 달아나고 싶어 하는지. 그녀 얼굴을 볼 때면 매 순간 떠오르는 감정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을 테니까. 널 싫어한다는…….”
“할 말은 그것뿐인가?”
아론은 더는 못 듣겠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마왕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네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네 거칠어진 심장 박동 소리가 내게까지 들려오지.”
마왕은 나를 보았다.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마왕은 그런 나를 매우 기분 좋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서도 전해져. 저 인간의 것과 달리 흥분한 듯 기뻐하는 심장 소리가.”
그것은 기뻐하는 게 아니었지만 정정할 시간 따윈 없었다. 아론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마왕에게 다시 달려든 것이다.
그의 대검이 깨진 바닥에서 빠져나와 마왕의 머리 아래쪽으로 횡단했다. 마왕은 재빨리 팔을 휘둘러 방어했다. 검은 기운이 방패처럼 넓게 퍼져 대검을 튕겨 내자 아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 상태로 몸을 회전시켰다.
쾅.
소리는 작았지만 그 충격은 대단했다. 대검에 맺힌 신성력과 마기가 충돌해 거대한 여파가 일었고 방 안의 모든 것이 날아가거나 찢겼다.
붉고 푸른 비단들 사이에서, 흩어지고 날리는 금빛과 은빛의 실타래 속에서 두 남자의 힘이 번쩍거리며 차츰 소멸해 가는 모습은 지나치게 신비롭고 시선을 압도하는 황홀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였고, 눈 깜빡할 사이의 감상일 뿐이다. 결국 그 여파에 휘말려 나는 벽에 밀쳐지고 말았으니까.
“아……!”
내가 탄성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귓가에 찢어질 듯한 아론의 외침이 이어졌다.
“말레드레드!”
“단순한 인간.”
아론이 나를 돌아본 순간 마왕의 기습이 이어졌다. 아론의 복부에 집약된 마기. 아론은 그 갑작스럽고 강한 힘을 방어하지 못했다. 결국 문을 완전히 부수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아, 아…….”
나는 탄식하고 말았다. 갑자기 뚫려 버린 거대한 구멍도, 그리고 시야에 보이지 않는 아론의 모습도 절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
때마침 소란에 내려온 주인장이 날아간 벽을 보며 기겁했다. 점원 역시 화들짝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시, 신부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주인장은 벽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경악하여 달려오려다가 내 앞에 선 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다, 다, 당신은 대체…….”
그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 걸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끝없이 암울하고 사악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압도당했을 수도 있다. 말을 더듬으며 어버버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마왕의 눈은 뜻밖에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신부님?”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중얼거린 그는 이내 당황해하는 주인장과 점원을 손짓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마왕의 붉은 시선이 내 입가로 향한다. 피가 흐르고 있는 입술을 더듬듯이 바라본 사내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닦았다. 아까 방어막을 형성하느라 소진된 것인지 아론이 심어 놓은 신성력은 반응하지 않았고, 마왕은 내 입가에 묻은 피를 여유 있게 없앨 수 있었다.
“그대, 결혼하는가.”
그 말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잔잔하다. 그는 정말 개의치 않아 하고 있었다. 오로지 흥미롭다는 시선만이 전부인 그에게선 인간계의 대소사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적인 가치관이 엿보였다.
“결혼식에 초대받을 수 있다면 좋겠군.”
그런 말을 하며 웃고 있는 남자. 그는 가히 마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복에 겨운 신부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성기를 밀어 넣는 것만큼 자극적인 일은 없을 테니까.”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에게 나는 짙은 거부감을 표시하려 했다. 그러나 내 입술에서 나오는 건 허망한 신음뿐이었다. 잘못 부딪친 걸까. 온몸의 기운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의식까지 혼미해졌다. 나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마왕의 발 위로 천천히 마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마왕도 제 세계로 돌아가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