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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40화 (140/220)

140화

나는 놀라서 카란을 쳐다보았다. 카란은 은밀해진 목소리로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결코 결혼해서는 안 되는 여자라고, 지휘관을 찾아가서 말했다나 봐. 주위에선 펠이 그럴 줄 몰라 놀라 듣고만 있었다는데, 지휘관은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는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이야. 다들 그 속도에 무척 놀랐다고 하더군.”

그 모습이 절로 연상되었다. 흥분에 차서 나를 모욕하고 있는 펠과 그런 일말의 관심조차 견딜 수 없어 하는 아론이. 펠은 결코 그런 아론을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조차도 지금의 아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자네를 비방한 건지. 혹시 짐작이라도 가나?”

카란이 슬쩍 물어 왔다. 나는 답변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침묵이 조금 불편했는지 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흠, 어쨌든 이번 일로 상부에서 사람이 내려올 수 있어.”

내가 쳐다보자 그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말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하를 때렸으니까. 조사를 나올 수도 있다는 거지.”

카란은 잠깐 미간을 좁혔다.

“물론 펠이 항의를 하냐 안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재로서는…….”

확신이 없다는 듯 그가 말끝을 흐렸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도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기사로서의 펠의 성격이나 성향을 알고 있는 카란은 이번 일이 참 이상하다는 듯이 턱을 갸웃하고는 지팡이를 땅으로 팍 내짚었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뭐가 됐든 자네가 소환사로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겠어.”

그를 보자 안쓰럽다는 눈길이 따라온다.

“지휘관과의 결혼이 코앞에, 마물의 습격도 자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일 아닌가. 저항할 수 없는 시류에 휩쓸린다는 생각이 들 거야.”

나는 정곡이 찔린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란은 어두운 분위기의 나를 보며 낮게 혀를 찼다. 곧 그는 지팡이를 땅으로 탁탁 털어내듯 치며 말했다.

“어떻게든 잘될 거야.”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아마도 나를 위로해 주려고 급하게 나온 말. 내가 씁쓸하게 웃자 카란은 굳이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자네는 남들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 보지 않는 특이한 성향이니까, 걱정 없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카란이 의외란 듯이 고개를 쓸었다.

“몰랐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움찔했다. 나만큼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숨겨진 욕망까지 파악했다고 자신하는 나였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내 모습이 비친다는 건 놀랄 일이었다. 늘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게 또 자연스러워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카란이 지나치게 눈썰미가 좋거나 아니면 내가 생각보다 능숙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카란은 살짝 굳어 버린 나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소환사로서 시류에 휘말려 본 경험으로 조언하지.”

대세에 저항하지 마라. 내 위치를 깨닫고 역할에 충실해라. 나는 이런 교과서적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지평선을 하염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카란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내 인생을 책임지지도 않는, 지랄 같은 것들일 뿐이니까.”

과격한 표현에 눈을 크게 뜨자 카란이 조금 웃었다. 다시 저편을 내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어쩐지 회한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래서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하면 돼. 그게 꼭 답이라는 것도 아니고 성공이라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나마 후회가 적은 게 될 테니까.”

카란은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사설은 이만하지. 알아서 잘해 보게.”

카란은 무심한 듯이 내뱉고는 멀어져 갔다. 나는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가슴이 허전하고 머리가 복잡하다. 여전히 그랬다. 어떻게 할까. 나는 그 물음이 내 가슴에 크게 떠오른 것을 느꼈다.

카란의 말처럼, 아론의 과격한 폭력은 상부에도 전달되어 곧 조사관이 파견될 거라는 말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쑥덕거렸고,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기 숙소로 반성하듯 들어가 버린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이라고 훈련소로 다시 가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나를 데리러 온 일뿐이었다.

“아, 아론나이드 경!”

그가 훈련소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와 가자는 듯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을지 말지 찰나의 고민 속에 빠지고 말았다.

“…….”

주위의 침묵이 불편했고 그들의 시선이 가시 같았다. 어째서 나를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 밀어 넣은 거냐고 나는 원망스럽게 아론을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나 아론의 눈빛은 나보다 더 억울하고 속상해 보였다. 내가 얼른 손을 잡지 않는 것이 불안한 것처럼,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재촉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초반에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매우 달랐다.

