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23화 (123/220)

123.

“뭐, 뭐예요?”

나는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게 아닌지 비틀거리다가 소파에 한쪽 손을 짚어야 했다. 토끼 마족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권유했다.

“다시 앉는 게 좋겠습니다.”

어지럼증을 걱정하면서 정작 내 죽음은 무심하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토끼 마족은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왕께선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편하길 바라실 겁니다.”

그렇다. 그는 철저히 마왕의 수하일 뿐이다. 나라는 인간은 마왕이 아끼기 때문에 융숭하게 대접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태도의 그를 보면서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경험했다. 어떤 말을 해도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절망감에 엎어지듯 누워 버리자 토끼 마족이 위로하며 말했다.

“쉬세요. 요기할 것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불꽃이 타올라 없어졌다. 그가 가고 나자 나는 눈을 감았다. 복통도, 몸을 쑤시는 마기의 고통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가라앉히려 신성력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손끝을 맴도는 흰빛은 잠깐이었을 뿐이다. 그걸 유지할 힘이 부족했다. 나는 어지럼증이 심해지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 여기서 나가지?’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왕의 방을 뒤져 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라면 특별한 소환 도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방 구석구석을 뒤졌다. 침대 밑에도 보고, 왕의 옷장도 파헤쳐 보고, 심지어 얼마 없는 그의 책도 다 꺼내서 일일이 펴 보았다. 그렇게 마왕의 방이 엉망이 될 때까지 온 구석을 다 뒤져 보았지만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한 가지 안 건.’

마왕이 그다지 물욕이 없는 존재라는 것뿐. 나는 허탈해하며 테라스로 몸을 돌렸다. 마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마왕이 이곳에 서서 자신이 이 세계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자신 있어 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어떻게 내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생소하고 낯선 마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 때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먹을 것을 가져왔습니다.”

토끼 마족은 접시를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을 어지른 것으로 뭐라고 하려나 긴장했던 나는 뜻밖에 토끼 마족이 싱긋 웃으며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 쉬실 수 있도록 물러나겠습니다.”

그가 다시 사라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스로 나온 나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존재를 문득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겉으로만 보면 그는 그저 잠든 것 같았다. 잔혹한 아름다움을 품은 채, 우아하게 꿈을 꾸고 있는 절망의 왕……. 나는 문득 의아해졌다. 토끼 마족은 나를 어찌 믿고 이 방을 떠났을까. 내가 마왕과 쾌락을 나누는 상대라고, 그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걸까?

그 순진함을 비웃듯 나는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어쩌면 그의 목을 졸라서, 여길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사제였고, 그를 죽이는 게 사제로서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그의 목에 손끝이 닿는 순간, 나는 살의가 약해지는 걸 느꼈다. 그와 몸을 통했던 기억 때문일까. 아니, 그가 나란 존재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유희를 제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진정 알아봤기 때문에.

빛과 어둠. 모두 지닌 것을 비웃지 않고 매력적인 제안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그의 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내 몸이라도 치료해야지 싶어 신성력을 뿜어냈을 때, 그의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마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등을 부딪쳤고, 쿨럭 크게 기침하고 말았다. 흐릿한 눈으로 보자 눈앞에서 무언가가 돌고 있다.

‘저건…….’

룬. 마계에 처음 온 날, 내 머리를 휘저었던 기운을 마왕이 룬이라고 불렀다. 그의 애완동물이라는 룬은 신경질을 내듯 내 쪽으로 위협적으로 기운을 꿈틀거렸다. 바로 공격해 오진 않았다. 그저 천장에 빙글빙글 돌면서 씩씩거리듯 움직일 뿐이었다. 나는 겨우겨우 몸을 추슬렀다.

‘왜 토끼 마족이 마왕과 단둘이 두었는지 알겠어.’

누군가 해를 끼치면 룬이 일어나 공격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룬이 꼬리 부위를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를 가르는 험악한 소리가 나고 꼬리에 맞은 탁자가 두 동강이 났다. 꼼짝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한숨 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최악이야…….’

몸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가슴 깊숙이에서 기침이 올라왔고 온몸이 서리를 맞은 것처럼 떨렸다. 마기가 몸을 침식하고 있는 걸까. 나는 어질거리는 시야를 느꼈다.

