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30화 (130/220)

130화

“……그걸 멋대로라고 하는 거야.”

“그래요? 하지만 진짜 돌 거 같아서.”

아론은 절박한 어조로 속삭이고는, 다시 내 손을 붙잡으려 했다. 나는 그 손을 다시 한 번 뿌리쳤다.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론의 표정이 완전히 틀어졌다. 얼음처럼 싸늘해진 그를 보면서 나는 괴롭다는 듯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론, 싫어……. 난 이렇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

아론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계속 멋대로 하겠다는 의미 같았다. 나는 그에게 불만을 표현하듯이 두 손을 주먹 쥔 채로 강하게 외쳤다.

“마계로 소환되지 않게 도와주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마왕과의 유희는 엄연히 내 선택으로 시작된 것이다. 고귀하고 신실하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마왕의 유혹이 달콤했다기보다 내가 쾌락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따라서 나는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진다는 마음으로 아론을 막아야 한다. 아론이 느끼는 감정들은 안타까웠고, 애절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 일을 그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런 이기심은 부릴 수 없었다.

“……아론, 제발 내가 해결하게 해 줘. 이렇게 나를 쫓아다니며 네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 말은 마계로 불려 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의미예요?”

“……지금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희망의 불꽃이 튀었다. 나는 그가 더 섣불리 기뻐하기 전에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마계로 안 간다고, 아론을 택한다는 건 아니야. 나는…… 아론이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싫어. 난 원래 이런 사람인데 이것 때문에 아론이 매번 상처 받는 게 불편해.”

아론이 멈칫했다. 나는 가슴이 아려 왔지만 지금 아니고서는 그를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날 따라다니며 간섭하는 건 멈춰 줘.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제가 말레드레드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를 보았다. 느리지만 천천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론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론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있었다.

“전 말레드레드밖에 없는데.”

“아, 아론…….”

아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함몰된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절 미워해도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겠어요.”

“아론!”

“말레드레드를 구속하고 따라다니겠어요. 절 미워하세요. 절 저주하고 증오하세요.”

아론은 한 자 한 자 감정이 복받친 어조로 말했다.

“절 잊고 떠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에 가까웠다. 서로의 눈길이 파란 불길처럼 부딪치고 있을 때, 자리를 피했던 사제가 다시 건물 안으로 허둥지둥 돌아왔다.

“경?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아론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서 말이죠?”

“에스더 경입니다! 그, 그 이름도 쟁쟁한 나이트의 한 분께서……!”

사제는 너무나 흥분한 상태였다. 벅찬 감정에 그는 말을 잘 잇지 못하더니 이내 전달 온 내용을 말했다.

“바로 본대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보냈습니다! 노트담 전체에 보내셨더군요! 아론나이드 경이 어디에 있든 즉시 본대로 귀환할 수 있도록!”

“……즉시 말입니까?”

아론은 다소 놀란 듯했다. 급한 귀환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중대한 일이 발생했으니 돌아오라는 통지였다. 아론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를 두고 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으나, 어디까지나 나이트가 요구한 건 아론 한 사람이었다.

“떠나야겠네.”

나는 쌀쌀맞은 어조로 말했다. 아론의 표정이 좋지 못했으나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여기 하루 더 머무르겠노라고 우아하게 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야심 찬 계획은 곧 들려오는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 그리고 굵은 글씨로 사제 말레드레드도 함께 있다면 같이 오라고,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사제 말레드레드 맞으시죠?”

나는 얼떨결에 끄덕이고 말았다. 사제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두 분. 함께 본대로 귀환하셔야겠네요.”

노트담의 성전을 떠나면서 우리 둘 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론은 이대로 바로 본대로 끌려간다는 것에, 나는 아론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둘 다 표정이 굳어져 있었는데, 아론이 말에 먼저 탄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분명 전투 때문에 저희를 불렀을 겁니다.”

“아론이 여기 와서 그래.”

나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아론이 발끈했다.

“말레드레드도 본대에 중요한 전력입니다.”

너만큼은 아니지. 나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아론은 심히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미 볼일을 다 보지 않았습니까.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요.”

“난 쉬고 싶었어. 3일이나 휴가를 낸 건 단순히 약초 때문만이 아니야!”

