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녀가 내게 무시무시한 마기의 창을 던지려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그녀는 자못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더니 재빨리 자신의 위쪽으로 차원의 문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퇴장에 고개를 갸웃하던 찰나, 나는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아론이 렉토의 목을 한 손으로 붙든 채 서 있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커다랗고 빛나는 대검을 쥐고 렉토의 가슴 정중앙을 찔러 들어가자 그 여파에 마기와 신성력이 부딪쳐 지반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선과 악의 싸움에서 아론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악이라고 하더라도 모를 만큼 비정하고 냉혹하게 마족을 심판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이 렉토의 몸을 완전히 관통하기 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의 등장은 고요했다. 그를 알아차린 사제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처럼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몹시 당황하여 망연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은 머리의 마왕이 이런 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왕은 다짜고짜 렉토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렉토는 시체처럼 그에게 딸려갔고, 대검이 그의 가슴에서 쑥 빠져나왔다. 아론은 긴장한 얼굴로 두 손으로 대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듯싶었다.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어둠을 녹여낸 듯한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갑자기 그가 사라져서 어딜 갔나 했더니.”
마왕은 아론을 물끄러미 보았다.
“새파랗게 젊은 성기사에게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아론은 말없이 검을 그에게 겨눴다. 마왕은 아론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신성력에 감탄하듯 눈을 떴다가 곧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미간을 좁혔다.
“익숙한 기운인데.”
마왕은 곧 한쪽 입술을 올렸다.
“너군.”
“…….”
“어제 수하의 머리를 이용해 날 소환하려 했던 녀석이.”
아론은 그의 말에 놀란 것처럼 굳어졌다. 마왕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내가 누군지 알고서 불러내려던 건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죽은 마족의 머리를 이용해 누군가를 찾으려고 했지. 정확히 네 연인의 상대를 말이야.”
“……!”
마왕은 아론을 완전히 동요시켰다. 마왕의 시선은 보란 듯이 나를 훑었고, 나는 덫에 걸린 새처럼 파르르 떨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왕이란 존재를 몸으로 알고 있는 내가 절로 반응해 버린 것이었으니까.
마왕은 나를 보고 아론을 돌아본 뒤 굳이, 짓궂게 물었다.
“이제 그게 누군지 알겠나?”
“으아아-!”
아론이 비명 같은 함성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맹세컨대, 한 번도 나는 그런 식의 신성력 분출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아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망토처럼 긴 잔상을 남기며 공중에서 명멸해 가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론 처절했다. 흰빛이 별빛처럼 반짝일 때마다 아론의 몸 또한 환하게 빛났고 제 생명력까지 쓰는 것처럼 대검에서 굉장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마왕은 그 강대한 힘에 대적하듯 한 손을 뻗었다. 어둠을 지배하는 왕만이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마기를.
파앙-.
빛과 어둠의 충돌. 신성력과 마기의 부딪침은 대지에 있던 모든 사제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근처의 마물까지 모두 영향받았을 정도로 충돌의 파동은 모두를 흔들었다. 사제들은 넘어지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렸고, 마물들은 기괴한 괴성을 토해 내며 흥분해 날뛰었다.
그런 잠깐 동안의 소강상태에서 아론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처럼 재빨리 제 몸에 신성력을 일깨웠다. 그러나 마왕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지금은 나와 내 측근 상태가 모두 좋지 못하니 물러나야겠군.”
아론이 그냥 보내 줄 수 없다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그보다 검은 마기가 먼저 그들을 덮었다. 어둠의 기운이 사라지자 그들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았다. 아론은 검을 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대결이 끝날 줄 몰라 충격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마, 마물들이 도망갑니다!”
“어서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환 영역으로 몰아요!”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터져 나오자, 사제들이 다시 대열을 갖춰 마물을 몰아넣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사라지자 마물들은 쉽게 허물어졌고, 속속들이 기사의 검과 소환사의 신성력에 잡혀 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마물 소탕이 완료되자 지휘관들과 사제들의 얼굴에는 말 못 할 안도감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안도감 가득한 표정 속에서도 눈만큼은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바로 마왕을 상대하려고 했던 위대한 성기사 아론을.
“아론나이드 경이 말이 없으시네.”
“그러게요, 오늘 진짜 고생 많으셨는데, 승리를 축하하는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시지…….”
