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20화 (120/220)

120.

간소하게 짐을 챙겨 다시 카란에게 가자 작은 마차가 보인다. 늙은 말이 끌고 있는 마차는 투박했다. 카란은 바퀴에 검은 기름칠을 하던 걸 멈추면서 타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사용감을 자랑하는 낡은 채편은 속도를 낼 때가 아니라 말을 깨울 때 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늙은 말이라 가다가 졸아 버리곤 하지. 나처럼 지팡이로 옆구리를 꾹꾹 찔러야 일어나.”

나는 그 말에 작게 웃고 말았다. 카란은 그런 나를 왠지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가 짤막하게 인사했다.

“무사히 다녀오게.”

그 말만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말이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본대를 지나서 인근 도시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치열하고 격렬했던 마물과의 전투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바람에 흩날리는 초록 풀들과 나무 잎사귀들이 움츠렸던 마음을 부드럽게 펴 준다. 화사한 꽃이 없어도 바람에 자유롭게 이지러지는 풀들,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저 평화로운 광경이란 게 언제든지 뒤바뀌어 험난한 전장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장 끝에는 또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이 순간의 풍경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광경에 눈과 마음을 맡기고 세 시간쯤 달렸을 때,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흐릿한 안개가 시야를 덮기 시작했을 때 저 멀리 노트담의 성벽이 보였다.

“사제시군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상인들의 도시 노트담은 굳건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마물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말했다.

“찾을 약초가 있어서요.”

내 말에 경비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상처가 있는지 보는 눈이었다. 나는 얼른 말했다.

“제가 다친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치료 사제에게 갔을 겁니다.”

“그러셨군요. 사제분이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보통 함께 오시기 때문에……. 아무튼 여기 있습니다. 노트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경비는 신분증과 휴가 증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나는 늙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잠깐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노트담은 상인들의 도시답게 번화한 곳이었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짐수레와 마차들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 짐을 풀 만한 여관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은화를 내밀자 금세 여인이 웃었다. 그녀는 방을 안내하겠다며 따라오라고 했고, 나는 여관 시동에게 말을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한 뒤 위로 올라갔다.

방은 조촐했다. 작은 침대와 탁자, 그리고 방 정면으로 난 유리창이 전부인 곳이었지만 제법 향긋했고 깨끗해 보였다. 여인은 씻는 곳은 공용이라고 말하고는 저녁을 바로 먹을 거냐고 물었다.

“고기 요리가 아주 맛있게 됐어요.”

마차에서 거친 빵으로만 식사를 해결했던 터라 허기가 진 상태였다. 나는 방 안에서 먹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몸이 불편하신 거 같은데 앞으로도 이쪽으로 옮겨 드릴게요.”

여인은 내가 미세하지만 다리를 절고 있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내가 멈칫하자, 여인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전사분들이 종종 오시거든요. 부상자들도 오시기 때문에 그분들 식사는 보통 방 안으로 가져다드려요.”

더 싼 곳에서 먹으려면 주점으로 가서 먹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돌아다닐 목적이 아니었고, 약초를 찾은 뒤 쉬다 갈 생각이어서 그러겠노라고 했다. 은화 하나를 더 내밀자 여인은 더욱 상냥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금방 가져올게요!”

발랄하게 나간 여인을 뒤로하며,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웠다. 3시간 달렸을 뿐인데, 어제 전투의 후유증인지 몸이 무겁게 처진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나를 깊은 생각의 골짜기로 몰고 갔다.

아론을 거절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추앙받는 기사의 연모하는 그녀가 되고 만 걸까. 마왕과의 음탕한 관계를 숨긴 채로, 그와 육체적인 관계를 계속하면서? 아론이 포기할 때까지 이 이름도 정의할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간단 말인가?

나태한 삶의 태도를 지닌 나도 기가 찰 만큼 수동적이고 괘씸한 행태였다. 비록 내가 제멋대로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삶의 가치나 방향이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쾌락을 우선시하며 불편한 관계를 거부하는 데 삶의 지향점이 있다. 즉 내 생활을 평소처럼 유지하면서, 남에게 해 끼치지 않으며 내 욕망을 마음껏 해결하는 데 무엇보다 큰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그런 내가, 아론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알면서도 오직 쾌락만을 원해 관계를 이어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아론을 괴롭히는 끔찍한 일이 될 거 같아서…….

‘더구나 아론은 내가 마왕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펠이 내게서 마족의 기운을 느끼고 발작했던 것을 보라. 아론이 내가 마왕과 관계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화가 나서 마왕을 죽이려 들 수도 있다. 어쩌면 나까지도……. 배신감과 절망감에 저도 모르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는 결심을 다졌다.

