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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135화 (135/220)

135화

“!”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지휘관들도 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눈이었다. 아론은 그런 눈들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했다.

“그녀는 본격적인 전투에 뛰어들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역할은 지원과 연락 담당에 한정합니다.”

그러자 다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천막을 나섰다. 나는 그들이 가고 나자 아론에게 물었다.

“내가 왜 전투에서 싸우면 안 돼?”

아론은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작전 지도에 올려놓은 공격 지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술적인 겁니다. 지휘관과 부지휘관이 둘 다 다치면 명령 체계가 흔들리니까요.”

“그 때문에야?”

“안 그럼요?”

아론이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눈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나를 날카롭게 찔러 왔다.

“한눈을 팔면 말레드레드가 마계로 가 버릴까 두려워 그런다고 말할까요? 질투심에 미쳐서 작전이고 나발이고 말레드레드만 껴안고 검을 휘두르고 싶다고?”

“……아.”

나는 놀라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겁먹은 내 반응에 아론은 멈칫 놀란 듯하다가 곧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할 겁니다. 어서 가서 쉬세요.”

나는 도망치듯 천막을 나왔다. 칼날처럼 찔러 오던 아론의 눈빛이 생생해서 좀처럼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나를 찔러 오는 황금빛 눈에는 분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은 일찍 찾아왔다. 해가 뜨기 전 사악한 존재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은 몹시도 어두웠고 음산한 회오리바람이 돌개바람처럼 몰아쳤다. 마물 군대를 보는 사제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지휘관들은 심상치 않은 마물의 숫자에 고삐를 쥔 채로 단단히 대검을 붙잡았고 말들은 공기 중에 퍼진 공포를 읽은 듯이 앞발을 굴렀다.

산 중턱에 흘러나온 안개가 대지로 내려앉자 마물 군대는 유령의 부대처럼 더욱 음산해 보였다. 시작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마물들이 침을 흘리며 거대한 몸으로 포효할 때, 기사들도 대검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마족은 어디 있지?”

“저도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신성력과 마기가 부딪치고 있는 전쟁터를 바라보며 아론이 대답했다. 마족을 상대하려고 했던 에스더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마물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지? 숫자만 많다고 우리 본대를 뚫을 수 없을 텐데.”

에스더는 보강된 사제 인력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제국의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인근 도시에서 온 사제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급파한 신성국의 정예병들로 황제의 직속 휘하의 군대였다. 황제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기사들이 밤새 달려서 이곳에 도착한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수도를 향하는 마족의 사악한 발걸음을 저지하겠다며. 에스더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을 보낼 정도면 폐하께서 자네에게 보통 관심을 갖고 계신 게 아니란 건데.”

“에스더 경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이라고?”

에스더는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수도에는 나 같은 나이트들이 항시 거주하고 있어. 그들은 나보다 더 강하고 더 능력 있지. 심지어 정치도 잘해. 그들의 휘황찬란한 언변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늘 변두리에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에스더는 그게 딱히 싫지 않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곧 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나는 알아. 내가 딱히 특출한 게 없다는 걸. 운이 좋아 나이트가 됐지만 폐하께서도 내게 이렇다 할 관심이 없지. 아마 죽으면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내 자리를 메울 누군가를 얼른 선발할 거야. 하지만 자네는 달라.”

에스더는 의미심장하게 아론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황가의 정통 핏줄이며 후사가 없는 폐하의 유일한 조카지.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자네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제국에 소중한 존재라는 거야.”

“지금 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해 주시려고 폐하의 지원을 굳이 언급하신 겁니까?”

“아니. 내 말은 마족이 우리 본대의 상황을 봤다면 당장 나타나서 진두지휘해도 모자랄 판인데 나타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요?”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가 끼어들자 에스더와 아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 쏠렸다. 에스더는 반갑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럴 수 있죠. 그들은 마족이니까요. 늘 어떻게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까 생각만 할 테니.”

“혹시 모르니 주변을 경계하고 변칙적인 등장에 신경 쓰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아론은 손짓으로 수하를 불렀다. 에스더는 딱딱한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아론을 보면서 은근슬쩍 내게 다가왔다.

“근데 그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아요? 어제 만났을 때부터 영 기분이 저조하던데.”

“……왜 제게 물으시죠?”

“부지휘관이잖아요.”

악의가 없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하는 대꾸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에 대한 걸 왜 내게 묻냐 앙칼지게 반응하려고 했으나 사실 에스더의 말이 맞지 않은가. 나는 지휘관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다. 보필한다는 건 그의 전략적인 머릿속뿐만 아니라 그의 사적인 감정까지도 파악해 보좌한다는 의미가 있었으니까.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도 잘은…….”

