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론은 말이 없었다. 그 고요한 성기사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은 심계가 깊었다.
“네가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다면, 나는 그 섬에서 너를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그저 죽을 목숨으로 내버려 두었겠지.”
우아한 황제의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섬뜩하고 맹렬했다. 정으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냉혹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론은 그 날 선 눈빛에도 동요가 없었다. 그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있었을 뿐이다. 오래전에 그 기대를 극복했고, 그래서 더 반응할 게 없다는 듯이.
황제는 그런 아론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가를 좁히면서 우아하게 말꼬리를 내렸다.
“부디 내 선택을 실망스럽게 하지 말렴.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야.”
황제는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소환사처럼 쓸데없는 건 없지. 소환사에게 중요한 건 인기가 아니라 집중력이야. 어떤 게 중요한지, 어떻게 위험한지 구분하고 집중해서 싸우는 머리가 필요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잘하리라 믿는다.”
황제는 단순히 전투만을 빗대어 말하는 게 아니었다. 황제는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돌려서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황제에게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그 정중한 감사 인사에 황제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아론은 나를 따라서 몸을 돌리려다가 황제의 부름에 멈칫했다.
“어디 가? 너보고 나가란 것은 아니었는데.”
아론이 고개를 돌리자 황제가 빙긋 웃었다.
“마왕을 보았다며?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네 입으로 듣고 싶구나.”
아론은 나를 보면서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천막을 나오자 나는 검을 든 채로 경계하고 있는 수천 명의 정예병들을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그들은 대열을 갖춘 채 서 있었고 무거운 얼굴로 눈썹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무거운 분위기는 내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지팡이를 갑자기 꺼내 든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내 목을 자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입술도 달싹이지 않고 빠르게 발을 옮겼고, 마침내 황제가 있는 천막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폐하와 면담했다면서요?”
뜻밖에도 내 숙소로 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레베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에는 차가운 반감이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뒤로 닫혀 있는 천막을 보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폐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할까. 레베카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예상했다는 듯이 차갑게 웃었다.
“뭐 대충 예상은 가요. 주제 파악을 하라는 거였겠죠.”
“여길 왜 온 거죠?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요? 참 할 일이 없으시네요.”
“뭐예요?”
레베카의 눈이 사납게 올라갔다. 어떤 면에선 그녀는 알기 쉬운 사람이다. 반감과 호감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람만큼 상대하기 쉬운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적당히 하라는 듯이 말했다.
“전 이제 쉬고 싶어서요.”
그만 가라는 내 통보에 레베카는 입술을 깨물며 비켜 주지 않았다.
“도와주러 온 거예요. 그쪽이 감당 못 해서 창백하게 질린 게 보이니까.”
“…….”
“적당히 제 주제를 파악하면 짐승도 살길이 열리는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다르겠어요? 그러니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고, 제 주제에 맞는 남자를 골라요.”
“주제에 맞는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예요?”
기분이 이상해 떠보자 레베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라드 일레그레 경이요.”
“……!”
“그분도 당신에겐 과분하지만 그래도 초라한 인생에 그런 행운이라도 있어야 살맛이 나지 않겠어요?”
어찌 그녀가 그것을 알고 있는 걸까. 동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우쭐한 얼굴로 특별히 말해 준다는 듯이 답했다.
“아버지께서 폐하의 명으로 당신의 행적을 조사했거든요. 그러던 중에 당신에게 관심을 표현했던 몇몇 남자들을 찾게 됐죠. 특히 당신에게 열렬히 맘을 표현했던 보노아 가문의 소환사도 있던데, 그보다는 라드 일레그레 경이 월등히 좋은 상대니까요. 제가 추천했죠. 그로 하라고요.”
나는 그녀가 선심 썼다는 듯이 말하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를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눈빛도, 위하는 척 무시하는 말투도 불쾌했다. 레베카는 그런 내 처참해진 심리를 읽은 듯이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이 일레그레 경하고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요. 거짓이 아니에요.”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레베카는 한층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깊이,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란 한없이 차갑고 이기적이란 것을 안다. 레베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레그레 경을 선택하세요.”
“이만 가세요.”