“제발 나를 보내 줘요…….”

내 세상으로. 나는 어지러운 의식에 그를 부르짖고 말았다.

“마왕이여, 제발…….”

그리고 그때, 그가 일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막 일어난 사람 같았다. 어디 아프거나 고통 받는 것 없이 잠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몸을 일으킨 사내는 천장에 돌고 있는 기운을 바라봤다.

“네가 나를 부른 것이냐.”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돌리다 방이 엉망인 것을 확인했고, 그러다가 내가 벽에 기대 앉은 것을 마침내 발견했다.

“누가 나를 불렀나 했더니.”

마왕은 묘하다는 듯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기쁜 것처럼 보였으나 어딘가 의아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대를 소환할 힘이 부족했을 텐데.”

잠시 제 몸을 내려다본 마왕은 이유를 알겠다며 중얼거렸다.

“에레나군.”

몸에 돌고 있는 기운이 불쾌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마왕은 나를 보았다.

“내게 힘을 여러 차례 공급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그대가 소환된 모양이야.”

“…….”

“에레나의 눈에 띄고도 살아 있다니.”

마왕은 어찌 된 경황인지 이미 모두 파악했다는 눈빛이었다.

“운이 좋군.”

마왕은 그렇게 비웃듯이 감상을 말했다. 얄미웠다. 사실 그가 소환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를 노려보고 있으니, 그가 손을 뻗어 내 몸을 괴롭히는 마기를 모두 걷어 갔다. 가슴이 일순간에 편해졌다. 기침이 잦아들자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열도 가라앉았다. 나는 안도했다는 듯이 눈을 끔벅거렸다. 마왕은 그런 나를 보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드디어 그 신성력 가득한 그대의 보금자리를 벗어났군.”

“무슨 말이에요?”

“그대를 소환시킬 수 있다는 거지. 언제라도.”

마왕은 기분 좋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움찔했다. 그 말인즉 내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든 마계로 갈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마계로 가면, 더욱 그의 유혹에 쉽게 빠질 것이고, 나도 모르게 그의 제안을 승낙할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으로 쳐다보자 마왕이 얼른 내 얼굴을 잡아 왔다.

“겁먹지 마. 그대를 그런 거로 괴롭히지 않을 테니.”

“……무, 무슨.”

“영혼에 대한 제안은 없던 거로 하지. 거절할 것이 명백하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지적인 존재들을 상대해 왔어.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건 내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쉬운 일이야.”

마왕은 내 통통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슥 매만졌다. 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의 눈길이 그윽해졌다.

“물론 그대가 제안을 거절했다는 건 무척 실망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어. 차라리 그대를 잃었으면 잃었지, 죽일 순 없더군.”

“…….”

“그래서 나는 우리 관계를 예전처럼 이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가끔 만나서 편하게 쾌락을 나누는 거로. 여전히 내가 그대의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야. 어때?”

마왕이 마치 식사 제안을 하듯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신 그대는 가끔 그대의 보금자리에서 나와야 해. 그대를 보호하는 힘에 대해서 내가 모른 척해 주는 대신, 그대는 나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것만 지키면 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속삭이는 그는 금세라도 나를 덮쳐 올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옷을 벗기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 제가 그러고 싶지 않다면요? 읏…….”

그의 손이 내 몸을 파고든다. 열이 올랐던 몸은 잔열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왜 그러고 싶지 않지? 그대가 원하는 것이잖아. 음탕하고 난잡한 상대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욕망하는 것.”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왕의 목소리는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럴 수 있는 상대는 나밖에 없잖아?”

나는 그의 말에 아론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주 잠깐 그를 떠올렸을 뿐인데, 마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른 누구도 생각난 모양이군. 그게 혹시 그 성기사인가?”

마왕은 꾀어내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대의 몸에 신성력을 부어 넣고, 땅에 신성력을 뿌려 나를 방해하고 있는.”

나는 그만하라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론은 내 영역이었다. 그가 건드릴 수 없는. 마왕은 내 눈에 비친 거부감을 읽고서 입가를 올렸다.

“그런 눈 하지 마.”

마왕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박으며 속삭였다.

“당장에 녀석을 끌고 와 그대의 앞에서 목을 치고 싶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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