‘평생 모르게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에게 마왕의 일을 숨기는 것과 별개로, 아론을 실제로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문제였다. 아론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야 할까. 내가 도망이라도 가야 할까?

‘도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수녀원에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떠돈 적이 없던 단어였다. 나는 그만큼 현실에 순응하는 여자였다. 상황을 개척하고 개혁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그에 맞추어 사는 여자, 따라서 나는 사제로서의 능력이 너무나 고마웠고 소환사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소환사라는 직업을 쉬이 잃고 싶지 않을 정도로.

‘도망도 완전한 답은 아니야.’

소환사가 아닌 말레드레드가 되었다고 아론이 쫓아오는 것을 멈출까? 그는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가겠다고 했다. 어떤 곳이든, 어떤 시간대든 가겠다고.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껴 보고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돼지 뒷다리로 만든 요리를 먹고 나자 나는 걸어 두었던 망토를 다시 차려입었다. 물기에 젖어 있었지만 입을 만했다. 축축한 망토를 이마 깊숙이 눌러쓰고 내려가자 여관 주인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어디 나가시게요?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뇨. 근처에 약초 파는 데가 있습니까?”

“가까운 곳에 잡화점이 있어요.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잡화점인데, 약초도 취급하니 걸어가 보고 싶으시다면 그쪽으로 가 보셔요.”

나는 고맙다 말하고는 여관을 나왔다. 잡화점은 큰 대로를 따라 10분만 걸으면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안쪽은 넓고 쾌적했다. 여행자와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걸 한 번 훑고는, 나는 미약하게 풍겨 오는 약초 냄새를 따라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뭘 찾아요?”

머리에 예쁜 핀을 꽂은 아가씨가 불쑥 물어 왔다. 나는 그녀의 손톱이 약초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임신이 안 되게 하는 약이요.”

“약을 찾는 거예요? 약초를 찾는 거예요?”

“차이가 있나요?”

그러자 아가씨가 싱긋 웃었다.

“전자는 평생 임신을 못 하게 하는 거고, 후자는 한 달 동안 임신이 되는 걸 막아 줘요. 보통 당신 같은 아가씨가 찾는 것은…….”

여인은 망토 속에 얼굴을 주시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내 얼굴을 살피려는 것 같았다.

“모르겠네요. 어떤 걸 원하죠?”

“후자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요, 가져올게요.”

나는 그녀가 뒤쪽으로 들어간 사이 주변을 훑었다. 정체 모를 약물이 투명한 유리병마다 담겨 있었다. 이름표는 딱히 없었다. 그 말은 파는 자가 어느 정도 약초 지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약을 정확하게 팔 수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 있어요. 근데 은화가 두 개나 필요한데.”

여인이 가져다준 건 마른 낙엽처럼 보이는 노란 잎사귀였다. 여인은 싱긋 웃으며 씹어 먹으면 바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럼.”

웃으며 돈을 가져가려던 그녀는 내가 얼른 그것을 손으로 덮어 버리자 당황하고 말았다.

“뭐죠?”

약간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나는 한 번 더 따져 물었다.

“발라 잎사귀는 없어요?”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 어디 귀족가에는 있겠지만 여기 작은 잡화점에는 없어요. 수확량이 줄었는데 원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보니……. 워낙 가격이 비싸져서 구할 수가 없거든요.”

“그럼 이건 뭐죠?”

“무무. 낙엽처럼 보이지만 꽃을 말린 거예요. 발라드라두보단 쓴맛이 강하고, 복통이 있을 수는 있지만 효과는 확실해요.”

“복통……?”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망설여졌다. 그런 내 태도를 읽었는지 여인이 새침하게 말했다.

“필요 없으면 관둬요. 당신이 아니더라도 무무를 찾는 사람은 많으니까. 복통 따윈 신경 쓰지 않고서요.”

“이게 얼마나 있어요?”

내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여인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있더라? 아마 3개 정도? 일주일 뒤에 더 들어와요.”

“그럼 3개 전부 줘요.”

“돈은 있는 거죠?”

나는 대답 대신 은화 6개를 꺼냈다. 여인은 군말 없이 다시 뒤로 갔고, 말린 꽃을 2개를 더 꺼내 왔다.

“비싼 걸 거뜬히 사니까 말해 줄게요. 한 번에 씹어 삼키지 말아요. 잘못했다간 기절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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