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9화 (119/220)

119.

“이건.”

그의 손이 대검 손잡이로 향했다. 나는 긴장하고 말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을 때, 지휘관이 나타났다. 그는 펠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하나? 얼른 움직여! 자네들을 데려다줄 마차가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는 기절한 기사를 보며 ‘아주 늘어져 있군. 팔자 좋아.’하고 혀를 쯧쯧 차더니 그를 부축했다. 그런 뒤 펠에게 나를 부축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걷겠다고 했다.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엄청나게 아팠지만 그에게 도움 받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를 마족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마차에 올라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주 앉은 펠과 시선을 교환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있었지만 펠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휘관이 작은 목소리로 ‘말레드레드에게 마음이 있나?’ 묻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렇게 불편한 마차 동승이 끝나고, 나는 치료 사제의 도움을 받아 치료소에 한동안 있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빛의 향연.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이 다리를 매만져 주자 고통이 점차 옅어진다. 나는 이것이 신의 힘이구나 진정 실감했다. 어둠을 때려잡아서가 아니라, 고통을 감싸 안아 주는 이것이 자비로운 힘의 본질이라는 것을.

‘내 힘도 그러할까?’

누군가에는 이토록 간절하고 애틋한 손길이 될 수 있을지. 나는 잠깐 내 소환사로서의 능력을 돌아보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아론나이드 경이 찾아왔었어요.”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 치료 사제가 얼굴을 붉히며 전달했다. 내가 잠들어 있어 아론이 내 상태만 확인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가슴께를 꼭 누르고 말았다.

‘신성력이 없어진 걸 눈치챘을까?’

그냥 봐서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신성력을 다시 뿌렸다면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불안하게 심장이 뛸 때, 사제가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그런 분의 관심을 받고 계시고.”

나는 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내 상황에선 그런 열정적인 관심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생각해 보라. 쾌락에 약해 쾌락만의 관계를 원했던 내가,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남자들 사이에 끼어 버린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나는 아론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도 못했고, 마왕을 거절할 뾰족한 수도 찾지 못했다. 가볍게 생각했다가 된통 당해 버린 꼴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끌려갈 수도 없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대꾸 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제가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일주일은 다리에 힘을 주시면 안 돼요. 최대한 누워 계시는 게 제일 좋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 하면서 덧붙였다.

“참. 3일간 쉴 수 있으세요. 대장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이에요. 이번 전투에서 다친 부상자들은 무조건 3일 휴가를 주신다고 하셨어요.”

휴일이 생겼다니. 나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나가서 발라 잎사귀나 그 비슷한 약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치료 사제는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되니 숙소로 돌아가 푹 쉬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카란의 천막으로 향했다.

“다리 쓸 수 있나?”

약간 다리를 절면서 들어온 나에게 카란은 대뜸 묻기부터 했다. 다치면서 은퇴한 그의 눈에는 경험자로서 걱정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용건을 말했다.

“외출을 하려고 하는데, 마차를 빌릴 수 있을까요?”

“소형 마차여도 되나?”

“네, 혼자 다녀오려고요.”

“어디로? 얼마나?”

다리도 다쳤는데 무리하게 당일치기로 움직일 필요 없을 것이다.

“3일 정도, 인근 도시로요.”

“그럼 쉬는 내내 나가 있겠다는 뜻이군.”

카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음, 여기 보니, 작은 마차가 있군. 바퀴가 좀 낡아서 사제들이 선호하지 않는 녀석이지. 하지만 쓸 만해. 가운데 바퀴 고정쇠를 두 시간마다 조여 주기만 한다면,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도 있으니까. 떠나기 전 내가 잘 돌아가도록 고정쇠에 기름칠을 좀 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짤막하게 인사했다. 카란은 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근데 아론나이드 경하곤 어떻지?”

“네?”

“아니, 소문이 파다해서 말이야. 아론나이드가 자네를 챙긴다고.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티를 내고. 때문에 다들 무슨 진전이 있는지 엄청 궁금해하고 있어. 여전히 아론나이드 경만의 짝사랑인지, 아니면 양방향의 사랑인지.”

나는 머뭇거렸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읽었는지 카란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는 노파심에 덧붙인다면서 말했다.

“평소라면 남의 연애 등에 관심 없었겠지만, 요즘 본대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물어봤네. 다들 발라 잎사귀가 공급이 안 되어서 그런지 남의 연애에 더 관심을 쏟는 분위기랄까? 웃긴 건 상부에서도 자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한다는 거야.”

