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22화 (122/220)

122.

“냉정하다는 말 자주 듣죠? 저랑 술이라도 마시며 찬찬히 알아 가면 어때요? 그럼 그 얼음장 같은 마음에도 온기가…….”

꺼지라는 말조차 아깝다. 나는 몸을 돌렸다. 무시하고는 걸어가 버리자 잠깐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났으나 그건 곧 사라졌다. 여관으로 돌아왔다. 작은 아이가 마기에 침식되어 가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제로서의 책임감과 도의감이 나를 무겁게 내리누를 때, 배가 저릿하기 시작했다.

“으윽…….”

무무 약초의 부작용일까. 나는 배를 움켜잡았다. 욱신욱신 뱃속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나는 잇새로 간신히 숨을 내쉬며 침대로 올라갔다. 망토를 풀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복통에 그저 배를 꽉 움켜쥔 채로 옆으로 누웠을 때, 어두운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여긴…….’

나는 긴장하고 말았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기이한 공기. 시야에 잡히는 보랏빛의 하늘이 내 몸과 마음을 위축시킨다. 나는 눈만을 천천히 굴렸다.

‘마왕?’

나는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크고 넓은 침대에는 그 혼자만이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그의 방에 소환되었음을 깨달았다. 평소처럼 나는 그의 방에서 눈을 떴지만 이상하게 그는 누운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지?’

새로운 소환 방법일까. 이른바 잠자면서 소환하기. 고개를 갸웃거릴 때, 다시 가라앉았던 복통이 고개를 치밀었다. 나는 배를 부여잡은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시야까지 어지럽다. 인상을 찌푸릴 찰나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

에레나. 그녀는 다짜고짜 들어와 마왕이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한구석에 있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잠들어 있는 마왕만을 보며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기를 공급해도, 일어나지 않으시다뇨.”

그녀는 마왕의 뺨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귀중한 보물을 훑듯이 천천히 매만졌다.

“대체 당신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무척이나 아끼고 아낀 것이 사라져 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에레나는 마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뺨을 만지던 손을 떼더니 두 손을 벌려 검은 마기를 생성했다.

“……읏!”

어둡고 탁한 마기. 그 마기는 그대로 마왕에게 밀려 들어갔다. 마기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이 방 안 가득 몰아치자 나는 굳어진 채로 있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질끈 돌렸을 때, 나는 어느새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레나를 발견했다.

“너는…….”

에레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왕 성 한가운데 버젓이 내가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고, 바닥을 유심히 보더니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군. 왕께 드린 마기가 왜 머물지 않고 사라지나 했더니.”

에레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 소환 영역 때문이었잖아?”

그녀는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내 목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나는 컥컥거리며 발버둥쳤다. 그러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족 여인의 비릿한 목소리만이 귓가를 흔들었다.

“왕께서 급격하게 힘이 없어지셔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설마 네 탓일 줄이야.”

“읏……!”

“널 무리해서 소환하려다가 마계까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고! 한낱 징그러운 인간 때문에!”

그녀는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통쾌하다는 듯이 바라본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더 괴로워해 줘. 내 분이 조금이라도 풀리도록.”

그녀의 눈빛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한 감정,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말겠노라는 살기가 나를 조여 온다. 나는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파팍!

“놔주십시오.”

그때 누군가 검은 불꽃을 튕기며 나타났다. 그는 내 팔을 잡고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들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손아귀 힘이 조금 약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흐릿하게 눈을 뜨자 하얀 털, 길쭉하게 솟은 귀,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토끼가 보인다. 그가 말했다.

“그녀는 왕께서 소환한 인간입니다.”

“누구 손목을 함부로 잡는 것이냐!”

에레나는 당장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라고 외쳤으나 토끼 마족은 동요하지 않았다.

“저는 왕께 도움이 된다고 하여 당신을 성에 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해가 된다면, 그 즉시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해? 누가 해가 되는데? 이 인간 때문에 왕께서 저런 상태가 된 것을 진정 모른다는 것이냐!”

에레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 외쳤다.

