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31화 (131/220)

131화

“반가워요, 말레드레드. 말레드레드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죠?”

나는 기꺼이 그러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에스더 경은 내 웃음에서 한기를 느꼈는지, 아니면 아론이 얼음처럼 침묵하고 있는 것이 불편한지 어, 어, 하고 말을 더듬다가 얼른 화제를 돌려서 대장의 천막으로 가자고 앞장섰다.

우리는 셋이 침묵한 채로 걸었다. 대장의 숙소로 가자마자 기사단장을 비롯하여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차례로 에스더와 아론,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들이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아론과 나를 번갈아 여러 차례 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사이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침묵했고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본대의 대장이었다.

“빨리 와 주어서 고맙군요. 쉬고 있었을 텐데 사안이 급하다 보니 부득이 연락을 했습니다.”

돌아온 우리에게 짧은 감사를 표하고는 대장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1시간 전에 마물이 출몰했다는 연락을 받고 성기사와 소환사가 출격했어요. 서너 마리의 마물이 농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제보였는데, 사제들이 가 보니 정체 모를 생명체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인간하고 몹시 흡사하지만 마물의 피부를 지녔고, 마물처럼 행동하는 괴이한 생명체들을 말이죠.”

‘뭐?’

나는 흠칫했다. 나만 기시감을 느낀 게 아닌지 아론 역시 멈칫하며 대장을 응시했다.

“사제들은 우선 신성력을 뿜어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신성력이 먹히지 않았죠. 그래서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들 피부는 마물처럼 외골격이 단단한데 신성력은 통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무기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매우 폭력적이라는 겁니다. 인간처럼 말을 하나 어눌했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 괴성을 지껄였죠. 행인들이 살려 달라 외침에도 그들을 공격하고 죽이려 한 걸 보면, 인간에게 적의가 있는 생명체입니다. 반드시 처단해야 하고 말살해야 합니다. 더 퍼지거나 더 위협적으로 변하기 전에!”

기사단장은 단호하게 외쳤다. 그는 괴생명체가 사악한 무리임을 강조했다. 모두 죽여 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어조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코 있던 내 팀의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모든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소환 영역을 그리는 힘, 그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차원의 문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까요. 한마디로 마계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굳이 마기를 뿜어내는 것도 아닌데, 번거롭게 신성력을 쓸 필요 있겠습니까? 바로 목을 잘라 버리면 될 것을.”

기사단장이 귀찮은 짓이라며 반대했다. 지휘관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소환사이기 때문에 쳐다본 듯싶었다.

“그 괴생명체가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서요. 시체라도 마계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생각 정도로 소중한 신성력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기사단장은 지휘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분위기가 조금 침침해지자 대장이 끼어들었다.

“무엇이 됐든 이런 괴생명체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게 지금 가장 큰 문제입니다.”

“노트담에서도.”

아론이 입을 열었다.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자, 아론은 겪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괴생명체가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식량을 훔쳐먹으면서요. 매우 위협적이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그리고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된 건지 의아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론은 사제단에게 따로 조사를 부탁했다고 말했다. 대장은 보고를 전해 들었다면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노트담에까지 나타났다니. 그러면 출몰한 곳이 3개 도시가 되는 건가요? 현재까지 신고를 받은 도시가 솔즈베리와 베리스, 그리고 노트담이었으니까요.”

아론은 지도를 보았다. 모두 인근 도시였고, 마차로 하루가 되지 않는 거리에 접해 있었다. 아론은 그 도시들 근처를 눈으로 훑었다.

“이곳도 안전할 수 없겠군요.”

인근에는 헤르간과 벨이 있었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사와 사제들에게 경비를 강화하라고, 도시에 명령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괴생명체가 아주 위험한 존재라는 걸 상부에 알리는 것이겠지요.”

기사단장이 말했다. 대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상부에선 괴생명체가 정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적극적인 조치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를 부른 이유는 그렇다면…….”

아론은 대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은 에스더 경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론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석연찮은 데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조사해 볼 계획이니 그동안 아론나이드 경이 에스더 경과 함께 본대를 지휘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사단장께서도 계신데.”

제가 굳이, 라고 말하며 아론은 겸허하게 사양하려 했다. 그러나 대장은 강경했다.

