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아론은 침착하게 중얼거리더니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나를 심판하는 눈이었으며, 내게 실망한 눈이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혀서 말을 하지 못했다. 아론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는…….”
아론의 목소리는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말레드레드가 좋아요.”
“……!”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아요. 이렇게 다른 남자의 냄새가 나는데도.”
아론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전히 말레드레드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모든 남자를 베어 버려서라도.”
“……아, 아론.”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아론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숨죽였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씻어요, 말레드레드.”
“아, 어.”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론은 내가 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 없었다. 씻으러 가면서 나는 내가 돌아왔을 때 아론이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너무나 큰 배신감과 실망감에 나를 떠나 버렸다고 해도 놀라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나 깨끗이 씻은 뒤 문을 열었을 때, 아론은 멀쩡하게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가요.”
“어, 어디로?”
“갈 데가 있어요.”
아론은 설명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에 끌려서 얼떨결에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자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청년이 번쩍 일어났다. 그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인사하려고 아침부터 와 있었어요! 어제 구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우리 친하게…… 어, 어? 말레드레드! 이야기를 안 듣고 어딜……!”
아론은 그를 무시한 채 나를 문으로 끌었다. 나는 당황해서 청년을 보았다가 이내 다시 아론을 쳐다보았다. 아론은 청년이 뒤따라오지 못하게 여관 문을 쾅 닫아 버린 상태였다.
“왜요?”
“뭐, 뭐 하는 거야?”
“철저하게 하려는 것뿐이에요.”
아론은 문 열라고 쾅쾅거리는 청년을 쏘아본 뒤 말했다.
“위험한 마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 사람은 일반인이야! 보면 알잖아!”
“모르겠어요. 이젠.”
아론의 목소리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그 말이 내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는 여자. 그건 내가 바란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왠지 화가 치밀었다. 설사 내가 다른 남자가 마왕이라는 걸 숨겼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한 터였다. 그런 걸로 나를 몰아붙이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아론이 나를 말에 태웠다.
“!”
갑작스럽게 눈높이가 높아지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론이 얼른 말 등을 한 손으로 짚어 올라타고는 나를 잡아 주었다.
“가요, 한시라도 빨리.”
“어디를?”
아론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고삐를 잡아당길 뿐이었다. 말은 빠르게 시내를 달렸다. 십여 분쯤 달렸을까. 노트담 외곽 길로 접어들자 나는 그가 어디로 가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성전으로 가는 거야?”
아론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전으로 가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불현듯 두려움이 들었다. 오늘 아침 마계로 자주 소환되고 있다고 그에게 고백했다. 그 뒤 성전으로 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혹시 그가 나를 상부에 고발하려고?’
노트담의 성전에는 기거하는 사제들이 있었다. 수도에서 높은 자가 올 때 머무는 곳도 겸하고 있어서 규모가 꽤 컸는데 갑자기 아론이 그런 곳으로 날 끌고 간다고 하자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아론이 나를 해할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론은 오늘 아침 일로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만약 마왕과 내통하는 사제로 찍히면 어떻게 될까. 조사가 이뤄지고 사실로 판명되면 나를 끔찍한 화형에 처할 것이다. 사지가 찢긴 채로, 온몸이 불타겠지. 그 불길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생부 역시 불명예를 안고서 치욕스러운 대접을 받을 테니까.
죽어서까지 영원히 저주받을 상상을 하자 몸이 떨린다. 아론이 의아한 듯 고개를 내렸다.
“괜찮아요?”
“……아니.”
“안색이 창백해요. 잠시만요.”
아론은 얼른 제 손에 신성력을 피웠다. 하지만 구역감은 신성력으로 해결될 게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외쳤다.
“나,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성전이요. 신성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
내 눈이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는지 아론이 멈칫했다.
“걱정 말아요. 말레드레드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아론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의 품에 주눅 든 채 안겨 있었다. 이윽고 성전에 다다르자 나와 있던 사제 하나가 무슨 용건인지를 물었다. 아론은 제 신분증을 내밀고는 말했다.
