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어머나, 무슨 이야기를 그리 다정하게 나누고 계셨나요?”
그때 주인장이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하늘하늘한 고급 비단이 겹겹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론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냉랭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왜냐하면 주인장이 매우 난처하다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보며 상황을 수습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두 분이 함께 보는 것보다 역시 따로 고르는 게 낫겠죠? 이리 오세요. 먼저 신부님부터 보겠습니다!”
나는 주인장 손에 이끌려 내실로 들어갔다.
주인장은 유연한 설명과 함께 각종 비단들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눈이 돌아갈 만큼 휘황찬란한 비단들이 내 시선을 강탈했지만 내 머리는, 내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아까 아론을 마주하고 있었던 그 공간에.
강제로 결혼을 하게 하겠다는 그의 태도에 왜 이리 화가 날까. 아론이 날 부드럽고 다정하게 받아 주며 관계를 시작했기 때문일까. 다정하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차갑게 나오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그 실망감이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아론은 그 다정했던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애절한, 순정의 정석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 거리감이 진하게 느껴졌고 반감이 크게 올라왔다.
“흰색도 좋지만 금색도 잘 어울리네요. 신랑님의 색인 이 우아한 빛깔이요!”
주인장은 내 어깨에 금빛 비단을 올리며 감탄했다. 내 머리칼이 그 위에서 반짝이며 금빛과 은빛의 요란한 눈부심을 만든다. 나는 그 빛의 조화에서 다시 아론을 떠올렸다. 더는 그의 착하고 순정적인 모습을 볼 수 없는 걸까. 날 온전히 위해 줄 거라는 생각도 이제는 그만해야 할까.
“어때요, 맘에 드세요?”
주인장은 거울에 비치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아무렴 어떠냐 싶어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으로는 보석 고르기가 빠르게 이어졌다.
“음, 백작가에서 말해 주신 예산으로 고를 수 있는 건 이쪽이에요.”
보석은 비단보다 그 가격대가 높았다. 최상품의 보석은 가히 저택을 하나 살 수 있을 만큼 값어치가 나갔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보여 주는 보석들로 백작이 어느 정도의 예산을 말했는지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둔탁하고 거친 표면, 빛깔에는 흐릿함이 강하다. 이쪽을 잘 알지 못하는 내게도 그다지 상등품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백작가에 이렇게까지 돈이 없지는 않을 텐데. 아마도 사생아 딸에게 더 많은 돈을 들일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나는 그녀가 보여 주는 작은 돌들을 쭉 살피다가 맨 끝에 있는 투명한 돌에 시선을 주었다. 돌 표면은 반듯하니 이 중에서 가장 돋보일 정도로 영롱해 보였으나 내부에는 깨진 듯한 실금이 요란하다. 그래서 투명도가 떨어졌고 다른 각도로 보면 언뜻 검은 돌이 심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주인장이 ‘아, 그건요.’ 하면서 설명해 왔다.
“캐기 전부터 그런 돌이었어요. 안타깝게도 흠이 없었다면 비싼 보석이 됐을 텐데. 돌이 땅에 묻혀 있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가공업자가 버리기는 아깝고 커튼이나 단추 장신구로 쓰라고 해서 제가 가져오긴 했는데…….”
주인장은 매우 아깝다는 듯이 보석을 바라보았다.
“또 아쉽더라고요. 원래대로라면 이 투명한 보석은 왕관이나 지팡이 등 비싼 장신구에 쓰였을 귀한 보석인데 말이죠. 색감이 청명하니 어여쁘잖아요?”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요?”
“그, 그래요? 맘에 드신다면 이걸로 뭘 만들까요? 목걸이나 반지?”
화색을 띠며 물어 오는 그녀에게 나는 무엇이든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신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팔찌로 할까요? 신부의 팔찌에는 꽃과 보석이 함께 매달리니까요! 태양에 따라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이 벌써 상상이 되지 않나요? 분명 예쁠 거예요! 절 믿으세요, 팔찌로 하면 너무나 잘 어울릴 겁니다!”
나는 그러라고 하면서 내실을 빠져나왔다. 사실 이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결혼식에서 어떤 모양의 액세서리를 할지, 어떤 형태의 드레스를 입을지 정해야 하지만, 도무지 그것을 하나씩 고를 만큼 기분이 나지 않았던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일임하기로 하고 걸어 나왔다.
“정말 제가 골라도 되겠어요?”
그녀는 불안한 듯 다시 한번 확인해 왔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내 확고한 의지를 읽은 그녀는 알겠다며 의욕에 차서 떠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님이 되실 거예요!”