“기사단장께서는 여기 잠시 머물고 계신 겁니다. 계속 있으실 분이 아니시죠. 이쪽 사정에 밝으면서 우리 본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실 수 있는 분은 아론나이드 경밖에 없습니다.”

“전…….”

아론은 잠깐 나를 보았다. 아주 짧은 스침이었지만 나는 그 눈빛에서 그가 주저하는 이유가 나라는 걸 깨달았다.

“본대를 지휘할 만한 역량이 없습니다.”

아론의 거절은 깔끔했다. 아론은 바로 옆에 있는 에스더 경을 가리켰다.

“대장님의 부재를 해결하는 동안의 지휘관이라면 옆에 계신 분 혼자서도 충분히 하실 역량이 되십니다.”

“어, 어. 이거 떠넘기는 거 아니야?”

에스더 경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대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론을 지그시 보며 물었다.

“그분도 역시 아론나이드 경을 대신하여 머무르실 뿐, 여기 계속 계실 분은 아니시죠. 아론나이드 경. 혹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겁니까? 제게 말을 해 주시면 부족한 걸 채워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본대 전체를 지휘할 만한 역량은 안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대장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덕분에 움찔하고 말았다. 대장이 미소했다.

“여기 말레드레드 양이 부지휘관으로 보조하면 어떻겠습니까? 부족한 것은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겸요.”

“네?”

내 눈은 휘둥그레 커졌고 옆 사람들 반응 또한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기사단장은 결코 안 된다고 했고, 내 지휘관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휘관이 반대했고, 기사단장이 큰 소리로 그녀는 그럴 역량이 분명히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어서 나는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되겠구나, 생각했다.

기사단장은 열렬하게 외쳤다.

“그녀는 신분이나 능력 면에서 지휘관 옆에 설 사람이 아닙니다! 경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격 있는 사람을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은 생각이에요!”

에스더 경이 나서지 않았다면. 에스더 경은 대장을 향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론나이드 경은 성기사니까 소환사 역할에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겠죠. 부지휘관에는 소환사를 배치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소환사 중에서도 소환 영역을 그리는 데 탁월하다고 하니까, 아론나이드 경이 작전을 짤 때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아론이 짐짓 생각해보는 척하더니 긍정했다. 나는 설마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은 내 시선을 느꼈지만 나를 보지 않으며 대장에게 고민 많이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저를 배려해 주신다니, 제가 거절할 수가 없군요. 역량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아, 그럼 본대의 지휘관 자리를 승낙하시는 겁니까?”

“대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만이요.”

두 사람은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속이 타는 것은 나였고 부아가 치민 것도 나였다. 나는 아론이 아닌 에스더 경을 노려보았다. 내 곱지 않은 시선에 움찔하더니 그는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미녀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건 기쁘지 않은데요.”

“애초에 왜 저까지 소환한 거죠? 이 보고는 제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왜 부른 건지 진정 모르는 겁니까?”

에스더 경은 멈칫했다. 알고 있을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며 그가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야 당신을 소환하지 않으면 아론나이드도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요.”

“……!”

“당신과 아론나이드에 대한 소문은 수도까지 번졌어요. 그 반듯하고 예의 바르지만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유망한 성기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까지 한 상대가 있다니. 아론나이드의 부탁이었지만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라도 찾아와 볼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그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들여다본 에스더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당신을 직접 보니 좀 의외군요. 전 사실 아론의 마음을 가져가 놓고 시간을 끈다는 말에 어떤 악랄한, 죄송합니다만, 솔직하게 말했네요. 여자인가 했는데, 당신은 전혀 그런 여자로 안 보이거든요.”

“……겉보기론 모르는 거예요.”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론이 대장에게 업무를 넘겨받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단장과 지휘관이 그 옆에 달라붙어서 진지하게 돕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 남자. 아론은 확실히 무리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제 존재감을 드러낼 줄 아는 사내였다. 나는 에스더 경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도까지 소문이 났다면 그……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다는 의민가요?”

“물론이죠. 말씀은 따로 안 하셨지만. 늘 이 작은 본대 소식을 보고받고 있으신 거로 보아 확신합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매우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