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아론이 마족과의 싸움에 합류하면서 그제야 마족의 기세는 주춤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족의 힘은 강대했고 공격도 무차별적이었다. 온 기운을 쏟아내는 그의 단순한 전법은 처음에는 아론과 에스더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듯했으나 곧 그렇지 않다는 게 증명됐다. 마족이 아론에게 당해 몇 번이고 바닥을 뒹군 것이다.
나는 마족에게서 뿜어지는 마기가 불안하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전세가 아론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족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전투에선 마구잡이로 힘만 뿜어내는 게 능사가 아니다. 특히 마물을 부리고 있는 마족이라면, 마물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면서 인간들의 군대를 전략적으로 함락해야 한다. 성기사들이 앞에 나가 있는 동안 소환사들이 뒤통수를 칠 계획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에스더 경의 목소리가 높게 울려 퍼지자 소환 영역에 그려진 차원의 문이 번쩍였다. 차원의 문은 늦어지긴 했지만 열렸고, 모여든 마물을 속수무책으로 끌어당겼다. 마물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시 차원의 문으로 빨려 들어갔고 우리의 땅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족은 그럼에도 자신에게 신성력을 쏟아내는 아론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에게만 공격을 해 댔다.
‘렉토를 이길 수 있겠어.’
비록 미쳤다고 하나 강한 마족을 단독으로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론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신의 기사였다. 혼자서도 마족을 쳐부술 수 있는 위대한 빛의 기사……. 흰빛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번쩍이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남은 마물이 잘 사라지고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마물을 끌어당기던 차원의 문이 갑자기 고장 난 것처럼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끌려가지 않으려 애쓰던 마물들은 당기는 힘이 사라지자 다시 근처에 있던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흠칫해서 보고 있으니 누군가 지휘관의 천막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소, 소환 영역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어요, 라는 아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울먹이는 소환사를 바라보았다.
“지휘관이 말레드레드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나는 허리춤에 달아 놓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나는 소환사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말레드레드였다. 늘 내 마음대로 행동해 왔던.
“가요.”
아론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마, 말레드레드!”
소환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내 팀의 지휘관이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해 왔다. 그의 주변으로 차원의 문을 열었던 소환사들이 보였다. 이번 작전에서 소환사들을 지휘하게 된 그는 그들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들이 왜 그런지 알겠나?”
나는 그제야 소환사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는데 지팡이를 쥔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눈동자도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멍하게 흐려져 있어서 나는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의 몸에 저런 반응이 왔다는 건 힘을 출력하는 과정에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소환 영역을 완성한 뒤 이런 건가요?”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마물이 많기 때문에 소환의 영역이 완성되고도 차원의 문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신성력을 보탰었지. 그러다가 저렇게 됐어. 원인이 무엇일 것 같나.”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을 찬찬히 살피고는 그들의 힘이 뿜어지고 있는 방향을 보았다.
“그들의 신성력이 무언가에 방해를 받은 거 같아요.”
나는 지팡이를 꽉 쥔 채로 말했다.
“차원의 문이 열린 곳으로 가 봐야겠어요.”
“그래, 잘 부탁하네.”
지휘관은 성기사 둘에게 나를 따라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나는 서둘러 성기사 둘을 데리고 마물과 성기사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한복판으로 향했다.
“으아악-!”
불쑥 튀어나온 마물의 커다란 입이 성기사의 다리를 물었다. 갑옷이 뚫리면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발광하는 성기사를 보면서 얼른 다른 성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챙강!
빛이 맺힌 검이 딱딱한 외골격을 가르자 녹색 팔에서 암갈색의 체액이 빠져나왔다. 성기사는 질색하며 팔의 근육과 뼈를 갈라 그것의 몸통까지 자르려고 애썼다. 그가 두 손으로 대검을 쥔 채 끙끙거리는 걸 보면서 나는 다리를 다쳐 신음하는 성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집중하자 영롱한 흰 빛이 맺혔다. 그 빛은 격통에 시달리는 성기사의 표정을 조금이나 유순하게 해 주었다.
서둘러 치료 사제를 부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치료 사제의 흰옷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무자비한 마물과 그에 간신히 버텨내는 기사들의 모습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빛을 뿜고, 이기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삶과 죽음이 찰나에 교차하고 잠깐 사이에 선 것과 누운 것이 구별되는 치열하고 참담한 세상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그 세상을 마주한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가, 가세요…….”
