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네. 마족을 철저하게 없앨 방법을 궁리하고 싶어서요.”
나는 그의 집념을 알고 있었다. 방법을 알 때까지 수없이 신성력을 뿜어내겠지. 전투를 치르고도 신성력이 남아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내렸다. 검게 변해 있는 땅이 눈에 들어왔다.
“왜 펠에게 대신 변명해 준 거야?”
“악의를 품었든, 선의를 품었든.”
아론이 말했다. 아주 담백하게.
“말레드레드를 쫓아다니는 자는 다 싫어서요.”
“…….”
할 말이 없다. 적이든 아군이든 날 쫓아다니는 게 이성이라면 무조건 싫은 모양이다. 그럼 여자면 되겠느냐, 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받아치지도 못하겠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땅이 이렇게 된 건…….”
나는 결국 그에게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론이 끼어들었다.
“마계에서 누군가 온 모양이죠.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요.”
“……내가 부른 게 아니야.”
“알아요.”
아론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만약 말레드레드가 불렀다면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엄청난 신성력의 소모로 목숨까지 위험했을 테니까.”
“…….”
“그리고 제가 이렇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지도 않을 거고요.”
아론은 음울한 금빛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만약 내가 적극적으로 마왕을 불러냈다면 결코 지금처럼 가만있지 않았을 거란 그의 태도에서 나는 목이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의 감정에 함몰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그가 온 이유가 있어. 내일 강한 마족이 공격해 올 거라고, 동족들이 죽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가 직접 경고한 거예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의 찬기 가득한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그를 믿어요?”
“이런 거로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야.”
“…….”
아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론이 고개를 저편으로 돌렸다. 어둠 속에 잠긴 산과 숲이 있었다.
“복수를 하러 오는 마족이라면 상당한 대군을 끌고 오겠네요. 본대는 숲을 왼편으로 두르고 산을 오른편에 끼고 있으니, 그들이 지형을 이용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운데로 몰아넣어야겠어요.”
아론은 마족이나 마물이 다른 도시로 달아나지 못하게 일망타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거라 강조했다. 신중하게 전략을 구상하며 골몰히 생각에 빠진 그가 지휘관으로 어색함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덩달아 끄덕이며 의견을 보탰다.
“지원 요청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근처 사제단에 연락해 놓으려고요. 지금 연락하면 내일 아침에는 도착할 거예요.”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지휘관들을 불러 구체적인 작전을 짜겠다며 마족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는 그가 가기 전에 얼른 그를 불렀다. 아론은 나를 돌아보았다.
“왜요?”
“나, 나도 같이 작전에 참여할게. 경고는 내가 들은 거니까, 어디서 정보를 얻었냐고 한다면 내가 우연히 마족의 말을 엿들었다고 하면 될 거야.”
“제가 마족을 죽였으니, 제가 마족의 경고를 들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거예요.”
아론은 쥐고 있는 마족의 머리를 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마족은 때때로 죽어서도 이상한 말을 많이 남기니까.”
나는 의아해져서 묻고 말았다.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조금 있다가 지휘관들을 소집할 테니 그곳에서 뵙죠.”
“응…….”
아론은 나를 지나쳐 바로 옆의 숙소로 들어갔다. 마족의 머리를 든 채로 그가 사라지자 나도 얼른 숙소로 들어갔다. 갑옷을 벗은 뒤 씻고 나오자 바깥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서늘한 밤의 온도. 어둑한 하늘색과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등줄기를 어딘가 오싹하게 만들 때, 작전실은 떠들썩했다. 지휘관들은 갑자기 아론이 회의를 소집했다는 것에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걱정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론나이드 경께서 마족의 머리를 가져가셨다고 하던데.”
“정화 작업을 따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례적이긴 하지만 직접 마족을 베었던 분이니 그만큼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으신 게 아닌가 합니다.”
“머리만 정화 작업을 따로 한다니, 그거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아론나이드 경의 실력이야 워낙 출중하니까 마족의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앨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오늘 싸움에서도 워낙 그 압도적인 실력이 잘 드러나셨으니까요. 하하.”
담소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모이라는 시간보다 아론 본인이 늦게 오고 있었다.
한참 무슨 일일까, 이야기가 이어질 때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그를 보며 놀란 탄성을 내고 말았다. 들어온 자는 당연히 아론이었는데, 그의 갑옷은 깊게 파여 있었고,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단정하던 금빛 머리칼마저 이리저리 헝클어져 방탕한 도련님처럼 보였는데 그의 두 눈만은 형형하게 타올라 마치 전쟁에서 막 돌아온 자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지휘관 하나가 기겁한 어조로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정화 작업 때문에요.”
아론이 짧게 대꾸했다. 단순한 대답에 비해 눈빛은 지독하리만큼 불쾌감이 깊어 보였다.