나는 그녀를 밀치며 내 숙소로 들어가려 했다. 레베카는 움찔했다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나는 잡힌 순간 어깨에 힘을 풀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쳐 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기사인 레베카의 악력과 속도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녀는 쳐 내려는 내 손을 도리어 붙잡아 뒤로 꺾어 내리며 귀에 속삭였다.
“좋은 말로 충고할 때 떨어져요.”
“……읏.”
나는 신음을 내지 않으려 했다. 조악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으려니 레베카가 나를 밀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뜻한 음성으로 말해 왔다.
“우리 가문에선 조만간 아론나이드 경에 정식으로 사람을 보낼 거예요. 혼약을 위해서 말이죠.”
“…….”
“폐하께서도 분명 지지하실 테고. 부족함이란 없는 세기의 결혼이 되리라 장담해요.”
레베카는 한 자 한 자 행복해하며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가 물끄러미 보고 있어야 했다. 그녀의 자신감과 추진력이 한편으로 부러웠다.
천막으로 들어온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훈련소에서 나오자마자 황제를 보러 간 탓에 머리도 헝클어졌고 갑옷도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이 상태로 어떻게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황제가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 황제가 말한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녀가 말한 혼처를 감격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이 몸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
나는 거울 속 질끈 묶은 은발과 어둡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 속엔 거울을 보는 내가 살고 있었고, 그 나는 더욱 침울하고 암담해 보였다. 내면의 내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현실에 수긍하며 정숙한 귀부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아론과 마왕과 관계하며 즐거워했던 내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강압적인 길 하나가 제시된 셈이었다. 갑옷을 풀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나는 어떻게야 하나 더욱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황제는 그날 돌아갔다. 잠깐 본대를 둘러본 그녀는 작은 진영이지만 훌륭하게 관리되어 마물과 싸우고 있는 용감한 전사들의 집합소라고 칭찬해 지휘관과 소속 사제들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황제 아드리아의 방문으로 사기는 한없이 올라갔고, 우울해진 사람은 나와 아론뿐이었다. 아론은 어김없이 그날도 내 숙소 주변에 신성력 작업을 했고, 그날 밤 나를 찾아왔다.
“…….”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그녀와 만난 이후로 그의 얼굴은 깊은 시름에 잠긴 듯했다. 펴지지 못했다. 하고픈 말이 무수한 별처럼 흐르는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괜히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띄우고 말았다.
“일레그레 경에게서 혼약의 의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어.”
“……!”
그것은 황제가 떠난 동시에 전달되었다. 기묘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따라서 나는 황제가 최대한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고 싶어한다는 의중을 읽고 말았다.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게 치워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한층 더 어두워진 아론의 분위기를 느끼며 눈으로 그 편지를 가리켰다. 아론은 내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탁자에 놓인 고급 서한을 발견했다. 일레그레 가문의 상징인 나뭇잎이 엮인 종이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론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 편지를 집어 내용을 읽고는 나를 보았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농담이지?”
다름 아닌 폐하께서 주선한 혼처다. 이게 그냥 편지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나는 허탈함과 당혹스러움을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빠르면 이번 달에 결혼할 거야.”
“일이 그렇게 순순히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어떤 확신으로 그는 말하는 것일까. 바람이 너무 커져서 오만으로 바뀌어 버린 걸까. 아무리 그라도 황제의 명을 무시하며 나를 얻을 순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속이 무너져 처참함으로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아론.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거야.”
“황제보다 더 인정을 받는다면 결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 황제보다 더 인정을 받는다면, 이라니. 아론은 오래 고민한 것처럼 눈을 일렁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마왕을 죽이면 제가 무엇을 하든 절 방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나는 그제야 아론이 어떤 원대한 계획을 꿈꾸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마왕을 죽여서 황제보다 더한 인정을 받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아론의 예감은 물론 맞았다. 그가 만약 마왕을 죽인다면, 황제 아드리아도 국민적인 영웅이 될 그가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와 결혼하는 것을 막을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더듬고야 말았다.
“무, 무슨 말이야. 마왕을 어떻게 죽여.”
아론의 눈빛이 암연히 빛났다.
“저번에 부딪쳤을 때 느꼈습니다. 제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요. 검으로 그를 내리쳤을 때, 분명히 전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