“…….”

“아론나이드 경의 신분 때문인지 위에서도 자네를 주시하는 것 같으니까 조심하게. 눈과 귀가

몰려 있을 때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야.”

그의 조언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3일간 나가 있는 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대로 숙소로 가서 짐을 챙겨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점심을 먹고 갈까 고민하면서 걸으니 자연스레 발길은 숙소로 향해 있었다.

‘……펠?’

그러나 내 숙소에는 보기 싫은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으며 어제 절뚝거리던 다리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술과 눈빛에서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나는 재빨리 다른 숙소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나를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가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 하지만 그가 떠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아론……! 그의 목소리를 알아채자마자 나는 살짝 천막 뒤로 고개를 빼었다. 펠의 얼굴이 아론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말레드레드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장한 채로요?”

“경이 신경 쓸 바는 아닙니다.”

펠의 대꾸에 아론이 잠시 말이 없었다. 곧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제가 신경 쓸 바입니다. 제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면 누구를 신경 쓰겠습니까.”

“이건 작전이나 훈련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휘관인 경께서 끼어들 부분이 전혀 없어요.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펠은 곤란한 듯이 말을 삼켰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로써 반드시 확인을…….”

“펠. 지금 그대는 제가 사랑하는 여인의 숙소에서 완전한 무장을 하고서,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제가 이대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 지휘관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까?”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를 연모하는 남자로서, 그녀의 숙소에서 꺼져 달라는 말입니다.”

“……!”

아론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펠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이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경!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전 그녀에 대해 호감이 조금도 없습니다! 경도 아셔야 합니다! 그녀는 사실 추악한 비밀을 숨긴 사제로서……!”

아론은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은 잘 볼 수 없었지만 그저 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제가 증명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잠시 접어 두고 저를 믿어 주시면……!”

“계속 모욕적인 소리를 떠들 예정이라면.”

아론은 그를 향해 검을 들었다. 거대한 검의 끝이 자신에게 향하자 펠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겁니다.”

아론의 목소리는 지극히 침착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고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펠은 무척이나 난감한 낯으로 굳어져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펠이 먼저 고개를 떨어뜨리며 물러났다.

“경하고 싸울 맘은 없습니다. 제 목숨의 은인께 검을 들이댈 만큼 저는 타락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대꾸한 펠은 숙소 앞에서 떠났다. 나는 몸을 숨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펠이 극악하게 외쳤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추악한 비밀, 끔찍한 존재. 내 가슴에 콕콕 박혀 심장을 찔러 온다.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 분명히 알라는 듯이.

나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숙소 뒤에서 걸어 나왔다. 내가 가자 아론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이제 치료소에서 오는 길입니까.”

아론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을까. 왜 나를 향한 살기를 뿜고 있는지, 왜 나를 끔찍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안색이 조금 창백하군요.”

그저 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모른 척해 버리며 내 안색 걱정만 하는 그가,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고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왠지 불편한 속을 느꼈을 때 아론이 말했다.

“3일 동안 휴가니 쉬면서 몸을 회복하면 될 거예요.”

“나갔다가 올 거야.”

나는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아론이 멈칫했다.

“3일이요? 어디로 가는데요?”

“인근 도시로. 잠깐 바람도 쐴 겸.”

“그럼 저도…….”

“혼자 갈 거야.”

나는 바로 말을 잘랐다.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어. 이번 부상이 그 기회를 준 거야. 아론은 할 일도 많으니까…….”

그는 지금 무장을 한 상태였다. 곧 작전에 투입된다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면 부상자들로 생긴 공백을 메우느라 멀쩡한 전사들도 더 바삐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론은 본대에 있어야지. 이런 때 빠질 수 없으니까.”

내 논리적인 대꾸에 아론이 잠시 할 말이 없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어느 도시로 가는 겁니까.”

“무슨 일로 가냐고 묻진 않아?”

“물어도 됩니까.”

“발라 잎사귀를 구하러. 누군가 독점했는지 전혀 구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내 비꼬는 어조에 아론이 멈칫했다.

“……그렇군요.”

“3일 후에 올 거야.”

“알겠습니다.”

아론은 뜻밖에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의아했지만, 그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구나 생각했다. 지휘관의 지위란 건 가벼운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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