성기사가 나를 붙잡았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로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서 가서, 소환사를 구해야…….”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마물을 마계로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밀려드는 마물에 결국 아군의 목숨이 위험해질 터였다. 본대의 핵심 전력인 아론과 에스더가 마족을 상대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결국 마물을 상대하는 건 일반 기사와 소환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상자인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고통으로 옅어지는 그의 동공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차원의 문이 생성된 곳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물의 기괴한 숨소리, 비틀린 열기가 지척으로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달리려 했다. 간혹 빠르게 이동하는 나를 공격하려는 마물이 있었지만 다른 커다란 마물에게 막혀서 나를 쫓지 못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숲 바로 앞에 펼쳐진 차원의 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
내가 차원의 문에 다다른 순간 놀란 것은 차원의 문 영역 안쪽에 누군가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망토를 쓴 채로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인영은 차원의 문을 향해 한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손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차원의 문으로 흘러 들어가자 신성력이 비틀린 채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마기야.’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인영이 소환사들을 굳어지게 만든 원인이라고.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신성력으로 만든 작은 공을 인영에게 쏘아 보냈다. 처음엔 작은 공을, 다음엔 큰 공을. 첫 번째 공에 놀란 인영이 손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린 인영은 나를 발견하고 자못 놀란 것처럼 멈칫했다.
“이게 누구야.”
요염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이고 비틀린 것을 함께 꼬아낸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등줄기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서 가장 손대기 어려운 귀하디 귀한 소환사가 아닌가.”
그녀는 비꼬는 어조로 나를 규명하고는 곧 손을 들었다. 검은 마기가 뭉쳐서 위협적으로 날뛰고 있었다.
“널 해칠 수는 없지만, 널 고통스럽게 할 수는 있지.”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마기가 마물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마물의 광포함과 힘이 배가 되어 기사들에게 쏟아진다. 절망과 비명이 귓가를 쑤셔 오자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창백하게 질렸을 내 안색을 보면서 에레나가 깔깔 웃었다.
“역시 인간이란 말이지. 아무리 우리 마계를 들락날락해도, 왕의 총애를 받아도, 결국 넌 나약한 인간일 뿐이야.”
에레나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 중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말한 왕은 마왕이었고, 결국 내가 싸우고 저지하려는 세력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에. 결국 적과 동침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내 머릿속에선 불편한 정의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격렬한 싸움의 책임이 내게 있는 게 아니냐는…….
에레나는 우아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널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만,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노릇이고.”
“…….”
“그렇다고 널 가만히 두고 보기엔 내 화가 가라앉지 않으니 이걸 어쩌면 좋지?”
나에게 묻는 듯이 말꼬리를 올리는 그녀 때문에 기가 막혔다. 이 곤란함이 내 탓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내 주문의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차원의 문이었다. 차원의 문을 강화하면 결국 그녀도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갈 것이다.
“어디서? 괘씸한 짓을 하려 들다니!”
하지만 그녀가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고, 곧 마기를 내게 쏘아 보냈다.
“읏…….”
나는 손등이 거뭇하게 타는 듯한 감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혀를 쯧쯧 찼다.
“실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주제 파악을 해야지. 침대에서 돌아가는 머리만큼은 인간세계에서 안 돌아가나 보지?”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표정을 읽고 비웃음을 지었다.
“몰랐어? 자신이 얼마나 간교하고 간사한 인간인지. 결국 살기 위해 왕을 꼬셨을 테고 그의 환심을 샀을 테지. 우리가 인간계를 정복할 때, 제 몸 하나라도 건사하기 위해서 말이야.”
“웃기지 마.”
나는 그녀에게 신성력을 거대하게 뭉쳐서 보냈다. 홧김에 쏘아 보낸 신성력은 뜻밖에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붉은 입술 옆으로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곡을 찔렀나? 하지만 말이야, 난 인간의 어둡고 음습한 면을 잘 알고 있어.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행동한다 해도 결국 개인은 제 앞길을 생각하기 마련이야. 자신이 살고자 동족까지 곤경에 빠뜨리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지.”
무슨 말일까. 그녀의 눈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그녀가 인간계에서 따로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왕이 이번 습격에 꿍꿍이가 따로 있다는 말까지.
나는 초조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둡게 웃었다. 아름답게 휘어진 눈꼬리에 살기가 도롱도롱 달리고, 마기가 그녀의 뒤로 광포하게 뿜어졌다.
“인간들이 자멸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즐겁지만, 너만큼은 내 손으로 꼭 죽이고 싶어. 왕께 꾸중을 듣고 벌을 받는다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