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나는 그녀가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아론을 뜨거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론의 말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 모양이나, 그가 말할 때마다 기쁘다는 듯이 눈에 활기를 띠는 모양새가,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진심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정말 아론나이드 경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가 구세주라고 말하는 레베카에게 아론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저보다 더 훌륭한 다른 성기사가 있었을 겁니다.”
“겸손하시네요. 그래서 더욱 존경하지만요. 근데…… 여기 오기 전 아버지와 연락을 했는데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론나이드 경께서 결혼을 하신다고요. 정말 이상한 말이죠?”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라고,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부정하는 의도가 담긴 질문에 아론의 대답이 이어졌다.
“맞습니다.”
“그게 무슨……!”
레베카는 하얗게 굳어졌다. 아론은 차분하게 말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발표하겠습니다. 모두의 앞에서요.”
아론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은 의미심장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움찔할 수밖에 없었는데, 레베카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
도대체 네가 무얼 한 거냐고, 어떤 일을 저지른 거냐고 추궁하는 눈빛이 새파랗게 불거지는 순간, 아론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아론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부지휘관과 상의할 게 있어서요.”
레베카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너무한다는 듯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가고 나자 침묵이 나를 불편하게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아론은 굳어진 내 얼굴을 향해 말했다.
“안색이 창백해졌군요. 힘들다면 앉아서 들어도 됩니다.”
“결혼이라니, 무슨 말이야?”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아론은 나를 빤히 보았다.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뻔한 거 아닙니까.”
나는 그가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아론은 그런 나를 보면서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지금 그의 기분 따위를 신경 써 줄 입장이 아니었다.
“무, 무슨 말이야…….”
나는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결혼이 내 이야기라는 것을 스스로 입 밖에 내는 순간 기정사실이 될 것만 같았다.
“결혼이요. 저와 말레드레드의.”
아론은 분명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이 귓속을 파고들어 머릿속까지 송곳처럼 찔러 오는 걸 느꼈다. 결혼이라는 예상치 못한 제안, 아니, 이것은 제안보다는 강요이자 본인만의 집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너무도 기막혀 도리어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이라고……?”
간신히 내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자, 아론이 바짝 다가왔다. 그는 내가 도망갈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 양 볼을 손으로 감싸 끌어당겼다.
“으읏…….”
“네, 우리 둘의 결혼이요.”
“그,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해. 반박하고 싶었으나 아론의 시퍼렇고 암울한 눈을 보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애정과 애달픔으로 가득했던 눈에는 더 이상 수줍고 점잖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몰아쳐서 궁지로 나를 잡아끌 절박함과 처절함만이 있을 뿐.
“곁에 있게 하겠다고 했잖아요. 전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겠어요. 영원히 말레드레드를 제 곁에 둘 방법으로요.”
“으읏, 아론.”
그가 쥔 볼이 아릿하다.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끈 그에게서 벗어나려 바둥거리자 아론은 뜻밖에 선뜻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가빠진 호흡을 내쉬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에게 벗어난 작은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아론의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말레드레드를 쫓을 거예요. 만약 쫓을 수 없다면.”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도망칠 수 없게 만들 거고요.”
그의 어두운 눈이 나를 옭아맨다. 그 눈빛은 그 자신조차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맹목적인 신념과 의지를 선명히 반영하고 있었다. 나는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아론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결혼이란 방법을 찾을 줄이야.
결혼은 여태까지의 묵시적인 연애와는 다르다. 그것은 엄연히 가문과 가문이 연결되는 공적인 관계로서, 나는 법적으로 그에게 충성하고 신실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문란하게 맘껏 관계하고 싶은 나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사회적인 제도에 묶이는 것이다.
물론 꼭 많은 사람과 관계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즐겁고 야릇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면 한 사람하고도 지속적인 정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때문에 아론과 마왕과의 관계를 이어 온 것이 아닌가.
그들이 주는 육체적인 만족감과 정신적인 쾌락의 농도는 너무나 짙고 감미로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속했다간 위험할 거란 예감이 간혹 들었지만 그럼에도 좋았기에 이어 왔었다. 무시한 척 관계를 지속했었다. 그랬더니 지금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던가.
