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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41화 (141/220)

141화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소탈해 보이는 듯한 태도에는 그러나 무게가 있었고 암울한 분위기가 있었다. 황제는 엄숙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와야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먹질 않으니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짝 고개를 수그린 나를 찬찬히 살피는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두려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내 눈으로 직접 어떤 아가씨인지 확인해야 했지.”

마침내 황제는 슬쩍 웃었다. 40대 중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젊은 외모의 그녀는 웃을 때에야 조금 나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살짝 입가에 주름이 졌을 뿐이다. 아론이 따뜻한 금발의 미남자라면, 아드리아는 짙은 갈색 금발을 소유한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는 웃을 때에도 다정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나는 그녀가 나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고 말았다.

아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움찔해서 더욱 어깨를 좁혔다. 아드리아는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살피고 이야기해 보니 너는 아론처럼 꽉 막힌 녀석은 아닌 거 같군.”

“…….”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아들었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법 온건하게 말하는 그녀에게서 내 주제를 파악하라는 경고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제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론나이드 경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히면 될까요?”

“네가 밝히는 것보다 다른 혼처가 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아론이 널 완전히 포기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드리아는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순순하게 응하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호, 혼처요?”

“그래. 혼처.”

나는 결국 고개를 들고 말았다. 황제가 직접 권하는 혼처라니 과연 어딜까. 그녀가 날 벌주기 위한 것이라면 끔찍한 남자를, 아론에게서 눈을 돌리게 할 것이라면 괜찮은 남자를 소개할 것이다. 무엇이 됐든 거부할 수 없는 상대가 될 거란 생각에 낙담해 듣고 있으려니 황제가 질문으로 내 기억을 건드려 왔다.

“들어 보니까 네게 호감을 표하는 성기사가 있었다고 하던데?”

“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고 말았다. 아드리아는 우아하게 웃었다.

“지나온 행적을 떠올려 봐. 네게 유난히도 얼굴을 붉히면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던 사내가 잊지 않았던가? 그런 걸 잊을 정도로 허술한 머리는 아닐 것 같은데.”

나는 문득 기억 속에서 한 남자를 떠올렸다. 라드. 시찰단을 하며 만났던 일레그레 가문의 성기사를 말이다. 내가 멈칫하자 황제가 중얼거렸다.

“생각났나 보군.”

“…….”

“그래. 괜찮은 가문에 성품도 훌륭한 청년이야. 외모도 그 정도면 반반하지. 네게 나쁠 건 없어. 메리옹 백작도 그 정도 신분의 사위라면, 널 가문의 정식 일원으로 맞이하려 들 거야.”

황제는 어느샌가 다시 웃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조건이라고 말하는 듯이.

“백작가의 정식 딸로 들어가서 수도 가문의 부인이 된다. 이만하면 억지로 하는 결혼이라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는 걸 느꼈다. 그녀는 지금 내 의견을 묻고 있는 게 아닐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던 나는 서둘러 의구심을 표현했다.

“라드 경께서 이제 절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황성으로 보고하러 온 일이 있어서 직접 물어봤지.”

나는 움찔했다. 황제는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아직 네게 마음이 있다고 하더군.”

“…….”

“무엇보다 방정맞을 정도로 시끄러운 라드의 조카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엄청 신나하던데? 널 칭찬하면서. 너처럼 아름답고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했지.”

비키를 말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어떤 얼굴로 황제에게 내 칭찬을 했을지 새삼 상상이 가서 아연해지고 말았다.

“일레그레의 가문은 벌써 널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어.”

“저, 저는…….”

“그래, 말레드레드. 혼처가 좋다고 생각하나?”

황제가 주선하는 혼처.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는다. 백작 가문의 일개 사생아로 태어나서, 수녀원으로 끌려갔던 내가 어중간한 소환사가 아니라, 빛나는 귀족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주선 아래,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수도 가문과 결혼하는 나를 메리옹 백작은 감격해서 바라볼 것이다. 복덩이라고 나를 추켜세울 수도 있다. 질투 어린 이복형제들의 시선을 받으며 라드의 팔짱을 끼고 결혼할 나를 상상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이란 어김없이 등장하는 두 남자로 무너지고 만다.

