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명심하죠.”
나는 잡화점을 나왔다. 살 수 있을 때 사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제 욕망에 녹아내려 몸을 섞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걸어서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와 산 걸 꺼내 놓았다. 바싹 말린 꽃잎. 나는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처음엔 달콤한 물이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곧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쓴맛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쓴지 혀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얼른 탁자에 놓인 물을 먹었지만 쓴맛은 지독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망토를 차려입고 나왔다.
인근 주점으로 달렸다. 달콤하고 향긋한 차를 주문하고 나오자마자 그것을 들이켰다. 그제야 입안의 쓴맛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연거푸 차를 마신 나는 컵을 내려놓다가 나를 보고 있는 사내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보니까 다리를 절던데. 불편하시겠어요.”
안쓰럽다는 눈빛에 나는 그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 쌀쌀맞은 태도에도 청년은 기죽지 않고 좋은 걸 준다면서 품 안에서 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 줄 알아요?”
청년은 긴장감이 흐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신성력이 들어간 물이에요! 당신의 다리를 말끔히 낫게 해 줄 수 있죠!”
사기를 치려는 걸까. 나는 투명한 병 속에 담겨 있는 물을 쳐다보았다. 약간 초록빛을 띠는 약물은 신성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나 묘한 향기가 났다. 언뜻 익숙한 냄새 같기도 해서 쳐다보고 있자 청년이 기뻐하며 말했다.
“믿어 봐요! 하나만 먹어도 효과가 좋아서 절 찾게 될 테니까! 물론 가장 좋은 건 꾸준히 매일 먹는 거예요!”
청년은 품에서 쭈르륵 병을 꺼냈다. 그는 막 상인들의 거리에서 이것을 팔고 왔다고 말하면서 이것들은 집에 가져가려고 남겨 온 것이라 했다.
“원래 다 팔아야 하는데, 집에도 달라는 친척분이 계셔서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지니고 있던 참이었어요. 저녁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젊은 아가씨처럼 보이는 여성이 다리를 절자 가만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청년은 정말 애틋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표정은 매우 진실해 보였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항간에서 신성력이 담긴 물이라고 거짓되게 파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신성력은 엄격하게 국가에서 관리하고 활용하는 자원이었다. 따라서 허가 없이 신성력이 담긴 물을 파는 사제는 없었다. 치료 사제 역시 신성국이 철저하게 관리하며 전투 지역 위주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물에 담긴 채로는 효과가 있을 리가 없는데.’
신성력이란 가만히 머무는 힘이 아니다. 적합한 그릇이 아니라면 신성력은 금세 수증기처럼 날아가고 만다. 그렇기에 신성력을 품을 수 있는 사제가 국가의 철저한 감독 아래 고급 인력으로써 이용되는 것이다.
나는 이 물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 보라며 은근슬쩍 돈주머니를 보여 주는 남자를 보고 난감해지고 말았다. 눈앞의 이 자를 잡아다가 신성국에서 주는 소량의 현상금이라도 받아야 할까.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고민할 때, 갑자기 허름한 옷차림의 소년 하나가 나타났다.
“저기요…….”
“어, 너는 어제 약을 샀던 아이잖아?”
청년은 소년을 알아보았다. 10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낯빛도 좋지 않았고 매우 마른 체격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굶주린 안색으로 형편이 좋지 못한 아이였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빈 병을 내밀었다.
“어제 사서 동생을 먹였는데 조금 좋아지는 것 같더니 상태가 더 나빠졌어요…….”
“꾸준히 먹어야 해. 말했잖아. 심각한 상처일수록 계속 먹어야 한다고.”
청년은 딱하다는 듯이 말하고는 아이에게 말했다.
“더 살 돈이 있니? 네 사정이 딱한 거 같으니까 특별히 싸게 줄게. 모두 다 합쳐서, 은화 한 개! 어때, 정말 싸지?”
소년은 흠칫하더니 곧 침울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어, 어제 드린 돈이 가진 거 전부라서……. 나, 나중에 갚을게요! 그러니까 한 병이라도 먼저 주신다면…….”
“그럴 순 없어.”
“제발요! 동생의 상처가 나날이 심해져요! 피부가 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요! 고약한 냄새도 나고 상처를 덮었던 천도 부패하고…….”
‘부패?’
나는 소년이 울먹이며 말한 증상이 마기에 당한 증상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멈칫해서 소년을 보았을 때, 청년은 안쓰러운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사정은 딱하지만 거저 줄 순 없어. 나도 먹고 살아야지.”
청년이 병을 잡고 일어서려고 할 때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뭐, 뭐하는…….”
“이 병 속 물은 무슨 풀을 넣어 만든 거예요?”
내 질문에 청년이 멈칫했다.
“푸, 풀이라뇨! 이건 엄연히 위대하고 찬란한 신성력을 풀어 넣은…… 아!”
순간 내 손에서 신성력이 피어나자 청년이 굳어졌다. 환한 빛을 코앞에서 볼 줄이야. 후다닥 일어나 나가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신성력으로 만든 줄을 다리에 감았다. 그러자 청년이 앞으로 쿵 넘어졌고, 나는 자리에서 내려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말했다.
