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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43화 (143/220)

143화

살생에 대한 확신. 그건 아무 때나 쓰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최강의 전사이자 엄청난 신성력의 사제였으니까. 나는 이제 가슴이 쿵쿵 불편하게 뛰는 것을 넘어서 불길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론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절 막을 사람은,”

설사 말레드레드라도.

“아무도 없을 겁니다.”

자신을 막지 못할 것이라, 그는 움츠린 내게서 확신하고 있었다. 그 자신감과 신념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타올라 내게 홧홧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문득, 나는 예감이 들고 말았다. 그가 황제를 넘어서 마왕까지 무너뜨리고 말 거란 걸.

“약속해요.”

숨죽인 그 목소리가 마침내 목표를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을 말이다.

“아읏…….”

그날 밤, 아론은 내 침대를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마왕과의 일, 황제와의 일, 그리고 혼처와 관련된 일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을 비웃듯이 나를 안아 왔다. 나는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했지만 무시당했다. 아론은 내 거절이 사소하다는 듯이 나를 잡아당겼고, 나는 오래지 않아 그의 아래 발가벗겨져 그의 성난 성기 아래 신음을 크게 질러야 했다.

“우, 우읏, 아, 아론……!”

“좋잖아요? 이렇게 안쪽까지 깊게 쑤시니까.”

아론의 달콤한 듯 무자비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좋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화가 치밀었으나 아랫배가 울렁거리며 엉덩이가 흔들리자 그 기분은 다시 극도의 쾌락으로 변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때요, 기분이?”

소름 끼치도록 좋다. 그가 허리에 힘을 주어 아래로 누를 때마다 그곳에 매달려 쾌락의 열매를 따먹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좋다고 말하는 거죠?”

아론은 내 기분을 읽으면서 능숙하게 삽입을 계속했다. 동작이 빨라질수록 열기가 거세졌고, 내 안의 장기와 신경들도 치열하게 열이 올랐다.

“아흣, 아응……!”

나는 우는 사람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야릇한 밤의 탄성은 천막 밖으로 튕기듯 번져 갔고, 천막 밖의 그림자들이 놀란 것처럼 멈춰 서면 나는 그때야 깜짝 놀라며 허벅지를 움츠리고 말았다.

“왜요, 더 느끼는 거예요?”

그러나 아론은 그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대담하게 손으로 내 가슴을 쓸면서 입술을 어깨에 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가 이러는 거 다들 아니까.”

“……!”

그 말이 얼마나 내게는 치욕스러운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 모르게 관계를 진행하고 싶었다. 내가 그와의 연애에서 바란 것 중 자유연애 다음으로 비밀연애가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아론은 그 모든 것을 깨 버린 상태였다.

“부끄러워 할 거 없어요.”

“크읏…….”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한기가 섞인 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자극해 왔다.

“아니. 안쪽이 조이는 걸 보니 사람들이 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뭐…… 아읏!”

나는 아론이 갑자기 크게 허리를 뒤로 빼자 신음을 내고 말았다. 엎드린 채로, 아론을 받아들인 터라, 그의 다음 동작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등을 누르던 무게가 사라진 공백감에 흠칫했던 나는 아론이 나를 그대로 껴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히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안을 쿡 찔러오는 커다란 성기,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 내부가 홧홧했다.

“아, 아…….”

어릿거리면서도 가물거리는 시야로 몸을 흔들자 아론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결합 부위가 더욱 맞물리도록 만들었다.

“흐읏……!”

나는 몸을 부르르 떨자 아론이 이번에 손을 가슴 위로 보냈다. 폭신폭신한 살덩이를 뒤에서부터 움켜쥔 두 손은 이내 둥글게 움직였고, 나는 또다시 희미한 열기가 가슴 사이로 번져 가는 걸 느꼈다.

“……향기가.”

아론은 헐떡거리는 내 목 뒤로 얼굴을 묻었다가 그 체취를 맡고서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요.”

“……!”

“옛날같이, 사랑스러워.”

아론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듯했다. 울고 있던 소년 옆에 앉았던 한 소녀로 나를 기억하면서.

그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나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방금까지 거칠고 강압적으로 나를 탐해 왔던 남자가 한순간 서정적인 그때로 돌아간 듯하다. 제가 가진 본질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서 흘러나온 상냥한 목소리가 그가 원래 어떤 남자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시선이 부딪치자 아론의 입술이 굳게 잠긴다. 부드러웠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식었고, 뜨거운 분노가 그 사이로 얽혀 들어갔다. 나를 원한다는 감정과 내가 밉다는 감정이 섞인 듯한 그 불은 마침내 내 몸 안으로 수십 줄기로 쏟아졌고, 나는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로, 그의 사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아론이 절정에 도달해 나를 깊게 끌어안았을 때, 나 또한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스러지듯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막을 수 없어서 두 눈을 감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렇게 늘어진 천막의 천장을 보며 누워 있던 것이다.