“마왕이 왔었잖아요. 그 때문에 너무 놀라신 게 아닐까요?”
나는 사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숙소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승전이라고 해도 정화 작업까지 마무리해야 전투가 끝나는 것이었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아서,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숙소로 일찍 돌아와 버렸다.
갑옷을 풀면서도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마왕이 왜 렉토를 직접 데려갔을까. 에레나는 왜 마왕이 오기 전에 흠칫해서 달아났을까. 그리고 아론은 왜, 마족의 머리로 그를 찾으려고 했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 질문의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족은 죽어서도 이상한 말을 남기니까.’
아론이 마족의 머리를 쥔 채로 중얼거렸던 말이다. 나는 그제야 왜 아론이 따로 마족의 머리를 가져간 것인지 깨달았다.
아론의 집착, 아론의 분노, 아론의 결단. 그것들은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거대해서 당장은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짜 어디론가 도망가 버릴까. 아론도 마왕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윗옷을 벗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론…….”
그는 말이 없었다. 옷을 벗고 있는 나를 보면서 천천히 제 갑옷에 손을 올렸을 뿐이다. 무겁고 커다란 갑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잘 아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을 때 오는 공포,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찾아오는 공포였다.
“괘, 괜찮아?”
“…….”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잘 드러난 완벽한 몸매, 탄탄하게 영근 근육과 뼈의 조화가 눈앞을 아찔하게 했다. 아론은 남은 옷을 벗으며 말했다.
“쉴 거예요, 이렇게.”
아론이 나를 그대로 침대로 무너뜨렸다.
“아, 자, 잠깐만……으읏, 아, 아론!”
아론의 뜨거워진 하체가 벌써 느껴지고 만다. 나는 금세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묵직한 성기에 기겁하고 말았다. 아직도 전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마물과 풀의 냄새가 어지럽게 나고 있는데, 그의 살갗은 내게 밀착해 있었고, 그의 입술은 내 목에서 떠날 줄 몰랐다.
“아, 아……, 제발, 아, 아론…….”
애원했지만 아론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목덜미를 깊게 빨고 아프도록 흔적을 만든 뒤 미끄러진 입술은 곧 내 예민한 살결을 정신없이 탐했다. 빨아 당겨지는 유두가 따끔하게 아파서 잠깐 입술을 깨물었던 나는 곧 그의 입술이 빨아들이는 감각에 신음을 헐떡여야 했다.
“씨, 씻고 나서…… 흣…….”
그러나 내 말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지 그가 연한 살을 깨물었다. 나는 입을 벌리며 신음을 터트렸다. 가슴에서 배꼽으로 금세 이동한 그는 다시금 위로 올라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맞붙였다.
“……!”
강렬하고도 억압적인 키스는 영혼까지 사로잡는 듯했다. 하나 그 숨 막히고 정신없는 애무 속에서도 그의 타오르는 선명한 금빛 눈만은 끓어오르는 육욕을 식히며 마음의 불안과 안타까움을 키웠다. 그것은 금빛 눈에 담긴 것이 어린 날의 선망이 아니라 슬픔으로 이루어진 분노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아……!”
그의 달군 듯한 성기가 안을 꿰뚫었다. 단번에 치고 들어온 굵직한 것은 내 안을 모두 부숴 버릴 것처럼 강하게 들쑤셨다. 나는 결국 허벅지를 벌리며 조금이라도 순하게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고 벅찬 성교가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그가 사정했을 때야 드디어 벗어난다는 생각으로 안도하고 말았다.
“…….”
어지러움과 나른함이 전신을 뒤덮는다. 나는 힘든 전투를 끝낸 뒤였다. 쓰러져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엉덩이 뒤쪽으로 흘러내리는 그의 선액을 느꼈다. 닦아야 하나. 망설일 때 아론은 몸을 일으키더니 곧 내 방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뭘 찾는 거야?”
멍하고 아득한 정신으로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아론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요.”
“그건…….”
낙엽 같은 무무. 임신을 방지하는 약초다.
“임신을 방지하죠. 한 달 동안.”
아론은 어두운 눈으로 중얼거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손으로 부숴서 없애 버렸다.
“…아, 아론!”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아론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빈틈없이 완벽했고 철저하게 냉혹했다.
“한 달 뒤엔 어차피 저하고만 관계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