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그리고 이리 가라고 하셨습니다.”
시종은 내 눈치를 살피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어떤 비단으로 옷을 만들지, 어떤 보석으로 장식한 목걸이와 팔찌를 찰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포목점에 연락해 놓았습니다. 하루만 외출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방긋 웃는 시종에게 카란이 투덜거렸다.
“마물 습격에, 부지휘관 자리도 바쁜데, 결혼까지 준비하려면 그녀는 몸이 세 개여야 하는 거야, 뭐야.”
“네?”
“아니. 혼잣말이야.”
카란은 당혹해하는 시종에게 냉큼 대꾸하고는 나를 보았다.
“어때. 외출할 건가?”
나는 망설였다. 가게에 가서 한가롭게 결혼 예복을 고를 정신이 아니었다. 내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현실, 받아들여야 하는 결혼의 무게와 미래가 너무 부담스럽기만 하다. 거기다가 아론과 마왕과의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내 머리를 골치 아프게 하는 주된 고민거리였다. 망설이던 나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오늘은 어렵고 내일 오전에 가게로 갈게.”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이른 아침에 마차를 끌고 다시 여기로 오겠습니다!”
시종은 화색이 되어 답변했다. 그가 기쁜 걸음으로 빠져나가고 방 안에 침묵이 감돌자 그제야 카란이 궁금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려 왔다.
“근데 왜 내일 간다고 했지? 오후에 전투가 없으니 나가기 나쁘지 않을 텐데.”
“지휘관께 허락을 맡아야 하잖아요.”
“내일도 다르지 않잖아?”
“내일은 본대 전체에 훈련이 있어요. 지휘관이 바쁘실 겁니다.”
“그 말은.”
카란이 눈을 빛냈다.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눈빛 같았다.
“지휘관에게 이야기도 안 하고 빠져나가겠다는 건가?”
“에스더 경께는 할 생각입니다.”
“흠.”
카란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 턱을 손으로 쓸면서 곤란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표현한 그는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잘해 보게.”
카란의 장점은 구질구질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지휘관의 천막으로 갈 생각이었다. 옷을 벗으면서 어젯밤의 흔적이 옅어진 걸 보았다. 진한 관계란 건 여운을 남기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라지고, 잊혀지고 만다. 그게 좋았다. 깔끔하면서도 뒤에 걸리는 게 없는 관계가.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지만 아론은 나와 달랐다. 아론은 이 관계에 자신의 흔적을 짙게 남기고 싶어했다. 흔적이 옅어지면 질색하며 같은 곳에 반복해 글자를 남기듯 내게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주입했다. 그런 그가 마냥 싫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그래서 더욱 미치겠는 것이다.
“훈련소에요.”
쌀쌀맞게 대꾸하자 주위의 지휘관들이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아론과 나 사이에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밤에는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남녀가 낮만 되면 왜 저러는 것일까 눈으로 묻는 듯한 지휘관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그들은 아론과 나의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게 후회가 가득한 일이 될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듯싶었다. 황제에게 이곳에 남아 지원을 부탁받은 에스더만이 멋쩍은 듯이 볼을 긁으며 ‘어디서 찬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너스레를 떨었을 뿐.
아론은 잠시 나를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럼. 다 모였으니 이야기를 시작하죠.”
화두는 단연 마족의 다음 공격이었다. 마왕이 등장하면서 흐지부지 끝난 습격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불안을 키웠다. 더 많은 대군을 몰고 와 본대를 초토화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황제는 따라서 이 본대에 더 많은 병력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추가로 투입될 사제들이 3천 명 이상 될 터였다. 그리하면 이곳은 더는 작은 본대라 불릴 수 없었고, 하나의 거점 방어지역으로 승격되어 주도적으로 수도를 방어해야 했다.
아론은 침착하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병력이 늘어나는 여부와 상관없이 고위 마족과 더 강한 존재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작은 무리를 소탕하는 작전이 아닌 우두머리를 죽이는 작전으로, 훈련을 거듭할 겁니다. 마왕이 쳐들어와도 문제없을 정도로요.”
아론의 말에 지휘관들의 몸짓이 눈에 띄게 커졌다. 동요한 그들은 이 본대가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고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사악한 존재 중에서도 가장 악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를 문제없게 상대하자는 아론을 기이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지휘관도 있었다. 아론은 그들의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
“훈련을 강도 높게 할 것입니다. 마계의 존재라면 누구도 살려 두는 일이 없도록요.”