“……어?”

몸은 믿을 수 없이 깨끗했다. 밤새 정사로 시달렸던 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아론이 씻겼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천천히 다리를 움츠렸다. 어제 고단한 정사의 흔적으로 허벅지와 사타구니 사이가 화끈거리는 것만 빼면 내 몸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읏.”

그러나 거울을 보자 그 생각을 달리했다. 전신에는 아론이 입을 맞춘 흔적이 가득했다. 발갛게 꽃물이 든 것처럼 하얀 살결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마치 내 것이라고 지도에 영역 표시를 하듯이 온통 흔적을 남겨 놓다니. 그 흔적은 목덜미에도 있었고 입술에도 있었다.

입을 자주 맞추지는 않았지만, 한 번 할 때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키스하던 아론은 내 입술을 부풀게 만들어 버린 상태였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빨갛게 터져 버린 아랫입술을 보며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거울을 보며 느꼈던 곤란함은 밖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서 느꼈던 곤란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부러워하는 것처럼도, 질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누군가는 탄식하는 것처럼 노려보기도 했다.

“처신을 제대로 하세요.”

사제가 나를 지나치면서 흘리고 간 말은 공격적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일레그레 가문에서 혼약 요청이 온 거예요?”

그 이유는 호기심 많고 내게 관심 많은 레너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만난 레너드는 벌써 소문이 쫙 퍼졌다고 말하면서 내 상대가 진짜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전 아론나이드 경이 될 줄 알았거든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레너드는, 나와 아론의 행복한 결말을 상상했었다고 말했다.

“라드 경도 멋있지만 말레드레드하고는 아론나이드 경이 더 잘 어울려서요.”

“…….”

“무, 물론 제가 전혀 관여할 바는 아니고, 더, 더욱이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멋쩍다는 듯이 변명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지휘관이 훈련소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와서도 안 되지만 아론과 단둘이 있을 때의 그 침묵이, 그가 주는 긴장감이 너무나 불편해서 이리로 올 수밖에 없었다.

“숙소로 갈 거예요?”

내가 대꾸 없는 것에 불안해진 레너드가 재차 물어 왔다.

“아뇨…….”

숙소에는 답해야 하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는 나뿐만 아니라 메리옹 백작에게도 전달되었을 터였다. 공식적인 답변은 보통 메리옹 백작이 상대 가문의 가주에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전장에 있는 터였다. 따라서 당사자인 내가 직접 대답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메리옹 백작이 기뻐하면서 혼처가 들어왔다고 연락할 수도 있고…….’

어쩌면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 생각할 때, 무슨 예시라도 내린 것처럼 손님이 왔다는 연락이 전해졌다.

카란의 천막으로 가자, 옷이 헝클어진 시종 하나가 서 있었다. 바람에 휘날린 것처럼 머리도 엉망진창이었고, 소매도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급하게 달려온 것처럼 보이는 사내는 나를 알아보고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누구…….”

“메리옹 백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는 단번에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감춰 둔 편지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밤새 달려서 왔습니다. 메리옹 백작님께서 매우 흥분하셔서 오늘까지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거든요.”

목이 마른 듯 거듭 입에 침을 발라 가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거라고요. 제 목숨보다 더 중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죠!”

시종의 목숨보다 중한 일. 그것은 귀족의 결혼을 의미했다. 나는 카란이 그에게 물컵을 내미는 것을 보면서 양피지를 열어 보았다. 내 예상대로 거기에는 흥분한 듯한 귀족의 글씨가 거칠게 담겨 있었다. 메리옹 백작은 황제가 추천한 혼약의 요청이 매우 큰 영광이며, 가문에 있어 아주 큰 경사가 될 거라고 적었다. 일레그레 가문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집안이니 마땅히 결혼해야 하며, 내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

“아가씨께서 편지를 받는 것을 반드시 확인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죠.”

시종은 연습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감정 없는 그 미소를 나는 잠깐 응시했다. 이 양피지에는 결혼에 대한 내 의사를 묻거나 내 상태가 어떠한지를 살피는 문장은 없었다. 눈앞의 시종처럼 감정이 없는 편지였다.

시종은 애써 웃음을 유지하면서 무언가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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