황홀한 그 목소리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설렘과 기대감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라앉은 눈길로 훑고는 돌아섰다.
“……다 되셨습니다.”
내가 내실에서 비단을 고르고 보석을 정하는 동안, 아론 또한 예복을 제작하고 있었다. 아론은 기존에 있던 예복을 입어 보고 고른 모양이었는데, 훤칠한 키에 잘 빠진 몸매, 손질된 금발과 수려한 얼굴이 흰 예복 위에서 그야말로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
“…….”
시선이 부딪치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옷은 또 왜 저렇게 잘 어울려서 기분을 망가뜨리는 것일까. 저런 남자를 몸과 마음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괴리감이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나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기분을 느끼며 가게 문으로 걸어 나갔다.
“어딜 가는 겁니까?”
아론이 놓칠세라 물어 왔다. 움직이지 말아 달라고 하는 점원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론은 기어이 내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기세였다. 나는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잠깐 바깥을 걷고 싶어서…….”
“같이 가겠습니다.”
“옷 제작이 안 끝났잖아.”
“네, 좀 더 해야 하는데…….”
점원은 아론이 서늘한 눈으로 돌아보자 당황해서 말을 바꿨다.
“대, 대충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까요?”
말도 안 된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점원은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었으나 아론은 그 눈을 모른 척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그가 재빨리 예복을 벗어 던졌다. 성급하게 벗는 그 동작에 시종이 놀라는 게 보였다. 나를 그렇게도 따라오고 싶을까. 누가 보면 내가 그의 것을 강탈해 달아나기라도 하는 줄 알 것이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향기로운 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 게 느껴진다. 서쪽 고원을 쓸고, 너른 평원을 돌아 불어오는 바람에는 희미한 꽃 향이 묻어 있었다. 폭신하게 와 닿는 향기와 바람의 손길에 순간적으로 성기고 헝클어진 마음이 풀어지는 듯 느슨해졌다.
“혼자 가면 위험합니다.”
아론이 내 손목을 잡는 순간 기분이 다시 무너졌지만.
“아파.”
내 말에 아론이 멈칫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 도망 안 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아론이 대답했다.
“도망갈까 봐 잡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데려갈까 잡는 거죠.”
“누가!”
그럴 사람이 누가 있냐고 주위를 보라고 대답했으나 아론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없이 불만스럽고 질투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 그 존재가 여기 나타날 리 없잖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론은 잔잔한 살기를 띤 눈으로 말했다.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방심할 수는 더더욱 없고요.”
“……으읏.”
왜인지 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신음을 내고 말았다. 아론은 내게 바짝 다가와 눈으로 나를 사로잡을 것처럼 쏘아보면서 말했다.
“절대 그에게 뺏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광기가 스며든다. 그 짙은 색은 흡사 괴로움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놔, 놔 줘……!”
아론이 내 손목을 꽉 부여잡는 게 아팠다. 아니, 그보다도 나를 얽매 절대 풀어 주지 않을 듯한 눈빛이 무서웠다. 그가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 황금색 심연이!
“으, 으읏…….”
하얀 빛이 뿜어진다. 아론의 손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내게로 막무가내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자의 접근을 어떻게든 막을 겁니다.”
“그, 그만해!”
심장이 쿵쾅쿵쾅 떨렸다. 아무리 좋은 힘이라고 해도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미 아론은 밤마다 내게 신성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론은 자신의 신성력으로 내 몸을 채웠고, 그것은 사악하고 무자비한 소환을 막는 기운의 원천이 되었다. 아론은 그걸 분명히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또다시!
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아……!”
내 비명에 가까운 탄식에 아론이 흠칫 놀란 듯이 물러났다.
“제, 제가…….”
아론의 눈동자가 놀란 듯이 커져 있었다. 제가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당황한 눈이다. 굳어 버린 그를 보며 나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의 달음박질도 천천히 잦아든다.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차갑고 서러운 감정뿐이었다.
“혼자 돌아갈 거야.”
“…….”
“따라오지 마.”
나는 아이처럼 외치고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가 언제 내 뒤를 따라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도시를 빠르게 걸으면서, 도시 전체가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내 상태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생각했으나, 나를 발견하자 화들짝 놀라 빠르게 집안으로 사라지는 도시의 주민을 보건대, 확실히 이상했다.
경계하는 주민들의 눈빛도, 인적 없는 도시의 풍경도, 평화롭고 안락했던 이전 베리스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다.
“다녀오셨어요?”
가게에 다시 돌아오자 주인장이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내가 바로 돌아오지 않아 사뭇 걱정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유가 있는 듯싶어 묻자 주인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부 손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도시에 좀 흉흉한 일들이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