“고위 마족인 너도 알 텐데? 왕께서, 무리하게 소환하다가 저렇게 무력해지셨다는 것을! 보통의 소환으로 이렇게까지 기운이 약해질 리는 없어. 왕께선 분명 신성력을 무리해서 뚫으려다가 이렇게 되셨겠지! 이미 계속된 사제 소환으로 조금씩 기운을 잃어 가던 왕이셨으니까!”

내 소환이 그렇게까지 부담되는 것이라니.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에 비해 토끼 마족은 매우 침착했다.

“왕께서 원하신 겁니다.”

“충신이라면 주군이 제 몸을 해쳐 가며 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막아야지!”

에레나가 호통쳤다. 그녀는 분노에 떨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최근에 왕께서 인간계를 가신 걸 안다. 온 마계가 요동쳤으니까! 힘을 잃어 가는 마왕이 인간계로 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나? 전성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하지만 지금 왕께선 제힘을 반 이상 잃으신 상태…….”

에레나는 잠깐 마왕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슬프고 애절하고, 분통 터지는 감정이 그녀의 눈에 어른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소멸이 앞당겨진단 말이다!”

“그게 왕의 뜻이라면, 기꺼이 왕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융통성 없는 토끼 마족의 대꾸에 에레나의 기운이 험악해졌다. 무거운 마기가 폭발하듯이 피어나자 곤란한 건 나였다. 나는 온몸을 마기가 찔러 오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어금니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갈 정도로 아팠다. 토끼 마족이 나를 보고서 급하게 말했다.

“충신이라면.”

에레나가 멈칫했다.

“왕의 것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

“왕이 아끼는 것을 죽이면 절대 왕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을까. 에레나가 내 목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쿨럭, 쿨럭…….”

머릿속이 어지럽고 눈앞이 혼미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몸에서 아직도 어른거리는 기분이었다.

“왕께서 깨어나시면 연락해 줘.”

에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와 토끼 마족을 지나쳐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나가기 전 깜빡했다면서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내가 왕이 되면.”

에레나는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너부터 찢어 죽여 버릴 거야.”

토끼 마족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에레나는 진하게 웃고는 나를 한 번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금세 문 너머로 사라졌다. 토끼 마족은 쓰러져 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

“저쪽 소파에 앉아 계시면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목이 욱신욱신 아팠고 온몸이 열이 난 것처럼 뜨거웠다. 아픈 몸은 마기의 후유증이었다. 잠시 사라졌다 나타난 마족은 힘겹게 소파에 앉아 숨을 내쉬는 나를 보면서 컵을 내밀었다.

“드십시오.”

고맙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혀 때문에 나는 그저 고개만 까닥였고 그가 준 컵 안의 내용물을 마셨다. 무색이었지만 향긋한 냄새가 있었다.

“기력을 회복해 줄 약초를 넣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기력이요.”

토끼 마족은 싱긋 웃었다. 여느 때처럼 나를 상대하고 있는 그가 참으로 굉장했다. 방금 전 마왕 후보에게 들은 협박은 신경 쓰이지 않는지, 그는 내 상태를 파악하더니 고민된다는 듯이 말했다.

“큰일이군요. 마기가 침투한 것 같은데.”

“……돌아가면.”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어요.”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토끼 마족은 안심이라며 역시 웃었다. 그는 내가 마기를 치료한다는 것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는 듯이 더 도와드릴 게 있는지만 물었다.

“어, 없어요, 근데…….”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돌아가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인간계로 돌아가는 건 그의 권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도 고위 마족이니 나를 돌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은 것이다. 그가 멈칫하며 심각한 눈빛을 하자 나는 얼른 덧붙였다.

“이곳에 있으면 좋지 않을 거 같아서요. 다른 마족도 올 테고, 그도 언제 회복될지 모르니….”

내 말에 토끼 마족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사제는 마계에 도착한 지 하루를 넘어가면 죽을 테니까요.”

나는 토끼 마족을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창백해졌을 내 얼굴을 보면서 토끼 마족은 고민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돌려보내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당신은 왕께서 소환하신 겁니다. 사제를 소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사제를 같은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왕께서 하신 일을 제가 맘대로 참견하는 것도 주제넘기 때문에…….”

토끼 마족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왕이 깨어나실 때까지 있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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