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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45화 (145/220)

145화

“뭐야, 인마…….”

에스더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론은 그 반응에도 꿋꿋하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마차는 어느 쪽에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종에게 마차의 위치를 묻고 있었다. 놀란 듯 새처럼 팔을 파드득 휘저은 시종이 이내 저쪽을 가리키자 아론은 내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황금빛 눈은 내 얼굴을 더듬는 것처럼 느릿했다. 마치 시선 하나에도 제 감정을 알아 달라고 말하듯이.

버거움이 목까지 물결쳐 올라왔을 때 아론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서 가죠.”

뻔뻔함이 저리 자연스럽고 우아한 형태로 나올 수 있을까. 반듯하게 앞서 걷는 아론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다. 그런 감정은 나뿐만이 아닌지 에스더는 멀어지는 아론을 보며 소리쳤다.

“야, 너 가만 안 둬! 상부에 다 이를 거야!”

그 땍땍거리는 아이 같은 협박은 물론 아론에게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더를 향한 내 호감도는 무척 올라갔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마차에 올라타자 시종은 졸지 마부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뜻밖에 손님이 하나 더 늘어난 탓에 시종과 마부는 입을 다물고 마차를 모는 일에만 집중했다. 덜컹거리는 바퀴에, 흔들리는 좌석이 한없이 불편했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고개를 바로 했다가는 막무가내에 뻔뻔함이 극치인 사내와 눈이 마주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리 두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종과 마부가 말을 빨리 몬다고 급하게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바퀴 못이 하나 휘어져 빠진 것이다.

“읏……!”

몸이 휘우청 흔들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나를 아론이 부둥켜안았다. 아론의 단단한 품을 느낀 순간 안도했고 동시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갑옷은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그가 강하고 뛰어난 전사라서 다행이라 느끼면서.

아론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습니까?”

걱정이 묻은 음색에 나는 정신을 차려 그를 밀어냈다.

“괜찮아.”

“바퀴 하나가 완전히 빠져 버린 것 같군요.”

아론은 내 반응을 신경 쓰지 않으며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시종이 곧 문을 열고 죄송하다고 허리를 몇 번이나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한편에선 마부가 빠진 바퀴 못을 다시 끼워 넣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쉽지가 않은지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론이 정중하게 말을 하자 마부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존대하지 않아도 될 신분인데 아론이 존댓말을 하자 무척이나 당황한 듯 보였다. 아론은 그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검을 꺼냈다. 휘어진 못이 악력으론 펴지지 않을 거라 보았는지 아론은 대검을 꽉 쥔 채로, 칼등으로 못을 내리쳤다.

깡-.

주변을 울리는 맑은 소리가 퍼져 나갔다. 못이 일자로 쫙 펴진 게 보이자 마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론은 시종과 마부에게 마차를 들라고 한 뒤 바퀴까지 직접 끼워 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부는 살았다는 듯이 그에게 거듭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마차를 대여해 주고 하루하루 대여비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아론의 선행이 큰 은혜였다. 아론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젓고는 훌쩍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그리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도시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어, 어.”

얼떨결에 고마워하고 말았다. 내가 도시에 잘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대답했던 나는 곧 이게 무언가 이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론은 지금 내가 왜 포목점에 가는지 알고 있을까. 나는 결혼 준비를 위해 비단과 보석을 고르러 가는 길이다. 상대는 라드 일레그레 경이었고 아론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가문이다. 즉 아론은 나를 도와줄 처지가 아니라 마차의 바퀴를 세 개는 더 빠뜨려 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이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아론이 물었다.

“왜요? 어지럽다면 제게 기대시겠습니까?”

“아, 아니.”

친절한 그에게 나는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아론은 늘 배려 깊었다. 오히려 다정하고 섬세한 이 반응이 당연한데도 나는 왜 그를 두려워하는 걸까.

“긴장한 것 같습니다.”

바로 아론의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그, 그렇지 않아.”

저 눈. 감정과 마음의 소용돌이를 모두 내비치는 저 짙은 황금색 눈동자가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론이 버거워 한 손으로 잠시 이마를 가리며 말했다.

