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38화 (138/220)

138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몰려오는 수마를 느꼈다. 간신히 저항하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쉬어요, 제 곁에서.”

작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절대로 다른 곳에서 눈뜨지 않을 테니.”

아론은 확신하고 있었다.

쓰러지듯 잠든 다음날, 나는 아론이 옆자리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신발과 옷가지, 갑옷 모두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바닥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무무의 냄새가 묘하게 내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씻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사제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여느 때처럼 아론과 나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는 호기심 어린 눈길이겠거니 했지만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바가 있었다.

“자네, 정말 상부에 결혼을 할 거라고 말했나?”

움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지휘관의 천막을 열려던 동작을 멈췄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은 빨리 퍼지지. 특히 자네를 주시하는 눈길이 가득한 이런 작은 본대에서는.”

“그런 이야기에 민감하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만.”

냉담하게 대꾸하는 아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스더라고 추정되는 사내는 기죽지 않고 캐물었다.

“그래서. 정말, 결혼하려고? 그녀와?”

나는 굳어졌다. 왠지 그 대답을 듣고 나면 여태까지의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어째야 하나 망설이는 짧은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고 대답 대신, 내 기척을 감지한 아론이 천막의 문을 대신 열어젖혔다.

“…….”

“…….”

서로를 응시하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침묵이 민망해진 건 에스더였는지 그는 나를 향해서 ‘잘 잤어요?’ 하는, 제법 상황에 안 맞는 발랄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론을 무시한 채 그에게 대꾸했다.

“아뇨.”

“저런. 밤잠을 설친 이유가 있나요?”

나는 잘 물었다는 듯이 아론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감정을 담아 쳐다보는 것에 아론 또한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하나 그의 눈만은, 소화할 수 없는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의 눈빛만은 부단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길에 오히려 거북해진 것은 나였고, 기가 질린 것도 나였다.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려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더가 머쓱하게 말했다.

“두 사람, 할 말이 많아 보이네요.”

자리를 비켜 주겠다며 나가려던 에스더의 배려는 안타깝게 몰려오는 지휘관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흥분한 상태였다.

“마왕이라니, 그 마왕이라니!”

누군가의 탄식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처럼, 마왕의 등장은 모든 이에게 경각심을 준 듯했다. 지휘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왕이 또 나타날 것인지, 정녕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서없이 떠들었다. 상부에게 말해 이 작은 본대를 수도의 군대처럼 바꿔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아론은 그 소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마왕을 거론할 때마다 불편하고 거북해지는 속에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마치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감추고 있기라도 한 듯한 느낌. 마왕과 내통하면서 아군을 농락하고 있는 느낌을 말이다. 그렇다고 마왕과 정사를 나누는 내가, 마계의 군사적인 정보를 능통히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철저히 그와 육욕적인 면만을 교류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마계와 전쟁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 마왕이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은 내게도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전쟁은 단순히 군대와 물자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사실들, 치욕스럽고 추잡한 비밀 하나가 전쟁을 뒤집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감춰 우리 아군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불현듯 두려워진 것이다.

‘마왕이 죽어 간다는 사실이나, 마왕이 내게 빠져 있다는 추측 같은 것을.’

정녕 이대로 함구하고 있어도 될 것인가. 등골이 서늘해져 올 때 지휘관 하나가 불안한 어조로 아론에게 물었다.

“마왕이 등장했으니 폐하께 말씀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상부에 보고했으니 폐하께도 전달됐을 겁니다.”

“아니, 제 말은 직접 아뢰어서요. 폐하께서도 이곳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야 하니까요.”

나이 든 지휘관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아주 젊은 시절 마왕을 잠깐이나마 경험한 적 있었고, 그의 군대와 그의 마기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지휘관들보다 이 사태를 심각하고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이트들을 불러들여 다가올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 말은, 전면전이요!”

“하지만 마왕은 어제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사라졌어요. 아론나이드 경의 무위에 놀란 것이겠지만, 그는 마왕입니다. 전면전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놀라서 초반에 도망가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군의 사령관이 그러면 사기 저하가 엄청나니까요. 어제 마물들을 보세요. 마왕이 사라지자 기세가 꺾여 우리에게 금세 잡히지 않았습니까?”

한 지휘관의 반론에 다른 지휘관이 의견을 보탰다.