“기도를 통해서 엘크리찬의 위대함을 영접하려고 합니다.”
“아, 그런 이유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들어가십시오.”
사제는 아론의 이름을 확인하고 반가워하며 안을 가리켰다.
과연, 노트담의 성전은 본대에 있는 작은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높은 천장과 화려한 조각상에서 위압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졌는데, 아론은 새로울 게 없다는 듯이 나를 신의 석상 앞으로 데려갔다.
“폐하께서 늘 성전 앞에서 신성력을 받아들이시죠. 자신을 보호하는.”
“아드리아 황제께서?”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들이 폐하께 부여하는 신성력은 엄청나요. 감히 마왕이 와도 폐하를 마기로 어쩌지 못할 만큼 부여해 넣죠.”
신성국의 황제가 누구보다 사악한 힘을 두려워하고 그를 위해 힘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아론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나를 석상 앞에 세웠다는 것이다.
“처음엔 형식적으로 그러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이트들에게 들어 보니 석상 앞에서 신성력을 부여해 넣으면 훨씬 강력하게 심장에 깃들게 된다고 하더군요. 상대를 더욱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아론의 두 손에서 환한 빛이 뿜어졌다.
“아, 아론…!”
그의 손이 내 가슴으로 향하는 순간, 거대한 빛의 파동이 내 가슴으로 쏟아졌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규모였다. 나는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성스럽고 거대한 빛에 감히 눈을 뜰 수 없었고, 그 힘을 받아들이는 벅찬 감동에 심장이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찰나 아론이 나를 붙잡았다. 그의 몸에선 아직도 꺼지지 않는 신성력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계로 못 가게 할 거예요.”
“아, 아론…….”
“절대로.”
아론은 집념에 찬 눈동자를 번쩍였다. 그 눈은 독점욕과 분노로 번들거렸고, 슬픔과 괴로움으로 일렁였다. 숨을 헐떡이는 그의 모습은 이렇게 힘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왠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가 안타까웠고 그가 애틋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론, 난 정말…….”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사제였다. 그는 갑자기 성전 전체가 위대한 빛으로 가득 차, 놀라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아론의 품에 안긴 나를 보았다.
“오오, 정말 위대한 빛이 당신과 함께 머무는군요!”
내 몸은 온통 흰빛으로 번들거렸다. 채 흡수하지 못한 신성력이 피부를 겉돌다가 사라지자, 아론은 그제야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사제는 호들갑 떨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의식인가요? 혹시 두 분이 결혼하시는 건가요?”
“아, 아니…….”
“생각 중입니다.”
아론의 대답에 나는 황당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론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뻔뻔하게 사제를 상대했다.
“노트담에는 신의 성물이 없습니까?”
“아아, 안타깝게도 저희는 따로 보관하고 있는 성물이 없습니다. 어느 지역에선 성물의 기운을 담은 액세서리도 판다고 하는데 저희는 그런 건 없고, 방문자들을 위한 작은 석상 정도는 판매합니다.”
“그렇군요.”
아론은 짤막하게 말했다. 사제는 그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건 필요 없으십니까? 우리 성전엔 두 분이 조용히 머무실 수 있는 숙소도 있습니다만.”
우리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은근히 권하는 사제였다.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서 더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아쉽네요. 곧 노트담을 떠나실 예정이신가요?”
“네.”
아론은 나를 보며 말했다.
“다른 도시로 갈까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두 분 모두 좋은 여행 되시길 빕니다.”
사제가 물러나자 아론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가 끌고 가기 전에 손을 뿌리쳤다.
“너랑 안 가.”
“왜요?”
“그, 그건…….”
나는 속에서 울화가 터진 것처럼 외쳤다.
“이건 내 휴가니까!”
“…….”
“네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내 휴가를 네가 멋대로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진 않아!”
“전 멋대로 하려는 게 아니에요. 말레드레드를 보호하려는 거죠.”
“난 네게 보호해 달라고 한 적 없어.”
“알아요.”
아론은 내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에게서 쏟아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무겁고 암담했다.
“제가 그러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아서 하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