두 존재가 서로를 알아 버렸고, 서로를 분명히 적으로 인식했다. 마왕은 하찮은 인간이란 생각에 아론을 그다지 걸림돌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론은 달랐다. 그는 마왕이란 존재를 알자마자 그에게 달려들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아론은, 나만 바라보던 다정한 청년은 이제 더는 다정하지 않다. 그는 어떻게든 나를 묶어 두고 제 소유로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주 극명하게.
“……아론.”
“다음 주에 사제들에게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아론.”
“결혼식은 약소하게 해도 좋고 거창하게 해도 좋아요. 뭐가 됐든 함께하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목이 막히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분명 내 얼굴이, 내 눈빛이 어떠한지를 알 텐데도 제 할 말만 하는 아론에게서는 내 진심을 듣고 싶지 않아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주춤거렸고, 입술을 달싹였다. 손을 꽉 쥔 채로 지금 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했다.
“말레드레드.”
아론은 그 잠깐의 침묵에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아까 자신이 움켜쥐었던 양 볼을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놀란 짐승을 달래듯 부드럽게.
움찔.
그의 손길이 나의 불안을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그 강렬한 온도가 내 피부를 지나, 내 마음까지 뒤덮는 걸 느꼈다.
“도망가지 말아요, 제발.”
간절한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데일 듯해서 어금니를 꽉 다물며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소문은 빨랐다. 아론이 상부에 결혼이란 말을 꺼낸 다음 날. 그날 아침에는 본대의 모두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모습들을 모른 척 훈련소로 향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했다. 몸을 쓰면 지금 당장의 생각들을 좀 꺼트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훈련소로 간 것이지만 거기서도 나는 평온을 찾지 못했다.
“말레드레드, 정말이에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레너드가 물어왔다. 그는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많은 사제들을 신경 쓴 듯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 결혼하는 거예요?”
그럴 거 같아요, 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이 결혼은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서 나를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내 삶을 어떤 특정한 틀에 넣어 두고 이런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틀리다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내가 어떤 여자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에 따른 삶을 추구하고 싶다는 것일 뿐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꾸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아…….”
레너드는 멍하니 탄식했다. 그 어리숙한 반응에 나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하긴. 누구나 찬양하는 성기사와 결혼한다고 하면 무작정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더욱 놀란 듯싶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곧 이렇게 말해 왔다.
“말레드레드가 행복한 쪽으로 잘됐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쪽. 나는 그게 늘 내 내면의 탐욕을 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를 드러내고, 맘껏 관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까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 걸까.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쾌함과 서러움에 잠깐 고개를 수그렸다.
“괘, 괜찮아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레너드에게 고맙다고 짧게 중얼거리고는 지팡이를 응시했다. 지팡이에는 변함없는 흰빛이 희미하게 맺혀 있었다. 내가 사제라는 걸 증명해 주는 그 빛에 옅은 위안감을 얻을 때, 훈련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론나이드 경께서 누군가를 공격하셨대!”
누군가라니, 그게 누구일까.
“가, 같은 성기사를 때리셨대!”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들려오자 멈칫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아론이 자신을 방문한 한 성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에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성기사가 펠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현기증이 몰려오고 말았다. 사제들은 쑥덕거렸다.
“왜 펠을 때렸지? 그는 성격이 올곧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분명 무례한 짓을 한 거겠지. 아론나이드 경을 시샘했다거나, 명령 거부를 했다거나.”
“하지만 그런 일에 선뜻 폭력을 행사할 분이 아니신데, 지휘관은.”
다들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나는 카란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자네 결혼한다며?”
그는 사람들 무리에 뻣뻣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며 대뜸 물어 왔다. 사람들이 그 소리에 흠칫해서 내 주위를 물러나자, 카란은 냉큼 다가왔다. 지팡이가 땅에 닿을 때마다 내는 소리가, 생각보다 청아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곁에 온 그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왜 그래?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카란의 거침없는 말에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누구나 원하는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데도 말이지?”
“…….”
“오늘 지휘관이 펠을 때린 이유를 알고 있나? 듣기론 펠이 자네 이야기를 했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