아론의 조용하면서도 살기 어린 말에 지휘관들은 긴장한 것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에스더 경마저도 아론의 태도에 오싹하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마족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는 사령관. 지휘관들은 모두 그런 아론을 감격스럽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만은 다르다. 나는 그런 아론을 비뚤어지게 보고 있었다.
내 상대를, 내 경쟁자를 반드시 처단하고 말겠다는 질투 어린 남자로.
다음 날 아침, 나는 소리 없이 숙소에서 일어났다. 아직 바깥은 동이 트지 않아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몸이 뻐근했다. 어제도 밤새……. 나는 잠시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는 침대를 정리했다.
바로 옆 천막에서 잠을 자고 있을 아론을 생각해 가만가만히 몸을 움직였다. 곧 천막에 시종이라 추정되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이 말해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차를 타고 본대를 빠져나가기 전 에스더 경의 천막에 들러야지 생각하면서.
“어, 웬일이에요?”
에스더는 자고 있지 않았다. 한 손에 검을 든 채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공터 바로 뒤에 위치한 에스더의 숙소는 언제든 그가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듯싶었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가 말했다.
“오늘 하루 외출하려고요.”
“아, 그래요? 잘 다녀오세요. 근데 제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에스더는 천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론나이드에게 말했다면 제게 다시 말할 필요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잇던 에스더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내 뒤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고,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았다. 어젯밤에도 거칠고 뜨겁게 몸을 섞은 상대에 대한 조건반사랄까.
“제게 말하지 않았거든요.”
내 등 뒤에 선 남자를 느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숨 막힐 듯한 체향이 다시 나를 가두듯 덮어 오고 있었다.
“제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론의 눈길이 내 옆얼굴에 닿았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 어? 정말 그랬어요?”
에스더는 무척 당황한 것처럼 나와 아론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정답을 구하는 그에게 우울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아론이 어떻게 알았을까. 조심스레 움직이는 내 기척을 읽고 따라오기라도 한 걸까. 새벽잠이 왜 이리 없는 녀석이냐고 새삼스럽게 짜증이 일 때 에스더가 볼을 긁적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아론을 나무랐다.
“아랫사람이 말을 하는 데 겁을 먹는 건 윗사람이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러니까 아론나이드. 다 자네 탓이라는 거지.”
에스더가 빙긋 웃자 아론의 눈빛이 조금 매서워졌다.
“에스더 경이 관여할 문제는 아닙니다.”
“뭐, 그렇겠지. 남녀 관계 문제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지휘관에게 외출을 허락받으러 왔어. 자네랑 내가 이 본대의 가장 높은 사람이니까. 결과적으로 그녀 행동이 틀린 건 아니란 걸 알 거야.”
내 행동을 옹호해 주려는 것인지 열심히 내 편을 드는 에스더였다. 아론은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술을 떼면서도 시선은 내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틀렸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나는 멈칫했다. 내가 외출을 해도 된다는 걸까?
“전 저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을 뿐입니다.”
“뭐?”
“……!”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몰라도, 에스더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다시 아론을 노려보았다.
“외출을 따라가는 상사가 어디 있나?”
“이런 때에 혼자 외출하게 둘 수 없습니다.”
“말레드레드가 어딜 가는 줄 알고?”
기막히다는 에스더에게 아론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대꾸했다.
“베리스라는 도시에 갑니다. 그곳에 가장 가까운 포목점이 있거든요.”
“어떻게…….”
이번엔 내가 놀라서 묻고 말았다. 아론은 내 뒤쪽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시종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본대에 들어오려면 여기에 온 목적을 밝혀야 합니다. 그는 메리옹 백작가에서 혼약에 대한 일로 말레드레드를 만나러 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구체적인 사정을 알았습니다.”
본대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군사 기밀을 다루는 만큼 낯선 외부인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는데, 아론은 본대를 지휘하기 때문에 방문자의 신분이나 목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듯싶었다.
“이런, 아론.”
에스더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 정말, 그녀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군.”
에스더는 나를 대변한 것처럼 그를 꾸짖었다.
“지나칠 정도야. 너무 과하다고.”
“잘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기가 한결 수월하군요.”
“응? 무슨 말씀?”
에스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지도와 서류를 넘겨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드는 에스더에게 아론이 말했다.
“제가 외출해 있는 동안 본대를 지휘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