누가 그를 변하게 했을까. 그게 정녕 나란 말인가. 온순하고 다정하게, 한 여인을 열정적으로 바라보던 그가 왜 저리 변했냐고 누구에게 다그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변한 것에는 나도 책임이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전부 내 탓이라고 돌리는 건 옳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경고했고, 그 경고 뒤에 이어질 것이 어떠하리란 걸 우리는 모두 알 만한 나이였다.

차라리 그를 뿌리쳐 공개적으로 내 맘이 어떤지를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에 빠졌을 때 훈련소 밖에서 신비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뿔나팔 소리가 아닌가요……?”

황성에서 중요한 인물이 올 때 이런 소리가 울린다. 나는 아론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곧 황성의 기사단이 도착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정예 기사단! 아론은 그야말로 완전히 뻣뻣해져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가 왜 그런 것인지를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나이가 있군.”

여인은 내가 조용히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다소 경박했으나 그녀의 몸짓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무거웠다. 마치 이중적인 인간이니 조심하라고 경고를 몸소 해주는 것처럼.

“그래, 아론이랑 결혼한다며?”

아론이라고 격식 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 그건 이 제국에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구멍으로 침이 초조하게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손이 떨리는지 몸이 떨리는지 갑옷이 불편하게 몸에 끼는 기분이었고, 아까부터 장화가 불편해 벗어던지고 싶은 느낌에 휩싸였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그게 권위와 권력의 압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이라. 정말 자신이 황족이랑 결혼하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여인의 어조는 가벼웠다. 듣고 있노라면 마치 지나가다가 괜히 참견 한 번 하는 정 많은 여인네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나 눈빛은 예리하게 사물을 꿰뚫는 것처럼 안광이 번뜩였고, 편하게 앉은 자세임에도 빈틈이 없었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마치 뱀 앞에 선 쥐처럼 초라해진 나 자신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대답해 봐.”

이미 내 신분과 과거까지 모두 조사해 보았을 터였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로 그녀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공손하게 시선을 아래로 깐 채로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감히 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왜? 아론이 막무가내로 나와서?”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실제로 약간 기가 막힌 듯한 어조였다. 지휘관의 천막에 어느새 준비된 것처럼 깔린 고급스러운 털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는 그녀는 내가 고개를 들자 눈을 맞춰 왔다.

“그래, 너도 참 곤란하겠어.”

“…….”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외딴 지역에서 경험과 경력을 쌓아 수도로 올라오게 하려고 했더니 좀처럼 오지도 않다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지 않겠어? 그것도 신분이 천한 아가씨랑 말이야.”

신분이 천한. 그 말이 강조된 것처럼 들린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 정도의 권력을 유지한 채, 모사꾼들이 득실거리는 황성에서 최고의 자리에 위엄 있게 앉아 있는 것은 그녀가 현실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영광일 뿐입니다.”

“입에 발린 말 같은데.”

“…….”

황제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우리 신성국의 군주 아드리아다. 나는 그녀가 나를 불렀다는 것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네?’ 하고 다시 사신에게 묻고 말았다. ‘전 폐하께서 단독으로 면담을 요청하실 상대가 아닌데요?’ 정말 이렇게 되묻고야 말면서. 사신은 아론보다 나를 만나길 원한다고 하며, 나를 끌어 가다시피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처세는 제법 하는 거 같은데. 눈치도 있어 보이고.”

황제는 애완동물을 품평하듯이 나를 훑으며 말했다.

“외모도 상당하군. 나쁘지 않아. 하지만 황족의 결혼은 그게 다가 아니야. 핏줄은 생각보다 중요해. 정통성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이나 명분이 필요한 순간에 반드시 따지고 들어가는 거거든.”

황제는 불길하게 웃었다.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

“……!”

나는 그게 아론의 할아버지인 전 황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자신의 천한 사위를 인정할 수 없어 결국 죽이지 않았던가. 그것은 단순히 천한 신분이라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다. 제국의 살아 있는 권력인 자신과 그 권위에 도전하는 후계를 어찌 다룰 것이냐는 것에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결국 자신의 어여쁜 딸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황제는 괴로워하며 일찍 죽고 말았다. 그다음 황제가 된 아드리아가 그 과거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나는 굳이 그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를 찾아온 이유를 확신했다.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

나는 그 반대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참 곤란하단 말이야. 말을 잘 듣던 녀석이 갑자기 고집스럽게 나오니까. 사실 그 녀석이 말을 잘 듣는 척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결혼이란 주제를 이렇게 꺼낼 줄은 몰랐지. 정말 의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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