두 발로 서서 나를 응시하는 청년, 그의 뒤로 검은 머리를 한 이종족의 남자도 있었다. 나는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역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나를 보면서 의외란 듯이 툭 말을 내던졌다.

“왜 그러지? 비위가 상했다는 얼굴인데.”

가감 없는 표현에 적의는 없는 듯했다.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볼 뿐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벅찬가?”

벅차다. 그렇다. 그 표현은 어떤 의미에선 정확했다. 좋은 혼처를 맞이해 결혼을 한다는 것이 벅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두 남자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결혼을 한다는 것이 버거웠다. 마치 소화하지 못할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부담스러워졌다.

그 둘을 두고서 결혼해? 내가?

이런 느낌으로,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낄 때 황제가 선심 썼다는 듯이 말했다.

“말해 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정말일까. 순수한 호의인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표정은 유순했다. 정말 그렇게 해 주겠다는 듯이. 나는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의젓한 자태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다. 이 나라의 군주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말에 힘이 있었고 결단력이 있는 여인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

그때 문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아는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밀치고 엎어지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마침내 대장 기사와 아론이 동시에 들어왔다. 대장 기사는 몹시 곤란한 얼굴로 황제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말씀드려도…….”

“됐다.”

황제는 나가 보란 듯이 손을 휘저었다. 대장 기사가 나가자마자 아론은 나를 바라보고는 걱정된다는 듯이 다가왔다. 황제가 혀를 찼다.

“누가 이 방에 있는지도 무시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론은 재빨리 반박하며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제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엎드려서 인사를 받는구나.”

“폐하.”

“그래, 무슨 일로 나와 말레드레드와의 오붓한 면담 시간을 방해하는 거지?”

오붓하다고? 나는 황제가 일부러 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절한 순간을 방해한 아론에게 면박을 주려고 말이다. 아론은 기죽지 않고 말했다.

“결혼 이야기라면 제가 먼저 폐하와 면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방지긴. 내가 만나고픈 자를 고르는 건 네가 아니다. 이곳에 있다 보니 황제에게 올려야 하는 예법도, 마땅히 가져야 하는 염치도 사라진 모양인데.”

황제는 가볍게 조소했다. 차분하지만 굳어져 있는 아론을 유심히 살피던 황제는 피식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불안했나 보구나. 내가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

“…….”

“네 결혼을 무산시킬까 봐 불안했던 거야. 그렇지?”

“폐하. 저는…….”

황제는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의견을 듣기 싫다는 표시였다. 아론은 낯빛이 더욱 어두워져서 입술을 다물었고 황제의 다음 처분을 기다렸다. 황제는 그에게 바짝 다가와 그를 쳐다보았다. 장신인 아론 때문에 올려다보는 형상이었지만 황제의 기상은 엄숙하고 무거워서 상하관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겁이 많아졌구나.”

아론의 입술은 굳게 닫혔다. 황제가 자신을 읽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즐기는 얼굴로 얼어붙은 자신의 조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이곳에 있는 동안 대범하면서도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결단력 있는 자가 되기 바랐건만. 어쩐지 그 반대가 됐어. 작은 것에도 불안해하고 누군가의 등장에도 벌벌 떠는 소심한 사내가 되어 버렸어. 그게 무엇 때문인지.”

황제는 나를 보았다.

“아니, 누구 때문인지. 이제야 알겠구나.”

“…….”

아론은 침묵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순종하는 모습이었지만 황제는 믿지 못하는지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고는 다시 뒤로 돌아가 고급스러운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여유롭게 앉아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확실히 황제다웠다.

“아론, 아론.”

황제는 노래하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론은 그 부름에 고개를 들었고, 황제의 냉랭한 눈과 마주쳤다.

“네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한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시대야. 우리 세계를 노리는 사악한 무리가 제국을 전복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지. 이런 때에 매혹적인 것에만 한눈을 판다면, 우리의 패배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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