“자, 잘 안 되셨습니까?”
누군가 그 기세를 읽어 묻자 아론이 멈칫하고는 낮은 어조로 대답했다.
“쉽지 않더군요. 워낙 반항하는 힘이 거세다 보니.”
“그, 그럼…….”
“정화 작업은 완료했습니다.”
아론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하고는 지휘관을 둘러보았다. 아론의 눈빛은 매우 어둡고 침착했다.
“늦었습니다. 기다리게 해 드렸으니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내일 강한 마족이 마물을 이끌고 우리 본대로 쳐들어온다는 경고입니다.”
“네?”
“어, 어디서 그런 경고가?”
다들 놀라서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은 침착하게 아까 전투에서 마족이 죽이기 전 분해하며 떠들던 말을 들었다면서, 그저 허풍으로 듣기에는 의심쩍어 조사를 했다고 했다.
“정화 작업을 끝내기 전 마족의 기억을 엿보려고 했습니다. 신성력을 과하게 쏟아 넣으면 마족의 기억을 일순간 엿볼 수 있는데, 그 기억에서 준비된 군대가 보였습니다. 마족과 마물로 이루어진 군대요.”
나는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아론의 말은 꾸며낸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자연스럽고 차분한 화법에 지휘관들은 동조한 마냥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마족의 머리를 따로 가져가신 거군요?”
그제야 왜 따로 가져갔는지 이해가 간다면서 지휘관들이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 마족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셈으로 거짓 기억을 보여 준 게 아닐까요? 저희 본대를 공격해 봤자 딱히 지형상의 이로움이 없는데…….”
그때 다른 지휘관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 저항이 거세지 않습니까. 작은 본대임에도 꾸준히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가 성가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형상의 이점은 없으나, 우리는 수도가 위험할 시 지원할 수 있는 장소에 있습니다. 만약 수도를 노린다면 반드시 우리 지원 부대를 격파하고 가야 수도 점령에 유리하겠지요.”
본대를 공격하는 이유를 찾아 하나둘 말하자 지휘관 하나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그 말은 지금 어둠의 존재들이 신성국의 수도 함락을 본격적으로 노린다는 것입니까?”
그 문장은 여태 작전에서 오고 간 염려와는 사뭇 의미가 남달랐다. 마물은 보통 인간 세상을 더럽히는 데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소환되어 온다는 자체가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이었다. 마족들은 그런 마물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고, 보조하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지금 마왕의 성향하고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는데, 현재 그는 신성국 멸망에는 크나큰 관심이 없었다. 무서운 열정도 없었다. 전성기 시절엔 달랐을지 모르지만 생의 끝이라는 지점에 와 있는 시점에선 그저 다음 마왕에게 힘을 이양하면서 마계를 잘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내 느낌이고 감상이지만.’
나는 나와의 유희가 즐겁다던 그를 떠올리며 지휘관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새삼스러울 게 있냐는 반응이기도 했다.
“새로울 게 있습니까? 그들은 늘 우리 신성국을 무너뜨릴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수도 함락의 시초로 우리 본대를 선택한 것이라면 수도에서도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아론이 나섰다.
“내일 습격이 있을 거라는 소식은 이미 상부에 전달했습니다. 근처 사제단에도 지원 요청을 했고요.”
“대장님과 기사단장님을 불러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아, 된다면 에스더 경도…….”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모두 했습니다. 하지만 대장님과 기사단장님은 내일 도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괴생명체의 출몰이 많아지면서 기사단이 인근 도시에 흩어져 있기도 하고요. 아마 인원을 모아 도착한다면 내일 저녁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스더 경은 바로 오시겠죠?”
지휘관 하나가 재빨리 그의 동향을 물었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오늘 중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크게 안도했던 그는 곧 아론을 보고서 멈칫했다.
“아, 아. 물론 아론나이드 경이 계셔서 든든하지만 나이트가 있다면 사제들도 큰 위안이 될 터라…….”
“괜찮습니다. 경험 많고 능력 출중한 기사는 이 시기에 아주 중요하죠.”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본격적인 전략을 짜는 데 들어갔다. 나는 거의 듣는 쪽이었다. 현재 인원으로 어떻게 몰려오는 마물을 상대할지, 그리고 어떻게 몰아서 한군데로 몰아넣을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전술이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내 어깨까지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내가 속한 팀의 지휘관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부지휘관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녀의 능력은 선두에서 소환사들을 이끄는 데 유리한데…….”
“그럼 마물을 몰아넣는 곳에 있어야겠네요. 아무래도 차원의 문을 열어서 그들을 모조리 보내 버리는 게 중요한 작전이니까.”
누군가 대답했으나 아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저와 함께 움직일 겁니다. 제가 마족을 상대할 시 본대를 대신 이끌 총지휘관이 있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