“마차가 오랜만이라 조금 어지러울 뿐이야.”

“그럼 잠시.”

아론은 나를 좀처럼 가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팔을 뻗은 그가 손끝을 내 이마로 향하자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작고 은은한 빛. 고요한 신성력이 내 이마로 스며들자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옅어진다. 온기가 피어난다. 나는 신에게 축복을 받는 신민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야 말았다. 아론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괜찮을 겁니다.”

아론의 잔잔하고 가만가만한 목소리가 마음을 부드럽게 휘젓는다. 그것은 딱딱하고 메마른 내 마음을 습습한 평화로 유도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론이 보이는 행동과 내게 주는 관심들이 너무 버거운데, 아론은 그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부드럽고 순한 면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내치지도, 끊어내지도 못하고 아론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성문이 보이는군요.”

아론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복잡하고 다난한 심정을 떨치듯 머리를 흔들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리스의 포목점은 작았다. 그러나 입구에서부터 꽃의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짙은 꽃밭에 갇힌 기분으로 포목점 안으로 걸어 들어온 우리는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이하는 주인장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겨야 했다.

“어머나! 이렇게 인물이 훌륭하신 두 분이 동시에 오다니요? 우리 가게에 복이 오려나? 벌써 제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아요! 저기, 저기, 신랑 분!”

정신이 없다. 나는 멈칫했지만 아론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부른 게 맞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색을 좋아하죠? 어떤 색이든 말해 줘요! 그 찬란한 금발과 근사한 눈동자에 쏙 어울리는 비단으로 구해 올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이번엔 나를 보며 정겹게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신부! 정말 아름다워요! 신부란 늘 아름답기 마련이지만 그대는 정말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색감의 극치군요! 어쩜 이리도 예쁜 은빛과 은은한 보랏빛으로 태어났을까요? 전 생전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아름다운 빛깔은! 정말 많이 듣죠? 아주 아름답다는 말이요!”

“아, 그게…….”

당황하자 그녀가 쑥스러워하냐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신부의 매력은 역시 이런 거죠. 신랑님, 정말 좋겠어요! 이런 아름답고 청초한 신부라니.”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지는데 아론은 그에 박차를 가했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

나를 보는 아론의 눈길이 뜨거웠다. 주인장이 눈매를 둥글게 휘면서 좋아했다.

“호호호! 역시 그렇다니까! 자, 그럼 기다려 봐요! 맘에 드는 비단이 있으면 말해 주시고요! 그동안 저는 제가 골라 놓은 가장 아름다운 비단을 챙겨 올게요!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녀가 하인을 데리고 가게 뒤편으로 총총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론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금세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생각이야?”

아론이 내 뒤쪽에 놓인 비단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말레드레드에겐 흰색만큼 금색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도대체 왜 여길 따라와서…….”

“신랑 행세를 하냐고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론의 눈에는 그다지 동요가 없었다. 이런 상황도 이런 질문도 예상한 것처럼 깊고 침착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게 아닙니다. 결혼을 찬성해서 온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생각해 보니.”

아론은 내 주변에 놓인 비단을 둘러보았다. 작은 포목점인데도 다양한 빛깔의 비단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 알록달록하고 오색찬란한 색감들이 저를 자랑하듯 반짝거린다. 주인장이 과장되어 말하긴 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비단의 배열이었다.

“말레드레드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보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요.”

“그, 그걸 알고 싶어서 따라왔다고?”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제 결혼식에서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요.”

“……!”

한마디로 이 결혼이 성사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아닌가?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이 자신감,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것일까. 그가 설사 마왕을 죽여 제국민의 마음을 얻더라도 결혼은 나와 하는 것이다. 신분으로 누른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함부로 얻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알 텐데.

나는 주먹을 쥐며 말했다.

“난 너와 결혼한다고 말한 적 없어.”

“대답은 듣지 않을 겁니다.”

“강제로 하겠다고?”

아론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난폭했고 부단하게 흔들렸다. 날카로운 감정에 다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눈동자인데도 그는 포기할 수 없이 한 자 한 자, 무게를 실어 말했다.

“네. 반드시, 요.”

벌떡.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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