“마계로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숙소를 벗어나서?”

“그, 그렇지 않아!”

나는 울컥했다. 아론은 내가 배덕한 정사를 위해서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분노가 치민 채로 외쳤다.

“난 그동안 힘들었어! 아론과 그 사이에서……! 끊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존재들 사이에서……! 아론은 우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어! 난 원래 제멋대로에 나태한 사람이란 말이야! 늘 편한 관계만을 추구하고 바랐던 사람…….”

아론은 멈칫했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고백했다.

“언제든 편하게 헤어질 수 있는 사이, 그렇게 헤어져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이, 그런 걸 바랐는데……. 근데 둘 다 가벼울 거라 말하면서 정작 행동은 다르게 하니까…….”

“…….”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 씁쓸한 고백에 아론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후 내게 물었다.

“저 말고, 마계의 존재도 말레드레드와 새로운 관계를 원하는 겁니까? 훨씬 친밀하고 독점적인?”

“……응.”

“그렇군요.”

아론은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주변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은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아론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읏.”

나는 절로 아론의 허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론은 말이 크게 앞발을 구르도록 만들고는 짧게 외쳤다.

“출발하겠습니다.”

“아, 아론.”

“본대는 더 안전할 겁니다. 신성력을 바닥에 뿌리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본대에 있을 때는 마왕에게 소환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론은 그 점을 꼭 집어서 말하고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 신성력을 넣을 수 있을 만큼 부여했으니, 감히 말레드레드를 소환하지 못할 겁니다.”

마왕은 나를 소환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그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가 얌전히 소환을 포기하고 있을까? 나는 문득 두려워졌지만 일단 아론이 차고 나가는 동작에 그를 꽉 붙든 채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론은 내가 본대에서 노트담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을 반으로 단축해서 돌아갔다. 우리가 본대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는 갈색 머리를 가진 마른 체구의 기사였다.

“아론나이드!”

아론의 이름을 존칭 없이 편하게 부른 사내는 입가에 활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론은 그에게 짧게 묵례하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내가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일부러 무시하고 혼자서 말에서 뛰어내렸고, 그 탓에 잠깐 휘청거리고 말았다. 아론이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고 다시 거두었을 때, 갈색 머리 기사가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다행히 빨리 왔군.”

“왜 저를 부른 겁니까.”

“어어, 이거 당황스럽네. 누가 들으면 자네가 나이트고 내가 본대의 지휘관인 줄 알겠어.”

나는 그제야 격식 없는 자세로 편하게 말하고 있는 사내가 그 명성도 자자한 나이트 중 하나인 에스더 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사십 정도 될까. 소탈한 인상에 소박한 갑옷이 인상적인 그는 그런 아론의 어깨를 툭 치고는 히죽 웃었다.

“부를 수밖에 없었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거든.”

“나이트가 해결할 수 없는 일 말입니까.”

“나라고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지 않아. 이상한 생명체가 등장하는 것과 같은 건 말이지.”

“이상한 생명체요?”

“자세한 건 대장의 천막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자네를 마중 나가겠다니까 따라 나가겠다고 하는 걸, 작전을 짜고 있으라면서 간신히 말려 둔 상태니까.”

그렇게 말한 에스더 경은 나를 힐끗 살폈다. 그 눈길은 엿보는 눈이어서 정식으로 인사하기가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뭇거릴 때 에스더 경이 아론의 귀에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둘이 애는 만들었어?”

“……!”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아론은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외쳤다. 에스더 경은 우리 둘의 격렬한 반응에 다소 놀랐다는 듯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아니. 자네가 그녀 때문에 나를 부른 건 너무나 명백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여기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자네가 죽고 못 사는 소환사가 있다고 말이야.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갔다고 하기에 뭔가 잘된 줄 알고 물은 거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는 나이트였다. 그 모습이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더 착잡했다. 도대체 아론과 내 사이에 대해 어떤 소문이 나 있는 걸까. 이러다간 우리가 모르는 결혼식까지 거행될 거라고 소문날 지경이었다.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눈앞의 에스더 경에게 중요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에요.”

“…….”

아론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이 됐든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이트 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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