“아, 대답하기 어려운가요.”

내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서 파악해 대꾸해 버리는 에스더 경이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참 힘들겠어요,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올곧은 남자가 변해 버리면 상대하기가 무척 어려울 테니까. 잘 먹던 사탕이 목에 걸린 것처럼.”

“…….”

“하지만 같은 성기사가 보기에도 그의 상태는 육체적으로 좋지 않아요. 아주 불안정하게 신성력이 날뛰거든요. 전 기사라서 더 잘 보이네요.”

에스더는 어두운 눈으로 아론을 꿰뚫듯이 쳐다보았다.

“빛을 품은 기사가 심적으로 흔들리면 그 빛에도 문제가 생기곤 하죠. 마음은 그대로 육체에 반영되니까. 그렇게 흔들리다 보면 결국 빛도 약해질 거예요.”

“…….”

내가 무겁게 침묵하자 에스더가 얼른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거예요. 부지휘관이니까. 지휘관의 상태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잖아요? 결코 부지휘관 때문이라고 탓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시죠?”

아론이 어느새 우리를 보며 날카롭게 묻고 있었다. 에스더는 그 날 선 기세에 놀랐다는 듯이 양손을 들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 그러니까 가장 열세인 지역에 지원을 나가야겠군. 언제 올지 모르는 마족을 기다리기보단.”

아론이 노려보는 것에 에스더는 더욱 머리를 크게 긁적거렸다. 누군가 나와 말을 나누는 것도 싫다는 그의 태도에 에스더는 몹시도 난처해진 듯했다. 그는 검을 챙겨서 나가기 전 아론에게 살짝 몸을 기울여 충고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경계하지 마. 불편하니까.”

“…….”

“우리가 아니라 그녀가 말이야.”

에스더는 나를 힐끔 보고는 천막을 나섰다. 아론은 그가 나가자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고역스럽다는 것을 깨닫고 아론에게 말했다.

“소환사들에게 가 볼게.”

아론의 눈빛이 냉혹하다. 안 된다는 의미를 담은 시선에도 나는 강하게 말했다.

“차원의 문을 완성하는 시간이 예상보다 지연되고 있어. 무슨 일인지 내가 가 보는 게 좋겠어.”

“알아서 대처할 겁니다.”

“아론.”

“여기 있으세요.”

아론은 단호한 어조로 내 앞을 막아섰다. 끓는 듯한 그 눈빛엔 고통도 비쳤기 때문에 나는 주먹을 말았다가 펴고 말았다.

“여기에.”

아론은 감정을 꾹꾹 눌러 넣은 목소리로 숨죽여 반복했다.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내가 포기했다는 듯이 주저앉자 아론이 그제서야 수하들을 불러 다음 지시를 이어갔다.

쓸모 없어졌다는 생각, 생과 사를 가르는 전투에서 내 할 일이 하나 없다는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마,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수하 하나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보고했다. 아론은 바로 천막을 나가 상황이 어떤지를 살폈다. 나는 열린 천막 사이로 거대한 회색 기류에 휩싸여 있는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하늘에 열린 어둡고 사악한 문을 통해서 내려온 존재. 누군가는 절망이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악몽이라고 외쳤다. 하나같이 놀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유로 경악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마족이었다. 온몸에 그려져 있는 기이한 무늬와 거대한 덩치. 분명 마왕에게 렉토라고 불렸던 마족이 아니었는가. 내가 기억하는 그는, 자신의 왕과 정사하는 사제를 알아차린 죄로 뇌가 휘저어지는 벌을 받았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몇 번 들었던 거 같은데…….

흠칫.

나는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마기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마족은 마물과 싸우는 사제를 향해서 갈퀴 같은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비명이 이어졌다. 마족의 등장은 판도를 뒤집기에 충분했다. 그를 기다렸던 에스더 경이 얼른 그를 상대하러 나섰지만 마족의 능력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왕의 바로 아래였던 그는 원래 힘과 마기가 엄청난 마족이었던 것이다. 그가 손에 피어난 갈퀴 같은 마기를 휘두를 때마다 에스더 경은 나가떨어졌고 옆에서 돌진하던 사제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수도에서 온 황제의 성기사까지 금세 함락되자 아론이 자신의 대검을 꽉 쥐었다. 아론은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선 짧은 순간 뜨거운 감정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당신이 내 전부며 내가 싸우는 이유라는…….

하지만 아론은 결국 아무 말 없이 천막을 빠져나갔고 나는 멍하게 그를 보다가 뒤늦게야 중얼거리고 말았다.

“조심해…….”

살아남아야 한다. 늘 그래 왔듯이.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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