“다시 묻게 하지 말아요. 무슨 풀로 만들었죠?”
“거, 거, 건, 건…….”
건건 풀? 나는 뜻밖에 매우 놀라고 말았다. 익숙한 향기라고 생각했는데 건건 풀이었을 줄이야. 그 풀은 마물을 잡는 데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일까. 마기에게 당했던 소년의 동생이 약을 먹고 조금 좋아졌다는 말을 한 건.
나는 소년을 보며 물었다.
“집이 여기서 머니?”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같이 가자.”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청년을 데리고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소년은 건장한 청년이 망토를 쓴 여자한테 꼼짝하지 못하자 신기한지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청년은 점점 주변이 허름해지고 지저분해지자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면 벼룩 같은 벌레가 붙을 수도 있는데…….”
“평생 이곳에 묶어 둘 수도 있어요.”
나는 신성력으로 빛나는 손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청년은 흠칫했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봐주세요. 돈 번 것의 반을 드릴게요! 나라에 절 신고만 하지 않으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돈을 드릴 수 있어요!”
“저쪽이네요.”
나는 그의 애원을 무시하며 소년이 쏙 들어간 판잣집을 보았다. 판자를 겹쳐서 만든 그곳은 매우 축축했고, 더러웠다. 어린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이 아니었다. 청년은 벌레를 밟을까 발을 깡충거리며 걸었다. 나는 그 때문에 집이 흔들리는 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소년이 보고 있는 작은 침대를 보았다.
“이젠 물도 못 먹어요…….”
소녀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물을 먹지 못했는지, 입 주변이 바싹 말라서 하얗게 일어났고, 손과 발 모두 찼다. 나는 소년이 가리킨 상처 부위를 바라보았다. 다리 주변이 온통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이랬어?”
“일주일이요. 그냥 멍든 상처인 줄 알았는데…….”
소년은 훌쩍이며 설명했다.
“고모가 헤르간에 있거든요. 그쪽에서 곡식을 좀 나눠 주신다고 하셔서……. 그래서 저랑 동생이랑 다녀왔는데 그 뒤로 이래요.”
마기로 인한 상처는 피부를 부패시켜 못 쓰게 한다. 나는 얼른 신성력을 뿜어냈다. 내 신성력에 거뭇한 색이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이다. 작은 힘에도 동생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지는 걸 봤는지 소년은 눈물을 그치고 감탄했다. 청년도 입을 쩍 벌렸다.
“역시 진짜는 다르구나!”
그의 감탄사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고 있는 병 다 내놔요.”
“어, 어, 이거 비싼 건데…….”
“신성력 사기죄는 감옥에서 꽤 오래 있어야 하는 거로 아는데…….”
“여기 있습니다.”
청년은 바로 품에 있던 병을 모두 내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소년에게 주었다.
“하루에 하나씩 먹여. 효과는 크지 않지만 장기를 보호해 줄 테니까.”
“네, 네…….”
나는 다시 청년을 보았다.
“성수를 팔아서 번 돈 있죠? 줘요.”
청년은 완전히 인상이 굳어졌다. 그러나 내 단호한 표정을 봤는지 울상인 표정으로 결국 주머니를 내놓았다.
“그게 있어야 여자 셋은 끼고 노는데…….”
“…….”
“아, 아니. 그러니까 연로한 부모님을 모실 수 있다고요! 모조리 가져가면 뭘 먹고 살아요?”
“건건 풀이 많이 나는 곳을 알아요?”
청년은 멈칫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집 뒤편에 엄청나게 나요. 아주 군락을 이루어서요.”
“관청에 찾아가서 말하세요. 건건 풀이 많이 난다고, 팔고 싶다고.”
“과, 관청이 그런 걸 살까요?”
“요즘에 마물 잡는데 요긴하게 쓰이거든요.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진짜예요?”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무거운 시선을 주었다. 망토 속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얼른 끄덕이면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의 신분증을 받아 놓았다. 나중에 성벽에 맡겨 놓을 테니 찾아가라고 했다. 소년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일부러 그런 것인데 청년은 의외로 수긍하며 받아들였다.
“사제를 앞에 두고 사기를 쳤으니, 전 신분증을 빼앗겨도 할 말이 없어요. 솔직히 건건 풀로 돈을 못 벌어도, 절 감옥에 가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나는 사기를 쳐라 마라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알아서 할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나는 소년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짐 마차를 사서 동생을 치료소로 데려가. 마기에 당했다고 하면 치료해 줄 거야. 만약 해 주지 않는다면 사제 말레드레드가 보냈다고 말하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년은 거듭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서 얼른 빠져나왔다. 청년이 잽싸게 뒤따라 붙었다.
“말레드레드?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우아하고 독특한 이름처럼, 마음씨도 곱고, 사제님들이 다 당신 같을까요?”
번지르르한 화술은 어디 가지 않나 보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갑자기 몸을 돌리자 청년은 윽 하면서 부딪칠 뻔했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볼일 다 봤으면 이만 집으로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