“제가 보기에도 어제 그 존재의 등장은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전면전을 목표한 거라면 더 많은 마물과 마족을 끌고 와야지, 그렇게 수하를 데리고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가 어제 등장한 목적은 단순히 수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는지 합니다.”

다른 지휘관들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라. 직접 데려갈 정도의 수하면 아주 측근이었겠군요?”

“측근치고는 약하지 않았나요? 물론 무서운 마기를 뿜어내는 마족이었습니다만, 고위 마족들이 보통 머리를 써서 공격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마구잡이식의 공격을 했던 터라…….”

지휘관들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론은 동의한다며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힘을 더 섞지 않은 걸 보면 자신의 수하를 데려가는 게 본 목적이었을 겁니다.”

“그도 수하를 아끼는군요.”

의외란 듯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나이 든 기사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하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본성부터 잔인하고 무도한 것들로 늘 우리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 우리의 피를 어떻게 흩뿌릴 것인지만 고민하는 존재들이니까요!”

공포 가득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왕의 등장으로 들뜸인지 흥분인지 모를 기세가 주춤해지자 한구석에 있던 에스더가 침묵을 깼다.

“일단 경계를 최고 수준으로 하면서 평소처럼 훈련과 작전에 임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전면전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급 물자를 확보하고, 지원 부대를 배치해서요.”

“여긴 작은 본대예요. 지형적으로도 많은 인원이 머무를 수 없는 곳입니다.”

에스더는 지도를 가리켰다.

“하지만 지리학적으론 매우 중요합니다. 근처 도시로 마물이 가지 못하게 만드는 길목에 서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정말 모든 마물이 몰려와 공격하는 전면전이 아니라면 평소처럼 훈련과 작전을 이어가야 하는 게 이 본대의 아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아론나이드 경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휘관들이 모두 아론을 바라보았다.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건 임시 대장인 그의 몫이었다. 아론은 잠깐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사제들은 훈련에 임하고 작전에 투입될 겁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나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천막을 빠져나왔다. 훈련소에 가서 이 복잡하고 심란한 심정을 털어 버릴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전에 나를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아론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며 그에게 존댓말로 차분하게 말했다.

“비켜 주세요. 한 명도 예외 없이 훈련에 임하라고 하셨으니…….”

“지휘관이나 부지휘관은 예외입니다.”

움찔한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쉬고 싶은데요.”

그건 네 탓이라고 노려보자 아론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천막에서 쉬세요. 저를 보좌하는 부지휘관이 이런 시기에 제 곁을 떠나 있는 게 불안하니까.”

“지금 저보고 지휘관들 작전 천막에서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는 건가요? 다들 생사가 오고 가는 전략을 구상하는 그 자리에서?”

“한가롭게.”

아론은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싫다면 저와 함께 누워 있어도 됩니다.”

“아론……!”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나도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말았다. 주위에서 놀란 듯이 쳐다보는 탓에 얼른 입술을 다물었지만 내 불만과 화가 그득한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론은 침착하게, 변함없이 냉정하게 내게 말했다.

“제 곁에만 있어야 해요.”

“…….”

아론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옭아매는 어조로 말했다.

아론의 강요에 가까운 지시 때문에 나는 그날부터 아론과 늘 함께해야 했다. 마치 그의 부속품이 된 것처럼 그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의 일과는 대단히 바빴다. 많은 곳에 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 어떻게 작전을 짜고, 어떻게 사제들을 배치하고, 어떻게 물품 보급을 조절할 것인지를 내리는 순간들이 신속하게 지나갔다. 아론은 그 많은 선택에 대해서 합리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고, 그 결단에 추진력까지 더했다.

나는 그가 결정한 사항들이 술술 풀리는 걸 목격했다. 인정해야 했다. 나를 철저하게 옭아매는 남자가 일상에서는 더욱 빈틈없고 완벽하게 처신하는 남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넘어서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지도자로서의 소양이 충분하게 넘친다는 것을.

‘자네는 황제의 하나뿐인 조카야.’

에스더가 그것을 강조한 이유를, 그가 남들과 달리 특별하다고 말한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하면서.

아론이 단순히 신성력을 많이 보유했을 뿐이었다면 위대한 성기사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월했다. 황제가 되기에 모자람 없이 모든 면에서.

“아론나이드 경…….”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따르면서 그의 조언을 구하려고 했다. 레베카 또한 그러한 이유로 아론을 찾아왔다. 아론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 중에서 레베카는 가장 가련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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